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시대의 고찰 영암사를 방문한 천태종 도용 종정예하와 일행. 영암사 측 스님이 나와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공림에는 무덤 10만기… 케이블카로 태산 올라

천태종 도용 종정예하를 비롯해 총무원장 문덕 스님, 종의회의장 도원 스님, 감사원장 진덕 스님 등 40여 명의 스님들은 4월 15일부터 20일까지 5박 6일간 중국 산동성 일원으로 떠나 공자 사당과 태산 - 청도로 이어지는 순례를 다녀왔다. 종의회의원 갈웅 스님이 보내온 순례기를 2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중국 황제들이 흠모한 공자
유적과 비문 홍위병이 훼손

4월 15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산동성 제남공항에 오후 3시경 도착했다. 제남시는 산동성을 대표하는 성도로 인구는 약 900만 명이며, 4,0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일행은 두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약 3시간 거리에 있는 제녕시 연주구로 이동해 숙박했다.

공자의 고향 곡부

곡부(曲阜)는 공자(孔子)가 태어난 고장이다. 인구는 2007년에 64만 명을 넘어섰고, 성도인 제남시에서는 약 130㎞ 정도 떨어진 곳이다. ‘곡부’라는 이름은 수나라 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노국(魯國)’이라고 했다. 곡부는 중국 정부가 국가역사문화명성으로 지정했으며,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삼황오제 중의 염제신농(炎帝神農)이 이곳에 도읍을 정했고, 주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이 이곳에 영지를 받았다. 그러나 주공 단 본인은 이곳에 머무르지 않고 아들 백금에게 맡기고 자신은 주나라 수도에 남아 무왕 사후 어린 조카인 성왕을 보좌하여 섭정을 하면서 불안정한 정치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성왕이 성장하여 20세가 되자 미련 없이 정권을 조카에게 이양하고, 자신은 초연하게 제후의 지위로 돌아갔다. 이곳은 이후 873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노나라의 도성이 되었다.

아침 일찍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를 향해 출발했다. 가이드를 따라 다니면서 공자에 관한 일화를 열심히 들었다. 공자의 탄생지와 생활했던 곳에 들어서니 건물과 비문들이 많았다. 이곳에 와서 비로소 과연 공자가 중국에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공자의 나라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황제들이 이곳에 와서 공자의 가르침과 사상을 흠모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알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을 통치이념으로 적용하려 했을 것이다. 특히 청나라 제6대 황제인 건륭제(乾隆帝, 1711~ 1799)는 세 차례나 와서 공자에 대한 예를 갖췄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이 이곳에도 들이닥쳐 큰 망치로 유적과 비문들을 훼손했다는 점이다.

공자는 후세에 ‘문성(文聖)’,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유교(儒敎)〉라고 불리며 중국이나 동아시아에 수천 년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일행은 공자의 직계들이 살던 공부(孔府)를 둘러보았다. 공자 후손들에 대하여 중국 역대 왕조들이 얼마나 우대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황제들도 이곳에 오면 공부에 들러 후손들에게 예를 다하였다. 공자의 후손들이 황제에게 대접한 음식을 ‘공부가연(孔府家宴)’이라고 하는데, 이때 쓰인 술이 ‘공부가주(孔府家酒)’다.

공자를 모신 사당인 공묘(孔廟)를 참배하고, 우리 일행은 전동차에 나눠 타고 공림(孔林)으로 이동했다. 공림은 공자를 비롯한 공자 후손들의 무덤이다. 넓이가 몇 십만 평은 될 것 같았다. 평지에 군데군데 심은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숲속에 수많은 크고 작은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무덤의 수가 무려 10만기에 달한다고 한다.

무덤은 우리의 무덤과는 사뭇 다르다. 무덤에 잔디를 심지도 않고, 한 개의 무덤이 크지도 않다. 그냥 빽빽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다. 겉보기에는 흙더미를 쌓아 놓은 듯하다. 봉분에 잔디를 심지 않았는데도 비가 올 때 흙이 씻겨내려가지 않는지 보존이 잘 되고 있는 게 신기했다.

무덤 군을 보면서 한참 전동차를 타고 안쪽으로 들어가서야 공자의 묘를 만날 수 있었다. 공자보다 먼저 죽은 공자의 아들 ‘리(理)’의 무덤과 나란히 있었는데, 이곳 역시 상석을 세우거나 제단을 설치하지 않은, 소박한 무덤이었다. 다만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이 조금 클 뿐이었다. 무덤 앞에는 제물을 올릴 수 있도록 만든 소박한 나무탁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탁자 위에는 과일 몇 가지와 꽃이 올려져 있었다.

묘 옆에는 작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공자의 진영과 행적에 관한 글귀 몇 개와 소박한 장식물들이 있었다. 공자 사후 제자들은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으며, 자공은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송한 마음에 6년을 하였다고 한다.

중국 3대 城의 하나 ‘대묘(垈廟)’

오전 내내 공자의 발자취를 더듬은 후 점심을 먹고 태산(泰山)이 있는 태안(泰安)으로 향했다. 태안은 태산아래에 형성된 도시로 인구 500만의 큰 도시다. 약 1시간 반이 걸려 도착한 곳은 ‘대묘(垈廟)’. 대묘는 달리 동악묘(東嶽廟), 태악묘(泰嶽廟), 대악묘(垈嶽廟)라고도 부른다. ‘동악묘’란 ‘동쪽에 있는 사당’이란 뜻이다.

중국에서는 오악(五嶽) 가운데 동악을 가장 으뜸으로 여긴다. 대묘는 진시황이 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황제가 태산의 신위를 모시고 봉선(封仙)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전하는 말로는 진시황이 이곳에 와서 불로장생을 기원했고, 한(漢) 무제 때부터 정치적인 성향의 국가적인 의식이 행해졌다고 한다.

대묘는 중국에서 3대 성(城)의 하나로 꼽힌다. 북경에 있는 ‘자금성(紫金城)’, 티베트 라사에 있는 ‘포탈라궁’, 그리고 이곳 ‘대묘’다. 역대 황제 중에 대묘에 와서 제사를 올린 황제는 8명밖에 없었다. 황제로써 공적이 적은 황제는 이곳에 올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 온 황제는 사흘간 머물면서 지극 정성으로 제사를 지낸 다음 태산에 올라 다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대묘의 정확한 건축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당 개원 13년(725)과 송 상부 2년(1009)에 크게 확장했다고 전한다. 이후 지속적으로 보수되다가 명 가정 26년(1547)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진다. 지금의 건축물들은 청나라 때 재건되고, 이후 지은 건물들이다. 건물이 186칸과 비석이 184개, 전나무와 측백나무 등 고목들이 212그루 있다. 1988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일행은 넓은 대묘의 경내를 걸어서 들어갔다. 전체적으로 봐서 대묘의 구조는 단순하다. 넓은 경내에 단순하게 큰 건물이 달랑 하나 있을 뿐이다. 그렇게 걸어서 조금 들어가니 밖에서 볼 때 2층으로 된 큰 전각이 나왔다.

그 안에서 ‘동악태산지신(東嶽泰山之神)’이란 표지를 볼 수 있었는데, 부처님 상을 모시듯 긴 수염을 늘어뜨린 태산 신을 모셔 놓고 있었다. 전각은 밖에서 보는 것과는 천장이 높은 1층으로 트여 웅장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전각을 나와 뒤쪽으로 나아가니 멀리 태산 정상이 보였다. 이 전각은 태산 정상을 향해서 제사를 모시는 사당인 셈이다.

큰 길로 나오니 많은 차량들이 지나고 있었다. 그곳에서 태산 아래에 있는 영암사(靈巖寺)란 사찰의 주지 스님과 태안 지역 종교국장이 나와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 일행은 태산 정상이 바라보이는 곳과 20분 거리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태산(泰山)에 오르다

사흘째날 아침 8시, 일행은 태산을 향해 출발했다. 태산을 오르는 사람은 하루 평균 2만 명 정도라고 한다. 오르는 사람의 95%는 중국인이다. 1,545m의 산을 걸어서 오르는 사람은 벌써 자정 무렵에 출발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산 중턱까지 올라갔고, 그곳에서는 8인승 케이블카로 정상아래까지 갔다. 케이블카를 타는 시간은 약 7분인데 경사도가 꽤 심하였다. 케이블카 아래로 태산을 걸어서 오르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돌계단이 어지러울 정도로 가파르다.

걸어서 오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옛날 황제들도 직접 저 가파른 돌계단을 올랐는데, 힘들어 18번이나 쉬었다고 한다. 명산답게 태산 아래에는 공자를 비롯해 맹자·강태공 등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됐다.

태산 주변은 상상을 초월하는 넓고 비옥한 농토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이 가장 부유한 지역이라고 한다. 먹을 게 풍부해서인지 이곳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 비해 체구가 크다고 한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뒤 740개의 계단을 오르는데, 중간에 도교의 발상지답게 전각이 있었다. 평지가 넓지 않은 반면 사람들이 많아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로 복잡했다. 전각 안에는 옥황상제와 옥황상제의 부인상도 모셔져 있는 게 특이했다. 사찰의 법당과 비슷한 형태로 상을 모셨는데, 중국의 불교사원은 우리나라의 법당에 비해 치장도 많고, 보다 화려한 편이다. 불상 앞도 무엇인가를 잔뜩 쌓아 놓는데, 이곳의 모습도 비슷하다.

영암사(靈巖寺) 참배

태산을 내려와 시내의 한 식당에서 점심공양을 하고 영암사로 향했다. 영암사는 1,600년의 역사를 지닌 동진시대(東晉時代)의 사찰이다. 동진시대 하면 백제의 침류왕(枕流王, ?~385) 원년(384)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를 떠올리게 된다. 중국에서는 태산을 갈 때 반드시 ‘영암사를 들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에서는 유명한 사찰이다. 영암사는 북송시대부터 흥성하기 시작해 당·송 시기에 이르러 중국 4대 명찰로 꼽히게 된다.

사찰로 들어서는데 높은 팔각 탑이 눈에 들어왔다. 영암사는 뒷산이 아주 특이했다.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절을 감싸 안고 있는데, 웅장함과 함께 한없이 포근한 느낌이다. 산 바로 아래에 사찰이 있는데, 처음 들어서서 만나는 전각이 금강역사전이다.

한국에서는 대개 금강역사를 전각 밖에 모시는데, 이곳에서는 사찰의 입구 전각에 모시고 있다. 양쪽으로 두 분이 모셔져 있다. 그 다음은 사천왕전(四天王殿)이고, 이어 만나는 전각이 대웅보전(大雄寶殿)이다. 대웅보전에는 세 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중앙에 ‘비로자나불’, 왼쪽으로 ‘아미타불’, 그리고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보전의 양 옆과 뒤편에는 많은 상이 모셔져 있는데, 40여 분의 미륵상이다. 송나라 때 작품이라고 하는데 천하제일의 명조각품으로 여긴다. 법당 내부에는 기둥과 보조적인 대들보들이 엮어져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법당 내부는 물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 답답하다. 법당 앞에는 과거 유명한 탑이 있었던 듯 한데 무너진 채로 방치를 하고 있었다. 그 탑은 크고 작은 돌로 쌓았던 것 같은데, 현재의 복원기술로는 감당이 안 되어 놔둔 것 같았다.

사찰의 뒤쪽 작은 건물에 중국식 접견실이 있는데, 그곳에서 어제 대묘에서 만난 영암사 주지 홍은 스님이 종정예하를 맞이하여 차담을 나누었다. 기암괴석이 있는 뒷산과 아름다운 천년고찰을 뒤로 한 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강태공 사당이 있는 치박을 향해 출발했다.

태산 영암사 천불전.
태산 대관봉(大觀峰).
공자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
공자의 묘가 있는 지성림(공림) 입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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