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주이멸의 반복 속에 차이를 만들고 아로새기자”

사랑과 미(美)의 여신인 비너스를 모신 비너스 신전 본당과 주변. 이 앞 잔디밭 자리에는 비너스신의 동상과 제단, 18개의 기둥이 있었으나 지진 등으로 소실됐다.

쾌락의 극단으로 치닫는 로마인

콜로세움 앞에 섰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콜로세움에 적용된 과학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로마인들은 서기 72년에서 80년경, 8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높이 48m에 이르는 석조건축을 지었다. 규모만이 놀라운 것이 아니다. 단순하면서 중후한 도리아 양식, 우아하고 섬세한 이오니아 양식, 아칸서스 잎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코린트 양식 등 층마다 다양한 양식의 기둥을 세우고 아치 아래에 아름다운 조각상을 배치했다. 승강기를 만들어 지하에서 맹수와 검투사들이 경기장으로 솟아나오게 했으며, 넓은 경기장을 빠른 시간 안에 물로 채워 모의해전도 했다.

콜로세움은 삶과 죽음이 가장 극렬하게 교차하던 장소다. 수십만에 이르는 검투사·기독교인·무고한 약자·의인·야생동물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았고, 그때마다 로마 시민과 귀족, 황제들은 짜릿한 쾌감에 전율했다. 사자에게 살이 찢기는 기독교인의 “오! 하느님” 외침, 십여 마리의 맹수를 홀로 죽였지만 결국 지쳐 쓰러져 사자에게 몸을 뜯기는 검투사의 단말마가 들린다. 이어 수만 명의 관중이 지르는 환호소리가 맥놀이를 거듭하며 귀를 울린다.

로마인들은 삶과 죽음을 가장 극단으로 끌고 갔다. 최대의 쾌락을 느끼기 위해 수시로 목욕을 하고 모든 힘과 재력, 재능, 기구와 약물을 동원해 섹스와 만찬을 즐겼다. 제국 곳곳에서 들어오는 산해진미를 금과 은으로 장식한 그릇에 담아 음미하고 고급 와인으로 혀와 뇌를 감미롭게 했다.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조각상을 곳곳에 세워 시각을 즐겁게 했고, 성애장면을 묘사한 벽화로 장식한 밀실에서 날이 새도록 쾌락을 즐겼다. 그로 채워지지 않는 것은 원형경기장에 가서 피와 살이 튀는 장면을 보거나 수간·남색과 같은 변태적, 병적인 행위로 해소했다. 그 정점에 황제들이 있었고, 유덕한 황제도 섹스와 만찬에 탐닉한 것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제국 곳곳에서 수탈한 물질로 풍요를 구가했다. 카이사르는 6,000마리의 칠성장어를 기증한 친구 히르티우스의 도움으로 무려 19만 8,000명의 손님을 대접했다. 2만2,000개에 이르는 9인용 식탁에는 최고급 와인을 앰포라 병에 담아 배달했다. 폼페이 유적을 보면, 귀족들의 밀실에는 성애를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사창가를 가면 방마다 다양한 체위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체위대로 성행위를 했다. 그린란드 대륙빙하 핵심부의 빙하 시료 분석에 따른 결과, 산업혁명 이전에 대기오염이 가장 심했던 시기가 바로 기원 후 1세기다. 그 정도의 대기 오염을 발생시키려면 납은 연간 5만~8만t, 구리는 연간 1만5,000t, 아연은 연간 1만t을 생산해야 한다. 지중해에 난파선 수가 가장 많았던 때도 이 시기다.(레이 로렌스, 〈로마제국 쾌락의 역사〉)

로마를 움직인 원동력은 힘과 쾌락과 제도다. 앞선 무기와 뛰어난 전략과 전술·용맹함·통치술로 아시아·아프리카까지 정복하고, 식민지를 건설해 수많은 자원을 수탈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부렸다. 귀족과 황제들은 힘이 닿는 한 금은·노예·별장을 늘렸고, 금과 은으로 집과 기물을 장식했으며 여성을 탐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도로를 중심으로 제국을 하나로 통치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시민을 적절히 풀어주면서 통치하는 정치제도와 이데올로기, 정교한 법을 실행하고,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신분제도를 확립해 제국을 유지했다.

이들의 쾌락을 경계하는 금욕주의자들의 철학과 윤리, 설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스토아학파는 자연을 우주의 질서가 내재하고 본성과 로고스가 구현된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따라 살 것을 주장했다. 육신은 동물과 같지만 영혼은 우주가 깃든 것이기에 로고스를 따르지 않는 것은 영혼은 죽고 육신만 남은 것과 같다. 쾌락만 좇는 삶은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며 자신을 짐승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이면서도 인격의 도야에 힘써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쾌락은 유익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니다. …… 각자의 지배적 이성에 관여하고, 다른 사람들이 네 자신의 지배적 이성에 관여하도록 하라.”라고 말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콜로세움 전경. 1층은 도리아 양식, 2층은 이오니아 양식, 3층은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다. 그 사이 아치 아래에는 조각상이 있었다.

무덤 카타콤베와 기독교 공인

타락한 로마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준 것은 기독교였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의 역사였다. 서기 64년, 네로 황제는 로마 대화재의 방화자로 기독교도를 지목해 이들을 불태워 자신의 정원을 밝혔다. 이후에도 기독교인들은 유배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고문을 받고 구속되었다. 또 불에 태워지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경기장에서 맹수의 먹이가 되었다. 이들이 박해받은 원인은 여러 가지다. 먼저 황제는 신이라는 황제구세주의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과 메시아로 보는 기독교와 맞섰다. 또 로마인들은 다양한 국가의 제의에 참여해 서로 유대를 강화하며 사회통합을 이루고 국가와 황제에 대한 충성을 확인했는데 기독교인들은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로마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시민대중도 기독교인들에게 반감을 드러냈다. 로마인들은 여러 신을 믿으며 이민족에게도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는데, 기독교는 하느님과 예수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며 다른 신을 우상으로 배척했기 때문이다.(이쾌재, 〈로마 제국 기독교 박해의 제요인〉)

우리는 콜로세움에서 개선문을 거쳐 아피아 가도(Via Appia Antica)를 따라 카타콤베(Catacombe)에 갔다. 카타콤베에서 ‘combe’는 ‘구멍, 골짜기,’ ‘cata’는 ‘드러눕다, 아래’를 뜻한다. 즉, ‘지상 아래의 골짜기나 땅이 파여 있는 곳’을 의미한다.(〈Daum백과〉)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빈번한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아우렐리안 성벽을 쌓았는데, 그 안에 무덤을 조성할 수 없었기에 그 바깥에 형성된 집단무덤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으면서 이곳은 은신처이자 교회, 그리고 살아서는 해방구, 죽어서는 부활의 터전이 되었다. 총 길이가 900km에 이른다고 하니, 인간의 정신과 신앙의 힘이 만든 기적이다. 곳곳에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세상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기에 죽음은 불안과 공포를 준다. 하지만 시한부선고를 받은 이가 삶에 충실하듯, 죽음이 있기에 인간은 자기의 본래성을 되찾고 실존과 의미를 모색한다. 그리고 죽음에 다가갈수록 삶은 의미로 반짝인다. 기독교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저항하며 예수의 말씀을 전파했고, 결국 이 마음과 말씀은 로마의 대중을 움직였으며, 황제도 바꾸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기독교를 포함해 모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밀라노칙령을 내렸다. 밀비안 전투에서 십자가를 하늘에서 보고 꿈에서 예수를 현몽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개종을 선언했다. 그 후 기독교는 로마를 바꾸었고 유럽과 세계를 바꾸었다.

기독교인들이 은신처로 삼았던 카타콤베는 ‘지상 아래의 골짜기나 땅이 파여 있는 곳’을 의미한다. 사진은 카타콤베 입구. 물

기독교인의 부활에 대한 확신과 순교

기독교인들의 순교는 로마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는 예수의 말씀을 전파한 거의 모든 땅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에서도 순교자는 끊이지 않았으며,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교황청으로부터 시성(諡聖)을 받아 성인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은 첫째 요인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다.

예수는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11장 26절)라고 말했다. 이 말은 육신은 죽더라도 내 안의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영혼의 불사체로 거듭나 영원히 산다는 걸 뜻한다. 불멸의 존재로 전환하는 주체는 하느님의 은총이며, 이는 인간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예수의 부활을 믿을 때 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부활을 의심하지만, 〈고린도전서〉 15장 35~49절에 따르면, 이는 한 알의 밀알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밀 열매를 맺는 이치와 같다. 〈고린도전서〉에서 씨와 열매의 은유를 통해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은 죽음을 계기로 변화할 수 있으며,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새로운 영적 몸을 덧입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믿는 부활생명은 땅 위에서 몸 안에 살던 영혼이 영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그 자리에 하느님의 영(Pneuma)이 직접 임재(臨在)함으로써 ‘영적인 몸(Soma Pneumatikon)’으로 질적 변화를 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하는 ‘유한한 생명의 영화(榮化)’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김경재, 〈불교와 기독교의 죽음이해에 대한 명상〉)

초기 기독교가 빠른 속도로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차별 없는 구원의 길’을 열었고 ‘평등한 사랑의 공동체’를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처럼 살려고 하면 노예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고, 공동체 안에서 귀족·평민·노예가 모두 같은 형제였다. 하지만, 국가가 이를 이용하고 권력이 스며들고 성직자들이 부패하면서 초기 기독교 정신은 점점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공동체는 무너졌다. 그 극단이 나치즘이다.(난바라 시게루, 〈국가와 종교 유럽 정신사 연구〉)

로마의 민주정치와 상업·법률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원로원 의사당·개선문·신전·공회당의 흔적이 보인다

윤회의 수레바퀴와 생주이멸

불교에서는 우주 삼라만상이 나고 살아가거나 존재하면서 변하다가 사라짐[生住異滅]을 되풀이한다고 본다. 별에서부터 온 생명과 입자가 이 영겁의 반복을 행한다. 별과 인간, 벌레 모두 시간 차이만 있을 뿐 어디에선가 나와서 존재하다가 시간과 타자에 따라 변하고 마침내 사라진다.

불교는 모든 존재를 오온(五蘊)의 결합체로 본다. 자동차를 구성하는 200만 개의 부속품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놓고서 자동차라고 명명할 사람은 없다. 그 부속품을 녹이면 쇠나 플라스틱으로 돌아가고 이를 원심분리하면 탄소와 철 등으로 돌아간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사대(四大, 地水火風)가 일시적으로 만나 이루어진 결합체에 지나지 않기에, 200조의 세포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기에 죽으면 다시 사대로 흩어진다. 고단한 노동을 하던 살과 뼈는 흙으로, 그 살들에 생명과 활력을 부여해 소통하던 피와 림프는 물로, 늘 따스하게 생명을 섬기던 온기는 불로, 바깥과 상호작용하던 기운은 바람으로 흩어진다. 흙과 물로 돌아간 인간의 살과 뼈와 체액은 다시 탄소·질소·산소 등의 무기물로 돌아갔다가 어디에선가 다시 생명을 구성할 것이다. 죽음은 이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본디 ‘나’라고 하는 존재[육신]는 없다. 정체성이라 하는 것도 인간의 869억 개에 이르는 뇌의 신경세포가 기억하고 저장한 정보에 따라 자기의 본성·품성·성격·의지·지향성·능력·실천력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유전자와 뇌 신경세포 속에는 38억 년의 기억도, 700만 년 동안의 인간 본능도, 1만 2,000여 년 동안의 집단무의식도, 태어나면서부터 형성된 개인의 무의식도, 유아기부터 형성된 의식도, 제8아뢰야식·제7말라식·전6식 등으로 자리할 것이다. 이들이 상황과 맥락, 타자에 따라 그때그때 빚어내는 환상일 뿐이다. 죽음은 이런 모든 의식과 무의식의 종식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구사론(俱舍論)〉에 따르면 인간이 죽은 후 영가(靈駕)는 49일 동안 이승과 저승의 중간영역인 중유계(中有界)를 떠돈다. 어떤 영가는 극락으로, 어떤 영가는 지옥으로, 어떤 영가는 다시 사람이나 개로 태어나서 윤회를 되풀이할 것이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업(業, Karma)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다른 존재와 관계 속에서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짓는 것에 따라 인과의 힘을 갖고 삶은 물론 삶 이후까지 작용하는 것이 바로 업이다. 업은 숙명적인 것이 아니다. 조건을 바꾸면 결과가 바뀌듯, 선업을 쌓으면 그만큼 악업이 사라지고 좋은 결과를 만든다. 그러다가 죽음을 맞아 중유계에 이르렀을 때부터는 업을 바꿀 수 없다. 살아남은 자들은 49재를 지내며 죽은 자의 선업을 열심히 고한다. 그럼에도 악한 업을 많이 지은 자는 지옥으로 떨어진다. 반면 선한 업을 많이 쌓은 자와 어리석음과 분노와 모든 탐욕을 없애고 진여실제(眞如實際)에 이르기 위해 팔정도를 따르며 수행정진해 연기와 공(空)의 이치를 깨달은 자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극락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

다시 돌아와 로마의 한 언덕 위에 섰다. 아래로 포로 로마노(Foro Romano)의 개선문과 원로원 건물 등이 보인다. 찬연하게 빛나던 로마의 예술도, 문화도, 문명도 탄생하고 발전하고 만개했다가 마침내 쇠멸해 기억과 흔적만 남았다. 인간의 죽음 또한 그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1년생 미만의 새끼 연어의 살에서 무려 40%의 해양 탄소와 31%의 해양 질소가 포함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옥기영, 〈생태계 연결성, 숲과 강, 바다는 서로 소통해야 한다〉), “캘리포니아 마켈럼니 강의 경우, 연어 산란지에 인접한 강변의 자연초목과 경작된 포도나무숲은 18~25%의 해양질소를 함유하고 있었다.”(Joseph E. Merz·Peter B. Moyle, “Salmon, Wildlife, and Wine; Marine-derived Nutrients in Human-Dominated Ecosystems of Central California”). 연어가 바다에서 많은 영양분을 먹고 몸을 키워 강을 올라와 번식하고 죽으면, 그 몸은 강과 강변의 수많은 동식물과 새끼 연어에게 영양분이 되어 생태계의 순환을 일으킨다. 이처럼 우주·자연·문명·사회·인간 모두 나고 변하고 번성하고 사라지는 반복을 되풀이한다.

이 영겁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오직 차이만이 의미를 갖는다. 365일 똑같이 되풀이되며 권태를 생산하는 반복에 저항하여, 아내에게 들꽃 한 아름과 시집을 안겨주고 아래 직원의 일을 몰래 처리해 주는 것들이 바로 차이다. 차이는 반복에 진동을 만든다. 이 영겁의 반복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 떨림을 빚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고 가장 아름다운 일이리라. 우리는 과연 어떤 차이와 떨림을 만들 것인가?

개선장군이 말을 타고 왔던 아피아 가도. 저 멀리 개선문이 보인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연민 혹은 자비, 동정심을 뜻하는 용어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재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 한국시가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   한국기호학회 회장    ·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 한국학연구소장  ·  〈문학과 경계〉 주간을 역임했다. 원효학술상  · 유심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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