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마음 멈춤! 인생 멈춤!

마음을 멈추면 아집 벗어나
삶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다

“내 정강이의 털 하나 뽑아서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내 털은 안 뽑겠다.”

참으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말이다. 무슨 그런 이기주의자가 있느냐고 다들 한 마디씩 할 만한 소리다. 그런데 이 말은 그렇게 웃어넘길 수 있는 실없는 소리가 아니다. 우선 그 말을 한 사람이 중국 전국시대에 꽤 이름난 사상가인 양주(楊朱)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권위가 있으니까 존중해줘야 한다? 그런 말은 아니다. 이 말이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음미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달림의 목적, 멈춤의 이유

일반적인 사람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위대하거나 대단한 분들 빼면 대부분 자기 몸을 중심으로 자기를 온전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속된 말로 “잘 먹고 잘 살자!”가 일반적인 목표인 것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그 목표와 전혀 상반된 짓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 일 없다고 우기시는 분들을 위해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돈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이고 무엇을 위해 버는 것인가? 결국 자기 잘 살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돈 다 잃었다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잘 살기 위한 수단을 위해 목표였던 생명을 포기한 꼴이 아닌가? 그렇게 극단적인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죽을 둥 살 둥 잘 살기 위해 애쓰다 건강 잃고, 그래서 또 뭐 잃고, 차례로 잃고……. 그렇게 되는 모습들이 주변에 하나둘이 아니다. 내 털은 안 뽑겠다던 양주의 말은 우리가 출발했던 지점, 자신을 가장 소중히 해야 한다는 점을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장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마치 달리듯 살아가면서 멈출 줄을 모르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평생 부지런히 힘써도 이루는 것은 없고, 고달프게 지쳤으면서도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모르니 슬프지 않은가?” 출발점을 잃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리는 삶, 달리다 보면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도 잊기 마련이다. 출발점도 잃고 목표도 잊은 삶, 그러한 삶이야말로 장자의 말대로 참으로 슬프고도 슬픈 삶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삶 대부분은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리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거기서 도토리 키 재기를 하듯이 “내가 좀 더 잘 달린다!”, “아니다! 내가 더 빠르다!”면서 다투고 있다. 이것은 그 자체가 비극이다. 

그렇게 살 것이 아니라면, 그 비극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당연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리는 것을 일단 멈추어야 한다. 일단 멈추지 않으면 출발점을 돌아볼 수도, 애초에 목표로 했던 것을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래서 멈춤이 중요하다. 멈추지 않고, 음미하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삶. 혹 거기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도토리 키재기일 뿐, 그 근본적인 비극성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니 일단 멈추자! 억지로라도 지금 헉헉대고 있는 삶의 달림을 멈추자. 혹시 멈추면 확 뒤쳐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두려움도 멈추자! 그래서 혹 낙오자가 될지라도 이렇게 어디로 달리는지도 모르고 달리는 이 비극에서는 탈출해야 한다. 멈춰보지도 않고, 놓아보지도 않고, 지레 두려움에 떠는 것 자체가 맹목적 달림에 매달리던 삶의 타성이다.
그렇다고 해서 멈춤 그 자체가 목표인 것은 아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역시 가야 할 때는 가고, 멈춰야 할 때는 멈추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대부분 멈춤에서 잘못되기 보다는 가는데서 잘못되기 때문에 멈춤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예 근본을 돌아보지 못하는 삶이 대부분이요, 그렇지 않더라도 “조금만 더” 하면서 나가다가 탈이 나기 때문이다. 거기서 한 번만 멈춰서 살폈으면, 거기서 숨 한 번만 골랐으면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잠깐이라도 멈출 수 있었더라면 잘못된 달림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남는 일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 그렇게 본다면 숨 한 번 쉴 사이의 멈춤에는 큰 의미가 있다.

|   여유는 멈춤에서 나온다

필자가 아는 분 중에 꽤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분이 있다. 그분이 자기가 큰 실패나 과오 없이 삶을 살아온 비결을 말해준 적이 있다. 어떤 터무니없는 일을 당하면 바로 내질러버리듯 반응을 하지 않고 언제나 “거참! 묘한 사람이네.” 또는 “거참! 묘한 일이네.”하는 생각부터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이 한 박자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를 거친 다음에 반응을 하면 감정에 치우치거나 눈앞의 사태에 가려져서 잘못된 반응을 하는 일이 훨씬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비결이라는 말을 듣고 무릎을 쳤던 일이 있다. 정말 숨 한 번 쉴 사이의 멈춤 아닌가? 그 별 것 아닌 잠깐의 멈춤이 삶을 바꾸었다는 말에 참으로 공감이 갔다.

그렇게 잠깐의 멈춤도 그렇게 큰 효과를 낳을 수 있는데, 정말 마음을 차분하게 정돈하고 정신없이 달리던 걸음을 멈춘다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새로워질 수 있을까? 삶이라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내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참으로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음미하고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그렇게 멈추기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될 것이다. 그것이 꼭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냥 무작정 달려가는 것과 비교할 때 충분히 성공의 확률을 높인다는 것은 분명하다. 잘 사는 삶, 성공하는 삶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렇지만 원론적인 모범답안은 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커다란 열정을 가지면서도, 자신의 삶을 남의 삶처럼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기는 참으로 어렵다. 열정이 없으면 추진력이 없기에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열정만 앞서면 앞에 말한 대로 삶에 매몰되어 어디로 달려 나가는지를 잊을 수가 있다. 숲에 들어가면 숲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삶을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는 바로 멈춤에서 나온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멈춤이라는 것이 마치 잘 달리기 위한, 바꾸어 말하면 성공적인 삶을 위한 방법처럼 여겨질 위험이 있다. 만약 잘 달리기 위해서 멈춘다는 식으로 말하면 이 멈춤은 진정한 멈춤이 아니다. 멈춤에 이미 달림이라는 욕구가 앞서 있기에 역설적으로 말하면 멈추는 형태의 달림에 다름 아니다. 참으로 잘 멈춘다는 것은 욕구가 일어나는 근원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욕구가 나오는 그 뿌리를 보게 되면 욕구가 부끄러워하는 듯 슬그머니 들어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달리려는 욕구 그 자체를 들여다 볼 때 진정한 멈춤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멈춰야 참되게 멈추는 것이다. 

|   어설픈 멈춤, 진정한 멈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멈춤을 위해 멈추어서도 안 되는 측면이 있다. 멈춤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나 노장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멈춤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되면 그 삶 자체가 활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불교와 노장의 가르침은 정신없이 달려 나가는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측면이 강하고, 그러하기에 멈춤을 강조하지만, 그 멈춤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상당히 많은 불자들이 멈춤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여, 어설프게 ‘삶이 뜬 구름 같다.’ 느니 하는 식의 초연한 모양새를 취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진정한 초연함이 아니다. 

진정한 초연함은 오히려 큰 용기를 낳는다. 진정한 멈춤은 그런 어설픈 사이비 초연함을 낳지 않는다. 진정하게 멈춰서면 지금까지 전혀 볼 여유가 없었던 삶의 본질을 통찰하게 된다. 자기에게만 빠져있던 생각을 넘어서 나와 남과 사회, 나아가 세상과의 관계를 큰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소홀하게 지나쳤던 것들의 중요한 의미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멈춤은 어설픈 초연함이 아니라 삶의 굳건한 토대를 준다. 욕망의 치달림에서는 얻을 수 없는 불굴의 용기를 준다. 인생의 자잘한 굴곡에 부대끼는 옹졸한 모습이 아니라 큰 목표를 향해 꿋꿋이 나가게 하는, 진정 의젓한 초연함을 준다. 참된 삶을 향한 큰 지향을 낳는다. 그것이 바로 서원(誓願)인 것이다.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른 채 끝없이 달리던 저열한 욕망을 벗어나, 참된 삶을 위한 큰 지향이 바로 서원이다.

어떤 욕망을 위해 멈춤을 수단으로 삼지도 말아야 한다. 또 멈춤 자체를 위한 멈춤을 해서도 안 된다. 두 가지 모두 진정한 멈춤이 아니다. 전자에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멈춤을 욕망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기에 멈춤이 오히려 달림이 된다. 후자는 멈춤과 나아감을 둘로 보는 잘못된 이원화가 있다. 멈춤을 지고한 것으로 보는, 그리고 그것에 매달리는 일종의 달림이 있다. 그렇기에 역시 진정한 멈춤이 아니다. 이 두 가지의 잘못된 멈춤을 지양하여 참된 멈춤을 한다는 것, 쉽고도 어려운 일인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쉽고 어려움을 따질 일이 애초에 아니다. 일단 멈춰봐야 한다. 지금도 우리는 대부분 헐떡이는 달림 속에 있다. 일단 멈춰보면 “아하!”하는 말이 나오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이 진정한 멈춤의 출발이 된다. 그래서 멈춤이 일상의 삶 속에 정착되면 정말로 환희심 가득하며, 불굴의 힘을 지닌 삶이 그 속에서 자란다. “내가 욕망의 달림을 위해서 멈추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멈춤 자체에 빠지고 멈춤 자체를 즐기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들은 멈춤이 삶 속에 녹아든 이후에 올 수 있는 아주 행복한 고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모범 답안은 정해져 있다. 나가는 가운데 멈춤을 놓지 않고, 멈춤을 바탕으로 해서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범적인 틀도 가까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 ‘정혜쌍수(定慧雙修, 선정의 상태[定]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지혜[慧]를 함께 닦아야 한다)’가 바로 올바른 멈춤을 위한 가장 간명한 지침이다. 여기서 ‘정(定)’이 바로 멈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올바른 ‘정’이란 그 자체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성적등지(惺寂等持)! 깨어있음과 고요함을 함께 유지함이 바로 올바른 정혜의 수행이듯이 멈춤과 달려감을 함께 유지함이 답일 수밖에 없다. 가는 가운데도 멈춤의 마음을 지니고 멈춤에도 멈추지 않고 그 가운데 가는 공부, 그것이 바로 진정한 멈춤의 공부가 아닐까 싶다. 그런 궁극적인 공부의 첫걸음은 일단 멈춤! 멈춤을 통해 그 멈춤의 참 맛과 멋을 아는 일을 지금 바로 시작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태용

건국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 •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술연구진흥재단 인문학단장,건국대 문과대 학장,(사)우리는선우 이사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주역과 21 세기>•〈오늘에 풀어보는 동양사상〉(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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