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위대한 스승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나투신 경사스런 날을 맞아 천태종 구인사를 비롯한 전국의 사찰에서는 일제히 부처님오신날을 찬탄하는 법요식을 봉행하는 한편 국민과 함께 부처님오신 참뜻을 기리는 각종 행사를 전개했다. 부처님께서는 온 누리가 빛이요, 뭇 생명이 모두 삶의 주인임을 밝혀주셨다. 특히 중생들이 생사미망(生死迷妄)을 걷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대자유와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본래 구족한 불생(不生)과 불멸(不滅)의 진리를 어떻게 깨우칠 수 있었을까? 부처님오신날은 그래서 우리가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모든 생명과 존재들이 공생(共生)의 업연(業緣)에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진정한 화합과 평화의 길이란 너와 나를 가르는 분별심을 버리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상(殺傷)이 자행되고 평화를 위협하는 일들이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 지난 달 스리랑카에서는 폭탄테러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뉴질랜드에서도 이슬람사원이 총격테러를 받아 50여 명의 무슬림이 무고한 목숨을 잃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 켈리포니아주에서는 대량 살상을 노린 한 남성이 체포됐는데 뉴질랜드 이슬람사원 테러에 대한 보복 목적으로 사제폭탄을 터뜨리려 했다고 밝혀졌다. 또한 국지전이 진행 중인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도 국제사회의 염려와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교전(交戰)을 계속하고 있어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다. 이 같은 테러와 전쟁은 인종과 종교 등 해묵은 갈등이 현대사회에서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너와 나를 가르는 분별심을 거두지 못한 게 원인인 것이다. ㆍ

인류의 고통은 비단 전쟁과 테러에만 있지 않다. UN보고서에 의하면 가난과 질병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은 전체 인류의 10%에 육박한다. 따돌림 받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은 나라마다 산재해 있다. 이들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제도적이거나 구조적인 데에만 의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 이를 해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공동체의식이다. 국제사회 역시 ‘인류는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소통한다면, 화합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에 따라 전쟁과 테러가 확연히 줄어들 것은 당연한 이치다. 가난과 질병,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경제적 억압과 인권구조도 인류가 한 공동체라는 의식이 작동한다면 극복효과가 상승할 것이다.

실제로 대승적 화해의 길은 공동체 의식의 함양에 있다. 이 공동체 의식이야말로 용서와 이해를 추구하는 자양분이다.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남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 내 가족이 보호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남의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아픔을 나누면 가벼워지고 행복을 나누면 두 배가 된다. 이것이 공동체 의식이며,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법이다.

국제사회의 새로운 과제로 등장한 환경오염 문제도 마찬가지다. 자연과 사람은 둘이 아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원리대로 서로가 업을 공유하는 관계다. 자연을 파괴하면 사람에게 폐해가 돌아오는 건 당연하다. 반대로 자연을 자연 그대로 유지하고 보존할 때 그 혜택을 받는 것은 사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자비는 시혜(施惠)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본래 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체대비(同體大悲)란 말은 우주와 한 몸이 되어 함께 나누는 정신을 일컬음이다. 여기엔 연민이 수반된다. 상대에 대한 가련한 마음을 낼 때 생기는 사랑이 자비다.

인류사회가 현재 겪고 있는 모든 문제는 너와 나를 가르는 분별심을 제거할 때 해결이 가능하다. 그것이 곧 동체대비의 정신이며, 부처님은 이를 중생들에게 강조하셨다. 우리 불자들이 연등을 다는 의미는 번뇌와 무지의 어두운 세계를 환히 밝히자는 데 있다. 번뇌와 무지를 벗어나야 동체대비의 행복한 인류사회가 환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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