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바람 지닌 불자
같은 곳 향해 기도하는
깊은 울림 그리워

새벽 다섯 시부터 절 마당에는 쌀자루를 이고 온 신도들이 줄을 서곤 했다. 각자 가지고온 쌀로 마지를 지어 스님과 함께 불공을 올리기 위해서다. 1980년대까지 정초가 되면 사찰마다 어김없이 이러한 풍경이 벌어졌다. 당시에는 합동불공의 개념이 없었고 집집마다 따로 기도를 올렸기에 이를 독불공(獨佛供)이라 불렀다. 

한 집에서 스님과 짝을 이루어 부처님께 마지와 불공을 올린 뒤 신중단으로 옮기면, 다른 스님이 다음 집 신도들과 함께 불단 앞으로 갔다. 스님들은 잠시의 쉴 틈도 없이, 한 자리를 마치면 순서를 기다리는 다음 자리에 서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공이었다. 불공을 마친 신도는 가족 단위로 자신의 마지 밥을 내려 공양하고 갔으니, 후원에서는 가마솥에 불을 때어 종일 밥과 반찬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올리는 독불공이 정월 초이틀부터 시작해 대개 보름까지 이어졌다. 

쌍계사 방장 고산 스님은 “학인시절 울산 문수암에 백일기도를 하러 갔다가 정초를 만나서, 독불공을 수백 자리씩 하며 혓바늘이 돋고 입안이 부르터 밥도 먹지 못했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경기권 스님들 사이에서는 3,000 자리씩 들었던 불암산 불암사의 정월 독불공이 지금까지 회자되기도 한다. 

그렇게 보름씩 독불공을 마치고나면 엄청난 양의 밥이 남았다. 양식이 부족한 시절이었던 데다, 한 톨의 곡식도 귀하게 다루는 것이 승가(僧家)의 규범이기에 잔반을 보관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생겨났다. 가장 손쉬운 건 말렸다가 다시 밥을 해먹는 것이다. 방에 돗자리를 깔고 밥을 말려서 딱딱해지면 쌀과 똑같이 독에 보관해두고 밥을 했다.

또 하나는 솔잎 물에 담가 보관하는 방법이다. 커다란 항아리에 밥을 넣고, 많은 양의 솔잎을 찧어 물과 함께 부어두면 자연방부가 되어 일 년이 지나도 상하거나 붇지 않았다. 먹을 때는 밥을 건져서 씻은 다음 주로 죽을 쑤었고 그 이름을 ‘송죽’이라 불렀다. 솔잎을 너무 많이 넣어 송진내가 심할 때는 강된장과 함께 먹었다. 또 누룽지로 눌리거나 조청·식혜를 만들기도 하고, 튀겨서 강정도 하면서 여러 가지로 활용했다.

이런 사정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심하던 청담 스님은 1970년경, 독불공을 올릴 때 마지 대신 생미(生米)를 올리도록 권장했다. 그 무렵부터 생미를 올리는 독불공이 전국에 퍼져나가는 한편으로, 소모적인 독불공 또한 1980년대 후반부터 점차 없어졌다. 그러니 지금의 합동차례·합동천도재가 자리를 잡게 된 건 삼십년에 불과하다.  

내가 가져온 쌀로 오롯이 마지를 지어 부처님께 올리며 발원하고 싶은 마음이 어찌 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전체를 봤을 때 불법에도 맞지 않고 폐해가 깊으니 자연스럽게 바뀌어간 대표적인 불교 세시풍속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참으로 비합리적인 불공이었지만, 하나의 관습이 바뀌기까지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자연스러운 수용이 필요하였다. 그러한 관습 속에서 송죽과 같은 놀라운 지혜식(智慧食)이 생겨나기도 했던 셈이다. 

같은 바람을 지닌 불자들이 함께 모여 따뜻한 온기를 서로 나누며, 같은 곳을 향해 기도하는 깊은 울림이 어느 때보다 그리운 시절이다. 다가오는 설에는 한 목소리로 부처님, 선망조상과 소통하는 합동차례를 봉행하게 되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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