어머니도 여자였다는 것을
기억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삽화=필몽>

방학은 거의 축제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만 먹으면 친구들을 만나고 웃고 떠들고 다시 웃었다.

“지금 안 놀면 놀 시간이 없다캉께.”

창애가 말하면 정남이가 합창을 했다. 그리고 기자가 그리고 정선이가 그리고 내가 “그래그래.”하며 놀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렇게 놀았다. 대학에 가면 놀지 못한다고 서로 머리를 끄덕이면서. 사실 대학에 가서도 놀긴 마찬가지였는데.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우루루 우리 집으로 몰려가 어머니께 밥을 달라고 했다.

“아이구 그렁뱅이처럼 또 몰려 왔나?”

그래도 웃으며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밥알하나 남기지 않고 먹고 떠들었다. 참 좋은 나이였을까? 친구가 그렇게 좋았을까? 창애가 모임의 이름을 정하자고 제안을 했다. “이름? 무슨 모임에 이름이 있어?” 그렇게 서로 의문을 가지면서도 왠지 근사하게 느껴졌고 모두 손뼉을 쳤다. “그래그래.” 그렇지 않은가? ‘김소월 시집도 읽은 내가 그래도 이름을 지어야지.’하는 생각이 번뜩거렸다. 이름만은 내가 지어야 한다고 멋을 부렸다. 호기롭게 외쳤다.

“행주치마!”

아아~ 놀라워라. 즉흥적으로 내가 ‘행주치마’라고 외쳤다. 친구들이 함께 외쳤다. “그래그래, 좋다좋아!” 우리 자신이나 모든 사람들의 구정물을 대신 받아주는 여자들이 되자고 했던 것이다. 이런 희생정신이 우리 모두에게 숨어 있었나보다. 이 세상의 행주치마가 되자. 우리가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자. 엄숙하게 손을 맞잡기로 했던 것이다. 술은 없었지만 ‘건배’같은 것이었다.

“행주치마를 위하여!”

그리고 건계정(建溪亭) 수승대를 돌아다녔고, 할 일 없이 같은 거리를 오가곤 했다. 정말 할 일도 없이 말이다.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은 하나도 없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했을까? 저녁에 헤어지면 아쉽고 또 아쉬웠던 것이다.

심장 터지는 속앓이

그렇게 돌아 다녔으니 밤엔 죽은 듯 잤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새벽 3시쯤 화장실을 가느라 잠에서 깨어 마루로 나갔다. 물론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눈을 부비며 방문을 열고 나간 나는 참 이상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

마루의 벽시계는 분명히 새벽 3시를 알리고 있었다. 바로 그 벽시계 아래 마루 끝에 어머니가 멍하니 앉아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다. 쪽머리는 풀어져 어깨를 덮고 있었고, 옷은 고쟁이바람이었다. 다 헤어진 런닝셔츠가 축 늘어져있었다. 자다가 나간 나는 어머니의 그 황당한 모습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

“귀신인줄 알았잖아!”

왜, 왜 그 새벽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루 끝에 무엇 때문에 그리도 세상 허망하게 앉아있는지 생각할 줄을 몰랐다. 내가 놀란 무서움. 그 사실 하나만 생각하는,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고등학생 정도라면 그 정도의 현실에서 어머니의 아픔을 헤아려야 하지 않았을까?

“엄마! 아직도 안 잔거야? 왜 그러는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말하고 어머니 손이라도 잡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버지가 안 들어온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 시간까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 뻔했다. 차라리 아무 말 없이 어머니 손을 잡거나 안아드렸으면 아마도 어머니는 날 안고 컹컹 우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귀신 운운하며 화를 버럭 내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픈 개처럼 기어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자야지.”

딱 그 한마디를 하며 방으로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소변을 보고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잔 것이다. 아픈 개처럼 기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 순간에는 스쳐 지나갔지만 그 희미한 영상은 내 뼈에 새겨졌을까? 이상하게도 세월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아무런 통증 없이 바라보던 어떤 순간이 시간의 붓질이 강해지면서 오히려 분명하고 확실해지는 찰나의 모습. 그것이 나에게는 그 어느 날 새벽의 어머니 모습이다.

새벽 3시까지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그 심장 터지는 속앓이를 홀로 난도질을 하다가, 홀로 세상의 모든 가능성의 상상력을 펼치다가, 불이 되었다가 물이 되었다가, 타오르다가 폭포수로 쏟아지다가, 여윈 자신의 몸 하나도 버틸 힘을 잃고 기어 기어서 방으로 들어가는 여자. 그때 어머니 나이는 놀랍게도 40대였다.

내가 생각하는 어머니는 그냥 공기 같은 사람이었다. 여자도 남자도, 아이도 어른도, 키도 컸는지 작았는지의 관념을 떠나 그냥 하늘같은 사람이었다. 고개만 들면 보이는 하늘, 내가 어디를 가도 내 위에 존재하는 존재. 그 어떤 의미도 가치도 주지 않는, 무미건조하지만 아니 느껴지지는 않지만 필연코 존재해야만 하는, 아니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냥 존재하고 희생을 지속하고 지속하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희생이란 단어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아주 당연히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하지만 빨래를 하고, 밥하고, 우리에게 욕이나 하는 단순한 어머니. 뭐 그런 여자, 그런 어머니. 감정이 흐른다는 것, 외로움을 탄다는 것, 홀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억장 무너지는 자신의 가슴을 홀로 쓸어 담는 어머니가 너무 낯설었던 것이다.

“저게 무슨 어머이고.”

그렇게 다시 흘러갔다. 그것은 내가 생각할 일이 아닌 것이다. 쉽게 잊혀 졌고, 내 행동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친구들과 놀고 놀고 또 놀고 저녁 답에 집에 들어갔다. 집안 분위기가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다. 언니가 부엌에서 어둡게 서 있고, 대구언니(결혼한 언니가 왔었다)가 무슨 음식인가를 부엌에서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그 찰나 안방에서 어머니의 탄식 같은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앞 강물 흘러 흘러’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단골노래 내용은 이렇다.

“당신이 가는 두 갈래 길은 내가 막을 수 없고~ 내 눈에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은 당신이 막을 수 없고~”

아리랑 곡조로 부르는 이 노래는 어머니가 취하면 부르는 단골노래다. 그날도 거의 쓰러질 정도로 취해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사실 처음 보는 일은 아니었다. 그 술이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나는 기억에 없다. 어머니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적어도 한 사흘은 만신창이가 된다.

나는 늘 화부터 냈다.

“저게 무슨 어머이고.”

심지어 이런 막말까지 퍼부어 대면서 어머니를 미워하고 무시했다. 왜 어머니가 그렇게 막장으로 술을 마셔야만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어머니의 가슴을 어머니의 심장을 어머니의 눈물을 어머니의 화를 어머니의 절망과 좌절을 무시하며 눈감았던 것이다. 왜 어머니가 술을 마셔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따듯하게 손잡아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어머니도 여자였다는 것을 기억해내는 사람도 없었다. 아직은 욕망과 욕정을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나이이며, 평범한 부부의 일상을 보내고 싶은 평범한 여자였다는 것을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더 어렸을 때 어머니는 담배도 피우셨다. 왜 그것을 피우느냐고 물으면 어머니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것이 내 벗이고 낙이다.”

어머니의 외로움은, 어머니의 치명적 고독은 그 수명이 길었다. 담배 한 대에 마음을 붙여 속내의 붉은 피 같은 울분을 뱉어내는 그 작업 하나에 인생의 벗과 낙을 말하며 살았으니 말이다. 그 징그러운 고통의 한을 어느 누구 고백할 이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홀로 견디기는 참으로 결혼생활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는 고독한 전쟁이 어머니의 삶이었을 것이다.

아침이면 다시 어머니로 돌아와 온 집안일을 하며 딸들을 챙기며 살았던 그 무표정 속을 나는 조금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그 어느 딸 하나 잡고 울고 싶지 않았을까? 길가다 아무나 붙잡고 울고 싶지 않았을까? 시퍼런 강물 같은 속내를 털어내며 땅을 치고 싶진 않았을까? 기억컨대 나는 단 한 번도 어머니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들으려고 귀를 연 적이 없었다.

그러니 오직 술이나 담배에 자신을 의지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외도가 그처럼 어머니를 괴롭게 한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고향의 나무와 산과 바람과 물도 몰랐고, 그 자연이 나에게 주어진 귀한 선물이라는 것도 그런 고향을 가지게 된 것이 선물이며 행운이라는 것도 몰랐고, 남편이 죽은 언니의 억장 무너지는 삶의 질곡도 몰랐으며 가족이 무엇이며 인간애가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자고나면 이루어지고 손에 쥐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어머니의 진구렁 같은 가슴속을 열어 보려고 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어머니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조차도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 그러니 어머니의 그 벼랑 같은 가슴속을 이해하려 들었겠는가? 어머니의 외로움은 푸른 칼날처럼 위태로웠을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는 사람보다는 술이나 담배에 자신을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내었을 것이다. 그것이 몸에 좋고 나쁘고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단지 어머니 자신의 일이란 것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세상은 늘 그렇게 돌아가듯이, 나는 언제나 똑같은 마음으로 다시 부산에 갔고, 나의 학교생활은 계속되었다.

<삽화=필몽>

굶어도 배부른 일

학교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그날따라 파도가 춤을 추었다. 폭풍이 오고 있는 것일까? 그날 국어시간 수업 대신 ‘하루’란 제목으로 시나 산문을 써내라고 하셨다. 나는 시를 선택했다. 지금 그 시를 찾을 수는 없지만 또 뭐라고 썼는지 기억도 없지만, 국어선생님은 최종점수를 발표하시면서 내 시에, 내 이름에 최고점수를 불러주셨다.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내가 글은 잘 쓰지.’라는 잘난 척도 하면서 일어섰다.

그 다음날 국어 선생님이 수업시작 전에 말씀하셨다.

“이번 경남백일장에는 신달자가 나간다.”

말하자면 학교대표로 경남백일장에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좀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국어선생님의 여러 가지 충고와 격려로 경남백일장에 나가게 되었고,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경남백일장에서 일등을 한 것이다. 나는 흥분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국어선생님은 나보다 더 흥분하신 것 같았다.

“달자야 니는 시인이 될끼다.”

내가 최초로 내 미래에 대해 들은 덕담이며 무지개였다.

제목은 ‘길’이었다. 그 시도 지금 찾을 수 없지만, 나는 산에서 바다까지의 내가 더듬어 살아 온 길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도 산이며 바다가 저 멀리 넘실거리지만, 나는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만 한다는 다짐 같은 글이었다. 그때 심사위원은 이형기·박재삼 선생님이었는데 그 인연으로 친분을 갖게 되기도 했다.

이형기 선생님은 국제신문에 계실 때 자장면을 사주시기도 했고, 박재삼 선생님은 서울에서 서울신문사에 계실 때 다시 만나 옛날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이런 훌륭한 시인들을 알게 되다니. 나는 서서히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 자신을 바라보는데 어머니가, 아버지가, 언니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자신 속에는 나 혼자가 아닌 가족이 있었고, 고향이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으며, 동네와 사회가 나라가 세계가 협공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다.

내 존재가 아주 미약하나마 이 세상의 존재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렇다. ‘그 어떤 계기는 작지만 큰 문을 열수도 있다.’는 것을. 어느 책이던가? 그런 문장을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경남백일장 일등으로 가장 삶의 행동이 달라진 사람은 어머니였다.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을 모두 강당에 모아 놓고 시상식을 했다. 어머니가 그것을 놓칠 사람인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거창에서 부산으로 바로 달려 와서 그 시상식을 다 보았다.

“신달자는 학교이름을 높인 학생이다.”라고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고, 국어선생님은 “신달자는 이미 훌륭한 시인”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원래 시상식은 칭찬 일변이지만 어머니는 지나친 과장이 있는 것도 모르는지 너무 놀라워하셨고, 행복해 하셨다.

촌에서 왔다고 조금 얕보던 친구들도 내 손을 잡아주었기에 나는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금은 현금 오만환이었고, 부상으로 여행가방을 받았다. 고등학생 상금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나는 시상식이 끝나고 그 돈을 어머니께 드렸다.

“이 돈은 어머이 해라. 상금은 어머이가 받아야 안 되나.”

‘상금’이라고 적힌 봉투를 드렸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울먹이다가 말겠지 했는데 어머니는 허리를 굽히면서 울음을 제어하지 못하셨다.

“우짤라꼬. 챙피하다 와이라노. 저 사람들 다 안보나.”

나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아마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어머니도 아시는데 내가 꾹꾹 등을 누르며 “제발, 제발”하는데도 어머니는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가?

어머니의 울음 속에는 어머니의 지난 진구렁 과거가 외로움과 견딤과 해도 해도 안 되는 막막함과 자신의 비극적 인생과 술과 담배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나는 진땀이 났고, 친구들이 다 자리를 비운 빈 강당에 한동안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다가 함께 하숙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며칠 굶어도 배가 부르다.”라는 말을 남겼다. 굶어도 배부른 것 중에 자식 잘되는 일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어머니가 미워도 ‘오래오래 어머니가 굶어도 배부른 일들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면 어머니에게 울지 않고 술도 담배도 없이 만족할 만한 행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과연 그렇게 될까?

신달자
시인.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첫 시집 〈봉헌문자〉를 비롯해 수필집 〈나이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을 펴냈다. 만해대상 문예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공초 오상순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부문),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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