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80년 가까이 배운 모든 인간적 감정과 사회적 논리는 어머니라는 이름 안에 어머니라는 삶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희생과 양보와 인내와 질서와 견딤과 침묵과 겸허와 ‘나’를 바치고 ‘나’를 뛰어 넘는 이성과 막다른 길에서도 포기를 모르는 그 세계는 ‘어머니’라는 이름 안에 존재할 뿐입니다. 

98세의 어느 어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계실 때 딸이 어머니의 귀에 소리쳤다. “엄마!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말해요. 얼른 부를게요.” 그 소리를 알아듣고 어머니가 실낱같은 소리로 말했다. “어어엄~마아~” 그리고 그 어머니는 숨을 놓으셨다고 한다.

‘어머니’라는 말은 세상 전 인류가 경험한 모든 비유 중에 가장 으뜸이며 확실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사랑이건 인내이건 헌신이건, 그것이 극복정신이건 자기 몸을 불사르는 자기 헌납이건 인간을 표현하는 가장 존엄한 줄임말이건 간에 이 모두의 비유법을 하나로 묶으면 그것은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면서 신의 자격을 갖는 이름, 바로 ‘어머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스승

엄마하고 부르면 나는 지금도 아프다. 엄마하고 부르면 나는 지금도 거센 파도처럼 통곡하고 싶다. 끙끙 앓는다. 나에게 엄마는 울음이고 통증이다. 그러나 ‘엄마’하고 부르면 아픔도 없고 울음도 그치고 편안하고 화평하다. 나에게 엄마는 영원한 그리움이다. 엄마는 가장 현실적이면서 가장 신비한 존재다. 엄마는 사람이면서 하느님인가 보다.

엄마는 눈이고 귀이고 입이다. 엄마는 팔이고 가슴이며 다리다. 엄마는 모든 것이다. 엄마는 하늘이고 땅이고 나무이다. 엄마는 별이고 달이고 눈이며 비며 바람이다. 엄마는 산이며 바다이며 작은 언덕이며 가파른 절벽이며 평평한 길이다. 엄마는 청푸른 새벽이며 따뜻한 한낮이며 어스름 저녁이며 안락한 깊은 밤이다.

엄마는 뼈의 매듭마다 맺힌 눈물이며 서리서리 포개진 깊은 한숨이며 그치지 않는 뼈저린 통증이며 붉은 한(恨) 덩어리며 날마다 찾아오는 외로운 불면이다. 안락한 의자이며 이 세상에 없는 오직 하나인 포근한 품이며 파고들수록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평화이다. “낮잠이라도 좀 자그래이.”, “한 숟가락만 더 먹어라.” 어디에서도 더 들어볼 수 없는 엄마의 사랑은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오직 ‘엄마표’ 하나다. 그리고 엄마는 인생의 바른 교육이었다. 졸업이 없는 긴 생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는 학교이기도 한 것이다. 엄마의 경험을 들여다보면 아직 발길 닿지 않은 탐험되지 않은 지역까지 아슴히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엄마의 길이었다. 

엄마는 “교육은 법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어린 나무가 처음에 뿌리를 잘 내리면 버팀목이나 울타리가 필요없다.”고 했으며, “사람은 동물적이거나 천사적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교육은 마음을 단련시켜 천사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을 극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것은 ‘엄마 학교’ 교훈이기도 했다. 그렇다. 그 학교가 내준 숙제를 해야만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삶이 아닐까.

대지진이었다

지반이 쩌억 금이 가고

세상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

하느님은 사람 중에 가장

힘센 한 사람을

저 지하 층층 아래에서

땅을 받쳐 들게 하였다

어머니였다

수억 천년 어머니의 아들과 딸이

그 땅을 밟고 살고 있다

‘어머니의 땅’이란 시의 전문이다. 어머니보다 더 힘센 사람은 이 땅위에 없을 것이다. 자식의 일이라면 불길 속에도 뛰어 들고 자식의 일이라면 수영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 들고 자식의 일이라면 원수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어머니가 아니겠는가. 육신의 마지막을 그리고 그 육신을 업고 있는 영적 정신의 힘은 이 지구상에 어머니를 앞설 힘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어머니는 세상의 주인공인 사람 중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내 어머니도 그랬다. 단 한 번도 행복할 수 없었던 여자, 그 여자가 내 어머니였다. 그러나 내가 한 사람으로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두루 거치면서 만난 그 많은 스승 중에 가장 큰 스승은 내 어머니라는 사실을 나는 아직 변경할 의사가 없다. ‘ㄱ’자도 몰랐던, 학교 문 앞에도 가볼 수 없어서 글자 앞에서는 장님이었던 어머니지만 나의 가장 큰 스승은 ‘엄마’라는 것을 나는 지금도 믿는다. 물론 나는 엄마가 부끄러운 적도 많았다.

그런 엄마는 패배와 실망과 좌절과 아스라한 절벽 끝에서의 외로움과 두려움과 위기만이 엄마의 전 인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할 만큼 위대했다고 생각하면서 절규할 만큼 죄송하고 죄송하다. 

엄마는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 태어나 15살에 거창군 거창읍에 사는 두 아들 중 15살 장남에게 시집왔다. 안의면은 거창에 인접한 동네였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작은 구멍가게를 열었고, 외삼촌은 한학자였는데 집에서 책만 보는 선비였다. 엄마가 15살에 시집가서 잡다한 노동을 하며 많은 식구들의 살림을 도맡았는데, 그 시절 여자의 자연스러운 삶의 풍경이었다. 엄마는 그 자연스러운 시절의 흐름을 순종적으로 따라 살았다 그러나 운명은 엄마를 자연스럽게 따라 주지 않았다 

엄마의 인생은 이 운명과의 싸움이었다. 질척거리는 진흙위에 온몸을 내던지며 싸운 결과는 역시 싸우기 직전 엄마의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운명에게 졌다. 피투성이 싸움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소원, 소망, 희망은 단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 엄마는 쓰러졌고 그리고 죽었다. 그 어떤 슬픔과 분노도 딛고 일어섰지만 죽음은 딛고 일어서지 못했다. 67세였고, 1978년 10월20일이었다.

엄마의 열다섯 살 시집살이

엄마의 첫날밤은 공포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 밤이 지난 새벽, 아직 하늘의 별들이 반짝거리고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시간. 마당에서 시할머니의 헛기침소리가 났다. 어린 손녀 며늘아기는 온 몸이 얼어붙은 듯 했지만 서둘러 옷을 입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시할머니가 버티고 서 있었고, 어린 손주며늘아기는 허리를 굽히며 섰다. 시할머니는 칼바람 같았다고 엄마는 늘 회고했다.

“니는 우리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딱 하나, 아들만 다섯을 낳아야 한데이.”

칼바람은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안채로 사라졌다. 엄마의 인생은 여기서부터 엉키기 시작했다. 그 말을 하필이면 첫날밤 새벽 아니면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 또 아들 낳는 일이 여자마음대로 되기라도 하는 것이란 말인가?

엄마는 첫 딸을 낳았다. 겨울이었다. 아이 낳고 5일째 시할머니는 이불호청을 빨아오라고 시켰다. 엄마는 냇가로 가서 호청을 물에 넣었다 살얼음이 낀 냇물속의 호청은 뻣뻣하게 얼어서 살아났다. 빨래는 할 수 없었다. 아래로 핏물을 쏟으며 그 뻣뻣한 호청을 어께에 메고 집으로 갔다는 말을 들은 것도 수백 번. 엄마는 둘째도 딸을 낳았다. 미역국은커녕 죽도 주지 말라는 시할머니의 명령이 떨어졌다. 젖 먹이느라 잠시 누워도 그 꼴을 못 봐서 시할머니는 설거지를 시키고 마루를 닦게 했다. 가만 두질 않았다. 하루에도 서너 번 쓰러졌다가 일어서는데 그대로 쓰러져 죽고 싶었다는 말도 수백 번.  

아들에 대한 공포는 엄마의 인생을 그대로 덮었다. 결과적으로 엄마의 아들점수는 너무 낮았다. 아버지와 사이도 좋지 않았지만 자식을 열 명 낳았는데, 딸 일곱에 아들 셋이었다. 그러나 혹독한 운명은 아들 둘이 죽고, 딸 하나를 앗아갔다. 결국 아들 하나 딸 여섯을 키우며 인생을 보냈다.

엄마는 늘 말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모두 내 한(恨)이고 물속에 살아있는 물고기도 내 한이라고 말이다. 아버지는 엄마가 두 딸을 낳았을 때 이미 엄마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그런 엄마의 두 발이 땅에 닿았을까. 그러나 삶은 명령이다.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눈을 뜨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동생이 결혼을 해 엄마에게 동서가 생겼다. 요즘에도 서로 세밀한 경쟁이 있는 관계가 틀림없다. 그러나 엄마는 동서에게 아무것도 이길 것이 없었다. 우선 부잣집 딸이란 게 다르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게 달랐다. 무엇보다 죽어도 못 따라갈 것이 동서는 대구 경북여고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교육에 가장 결핍을 느끼던 엄마는 모든 것에 지기로 스스로 약속을 했다. 동서의 노예로 살아가자고.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이 있었다. 엄마의 동서는 아들 여섯에 딸을 하나 두었다. 이 엄청난 차이를 엄마는 다만 운명이라 여기며 땅을 기며 살아야 했다.

엄마는 술을 자주 마셨다. 담배도 피웠다. 딸들이 술이나 담배를 빼앗으면 늘 같은 대답을 했다. “이것이 내 낙이고 벗이다.” 이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생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포기한 상태로 살아내기에는 이런 술이나 담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엄마에겐 낙이 없었고, 벗도 없었다. 그래서 술과 담배가 낙이고 벗이라고 말한 엄마의 표정에는 늘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이길 것도 질 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 같은 세상에서 그나마 남은 자식을 바라보며 사는 일은 절대자의 명령이므로 그 생명을 이어갔는지 모른다.

엄마가 원한 ‘동서같은 딸’

오직 하나 남은 아들은 엄마의 자존심이며 살아가는 이유이며 숨을 쉬는 힘이었다. 모든 힘을 그 아들에게 쏟았다. 그 아들에게 쏟은 그 열정만이 엄마의 목숨을 유지하는 에너지의 씨앗이었던 것이다. 

그 아들은 내 바로 아래였다. 그래서 남녀의 차이를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나였다. 6·25전쟁 때 나는 8살, 동생은 4살이었다. 4살은 피난길에도 엄마 등에 업혀있었고, 8살은 내내 한밤에도 걷고 걸었다. 나는 4살 때 아들이 태어나면서 고립된 섬이 되었고, 아직은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되어야 하는. 누구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딸 여섯 중의 하나였을 뿐 그 누구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홀로 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옷도 언니들 입었던 것을 물려받았다. 죽기보다 싫었다. 나는 새 옷을 입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엄마는 소고기 한 조각, 계란하나도 갈등 없이 아들에게만 주었다. 철칙이었으므로 질투나 시샘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계란이 너무 먹고 싶었고, 껍질을 벗겨 아들 입에 넣어 주는 엄마가 너무너무 미웠다. 우리 집에서는 당연한 현실이었지만 유독 나는 그 순간을 이겨내기 힘들었다. 어느 날 나는 저항했다. 

“앙앙~ 왜 아들만 주는 거야! 나도 먹고 싶어!”

그렇게 울자 언니들은 슬슬 방을 나갔다. 엄마도 대답 없이 슬슬 방을 나갔는데 내일 아들에게 줄 계란을 숨겼는지도 모르겠다. 아, 계란.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어느 날은 작심하고 아들 입으로 들어가는 계란을 확 뺏았다. 그 바람에 계란은 내 주먹 안에서 깨어지고 뭉글어져서 누구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엄마에게 빗자루로 적어도 다섯 번은 맞은 것 같다. 그래도 아들마저 못먹었으니 억울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 삶은 계란 하나가 너무 아까웠다.

아들에 대한 몰입은 동네에서도 소문이 났을 정도로 어머니의 병적 요소였지만 누구도 고쳐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들이 유치원에 입학할 때 우리 고향에서 제일 비싼 양복을 아이에게 해 입혔다. 그것도 소문이 났다. 사람들은 그런 엄마를 불쌍하게 생각하곤 했다. ‘쯧쯧’ 혀를 차고는 큰 병을 앓는 사람을 보듯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병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엄마였을 것이다. 그 병을 견디면서 애착을 가지고 전적으로 몰입한다는 걸 알고 있던 엄마는 그저 홀로 술과 담배를 낙으로 벗으로 섬기며 살아냈는지 모른다. 엄마는 그 집안의 노예로서 몸을 사루었지만, 운명은 가장 귀한 혈육들을 빼앗아갔다. 남편의 사랑도 받기 어려워진 엄마는 도무지 자기편이 없는 외로운 삶을 이어 갔을 뿐이다.

그러나 엄마는 학교가 되어가고 있었다. 너른 마음의 운동장을 마련하고 의식의 변화를 꾀하는 교실을 짓고 스스로 그 학교의 교사가 되어 갔다. ‘아들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딸도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자기 몫을 하는 재목’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엄마가 가장 부러워했던 동서같은 딸을 만드는 일은 엄마가 제2의 인생을 사는 여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엄마는 “나는 이미 틀렸다. 그러나 내가 가장 많이 가진 것이 딸이니 그 딸을 동서보다 더 훌륭하게 키우는 일이 내 인생의 목적이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정신은 인간의 혼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머니란 바로 대지(大地)이므로 이 대지로 불가능한 것은 없으므로 자연의 힘으로 돌아가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었다. 과연 내 엄마는 그렇게 통 큰 목표를 세워 과연 그것을 이루어 낸 것일까? 과연 운명은 엄마를 도와줄 것인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자신이고, 가치체계란 그가 선택하는 의미 그 자체이다. 그렇다. 생이란 몇 번의 죽음과 몇 번의 부활이 연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라는데, 과연 엄마의 생에 부활은 존재했던 것일까? 

신달자 
― 시인.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첫 시집 〈봉헌시집〉을 비롯해 수필집 〈나이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을 펴냈다. 만해대상 문예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공초 오상순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부문),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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