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더위가 물러가고 어느덧 백로(白露)를 맞고 있습니다. 백로는 ‘흰 이슬’이란 뜻으로 완연한 가을이 오고 있음을 상징하는 절기입니다. 농부들은 흔히 8월 백로에 비가 오면 대풍(大)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당한 때 알맞은 수분으로 대지를 적셔주는 비를 ‘쌀비’라고 합니다. 쌀비는 농사를 짓는 입장에선 여간 고마운 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전해지는 따뜻한 마음은 ‘쌀비’와 같습니다. 그러나 잔뜩 기대를 했는데도 오히려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천둥번개만 요란하다면 인정이 넘치는 훈훈한 사회를 만들기 어려울 것입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상황이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은 여성의 인권을 존중한다면서도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살상을 자행하는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연민보다 종교적 신념을 앞세우다 보니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슬람법에 따라 통치되는 아프가니스탄은 한마디로 공포의 땅이 되고 있고 사람들은 무자비한 폭력앞에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자비입니다. 자비는 ‘쌀비’와 같은 것으로 모든 곡식이 풍성한 결실을 거두듯 인간들에게도 평화와 안락을 제공합니다. 특히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연자비(無緣慈悲)라 합니다. 무연자비이지만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깊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어떤 조건을 걸어 이루어지는 자비가 아니고 무조건적인 베풂에 있기 때문에 사량(思量)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자비가 일반적인 사랑과 다른 것은 연민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중생을 향한 연민이 무한한 사랑을 발현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慈)’는 그래서 ‘비(悲)’에서 나옵니다. ‘자’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중생에게 낙(樂)을 주는 것이요, ‘비’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 사랑입니다.

신라시대 때 원효대사가 진심으로 존경한 대안(大安) 스님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대안 스님은 세속오계를 제정한 원광법사와 사형사제 관계였다고 합니다. 특히 귀족 중심의 신라불교를 민중불교로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안 스님이 어느 날 젖을 구하기 위해 서라벌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여자가 생겨 아이를 낳았는가 보다. 그런데 여자가 도망갔다.”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대며 대안 스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래도 스님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젖을 동냥했습니다. 소문을 듣고 원효대사가 대안 스님이 기거하고 있는 동굴을 찾았습니다. 과연 대안 스님이 어린 생명에 젖을 물리고 있었습니다. 원효대사가 가까이 다가가 그 광경을 자세히 살폈는데 대안 스님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 생명은 어미 잃은 너구리 새끼였습니다. 너구리 새끼들은 대안 스님이 동냥해 온 젖을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아냥 따위에 괘념치 않고 너구리 새끼를 살리기 위해 젖동냥에 나섰던 대안 스님을 잠시나마 오해했던 원효대사는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이처럼 차별이 없고,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이루어지는 사랑을 무연자비라고 합니다. 대안 스님은 어미 잃은 너구리 새끼들이 그냥 불쌍했습니다. 굶주리며 죽어가는 그들에게 한없는 연민과 측은지심이 생겨나 스님은 동냥젖을 구하러 다녔던 것입니다.

불교에선 자비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즉, 중생연(衆生緣)자비·법연(法緣)자비·무연자비라고 해 이를 삼연(三緣)자비라 부릅니다. ‘중생연자비’는 친한 사람이거나 친분이 없는 사람 모두를 친한 사람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베푸는 자비입니다. ‘법연자비’는 일체의 법이 오온의 거짓된 화합임을 알고, 대상과 마음의 본체가 공(空)한 줄을 깨달은 아라한들이 일으키는 자비입니다. 이들은 인연 있는 중생들을 상대로 법을 전함으로써 아라한으로 인도하고자 합니다. 다만 누구에게나 평등심을 갖고 자비를 베풀려고 하나 기쁨과 슬픔의 차별이 적용돼 완전무결한 자비행태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이에 반해 ‘무연자비’는 온갖 차별화된 견해를 여읜 절대 평등의 경지에서 오로지 각자(覺者), 즉 부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자비입니다. 부처님의 무연자비는 중생들에게 낙을 주고 고통을 없애주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부를 이루고자 한다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은 종교적 신념이나 이념보다 자비를 앞세우는 게 옳다고 봅니다. 자비가 있는 곳엔 대중이 화합하고, 화합하면 건강한 국가를 이룩하게 됩니다. 한결 같은 자세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그 마음이 자비이므로 폭력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폭력을 자비로 바꿀 때 오히려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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