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축칼럼(284호)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중생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묘용(妙用)입니다. ‘비운다.’는 말은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 즉 삼독심(三毒心)을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담고 있는 불구(佛具)가 바로 목어(木魚)입니다. 잉어 형상으로 만든 목어는 속이 텅 비어 있어 맑은 소리를 냅니다. 실제 절에서 나무 막대기로 목어를 치면 청아한 소리가 퍼져 사람들의 귀가 솔깃해지곤 합니다. 목어는 물속 중생을 제도하는 불구로,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에 비유해 게으른 수행자를 경책하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조당집〉 권10을 보면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선사는 목어가 울릴 때마다 “아, 나를 때리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비 선사는 왜 목어소리가 자신을 때리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을까요? 그건 ‘비움’ 때문입니다. 선사는 목어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을 비운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본래 중국에서는 이 목어를 공양시간을 알릴 때 사용했다고 합니다. 공양은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위해 수련해야 할 육체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행위입니다. 즉, 비어 있는 배를 채우는 과정입니다. 사비 선사는 목어가 울릴 때마다 아직도 삼독심을 비워내지 못한 자신에게서 아픔을 느꼈던 것입니다. ‘채움’의 시간에 ‘비움’의 메시지를 던진 사비 선사의 이 말은 역설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를 비운다는 것은 ‘하심(下心)’입니다. 세속 용어로 바꿔서 말하면 ‘겸손’입니다. ‘사양지심(辭讓之心)’이며, 상대방에 대한 ‘공경’입니다.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공경할 줄 알면 갈등과 반목이 없어지고 이해와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나의 인격은 높이 올라갑니다. 또한 나를 비운다는 것은 ‘무소유(無所有)’입니다. 나를 비우는데 ‘내’가 있을 리 없고, ‘내’가 없는데 ‘내 것’이 어찌 생길 수 있겠습니까? 나를 비우므로 무소유이고, 무소유이므로 걸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데 누가 나를 해치고 능욕하겠습니까? 그래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다보면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나갑니다. 비우면 비울수록 고매한 인품이 드러나고 자태가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좋은 사람이 몰려들어 외롭지 않게 되고, 선연(善緣)이 자연스레 만들어져 인간관계가 아름답게 형성됩니다. 

자신을 비움으로써 최상의 경지에 오른 대표적 인물로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아나율 존자를 꼽을 수 있습니다. 〈중아함경〉 제18에 따르면 아나율 존자는 해진 옷을 입으면서도 왕이나 부자들이 옷을 상자 가득 넣어두고 아침저녁 마음대로 꺼내 입는 것과 같은 행복을 느꼈다고 합니다. 거친 숲에 있으면서도 침대나 평상에서 비단 이불을 덮은 것처럼 편안한 마음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또한 걸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면서도 부자가 진수성찬을 먹는 것과 같은 행복을 누렸다고 경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비움’은 욕심으로부터의 탈피입니다.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채우고 채워도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욕심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비우면 아나율 존자와 같은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운다는 것’은 ‘완전한 충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비움’은 평안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안내자인 셈입니다. 독자제현 모두 텅 비움으로써 더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목어와 같은 삶을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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