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혜연 선사 발원 유감
명과 복, 불법지혜는 하나
시대에 맞는 엄한 교판 필요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로 시작하는 시조.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고사리는 왜 캐먹었느냐? 그 고사리는 누구 땅에 난 것이냐? 하면서 주(周) 무왕(武王)의 역성혁명을 개탄하고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먹다 죽었다는 백이와 숙제를 탓한 성삼문의 시조다. 이 시조 때문에 충절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백이숙제의 명망이 훼손되었을 리는 없다. 백이숙제가 다시 나온다면 오히려 자신을 탓한 성삼문을 기꺼운 눈으로 봐 줄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이산혜연(怡山慧然) 선사[이산교연(怡山皎然)]의 발원문 한 구절에 대한 유감을 표명해 볼까 한다.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은 간절한 발원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발원문이다. 모든 생명을 아우르고 허공 끝까지 그 자비실천을 확장하는 그 발원문에 감동하지 않는 불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시대의 상황 때문에 그런 표현이 나왔는지는 몰라도 필자의 눈에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구절이 있다. ‘이 세상의 명과 복은 길이길이 창성하고, 오는 세상 불법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此世福基命位 各願昌隆 來生智種靈苗 同希增秀)’라는 구절이다. 왜 명과 복, 불법지혜를 둘로 나눴을까? 거기다 명과 복은 지금 생에, 불법지혜는 오는 세상에 두었을까?

불법지혜를 내생으로 미루는 발원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자리한다고 생각해 보라. 불법지혜가 늘어가는 것이 바로 행복이 늘어가는 것이어야 할 텐데, 이것이 분리된다고 생각해 보라. 정말 큰 문제가 아닐까? 더더구나 내생으로 미루는 업이 생기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내생에 태어나서는 “이번 생에는 불법지혜 닦기로 했지!”하고 기억하여 열심히 불법지혜 닦는데 매진할까? 아닐 것이다. 미룬 것이 버릇으로 또 업이 되어 다시 불법지혜는 내생으로 미룰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되면 정말 성불의 길과는 점차 멀어질 것이니, 이 한 구절의 폐해를 이산혜연 선사는 어찌 감당하실까?

불법지혜 닦는 것을 내생으로 미루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이 꼭 내생에 동진출가해 닦겠다는 것으로 읽혀지는 대목도 유감스럽다. 그것은 재가자의 삶을 불법에서 소외시키는 문제를 낳는다. 재가자의 삶은 단지 복덕을 비는 것에 그치고, 불법지혜는 출가해서만 닦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된다. 대승이 무엇인가? 모든 중생의 삶을 통해 불법을 추구하는 큰 길이어야 하지 않는가? 사부대중의 공동체가 출가 스님들을 중심으로 하며, 그분들을 공경하고 받드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재가중의 삶은 깨달음의 길과는 상관없고, 이생에 복을 지어 다음 생에 출가 수도한다는 사고가 용납될 수는 없다.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이산혜연 스님의 거룩한 발원에 대해 깊은 찬탄을 보내면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지금 시대에 맞는 엄한 교판(敎判)과 같은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이 선사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분이 후생들에 대해 대견하게 생각하실 것으로 믿기에 이렇게 분수없이 유감을 표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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