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황후가 되어 불사 약속 지켜

삽화=강병호

전남 순천 낙안 땅에 한 처녀가 하염없이 바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처녀의 이름은 성덕(聖德)이었습니다. 그는 곡성 옥과 마을의 어느 가난한 집의 딸인데 무슨 일로 낙안 땅까지 왔으며, 왜 그 바닷가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없었지요.

얼마 후, 수평선 저쪽으로부터 조그만 물체 하나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성덕의 시선은 그 물체에 집중되었지요.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 그 물체는 이상하게 생긴 배 한 척이었습니다. 쏜살같이 달려온 그 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성덕 앞에 와서 닿았습니다.

성덕은 호기심에 끌려 그 배 위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배 안에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성덕은 그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금빛이 찬연한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빈 배에 관음상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집으로 모시기로 한 성덕은 발걸음을 고향 옥과 쪽으로 향했습니다. 관음상을 등에 업고 걸음을 걸으니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녀는 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관세음보살님께 간절히 빌곤 하였으니까요. 그녀는 힘든 줄도 모르고 그의 고향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의 고갯마루까지 단숨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고갯마루에서 관음상은 천근만근의 힘으로 그녀를 짓눌렀습니다.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서 관음상을 앞으로 안고 들어 올려 보았습니다. 역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영리한 성덕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곳이 관세음보살님의 인연이 있는 땅이로구나. 여기가 관세음보살님께서 머무실 인연이 있는 도량이기 때문일 것이다.’

성덕은 그 자리에 관음상을 모셔 두고 혼자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님과의 인연과 그 신통부사의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관세음보살상을 보고자 몰려드는 선남선녀의 발걸음이 줄을 이었습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신심으로 그곳에는 큰 절이 세워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관세음보살상은 어디에서 어떻게, 그 돌배에 실려서 낙안 땅 바닷가까지 오게 되었던 것일까요?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얽혀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삼국시대 백제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금의 충남 예산 땅에 원량(元良)이라고 하는 한 장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원량은 일찍이 아내를 잃고 홀아비 신세가 된 외로운 처지였습니다.

다만, 그에게는 홍장(洪莊)이라고 하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혈육이라고는 하나뿐인 홍장은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앞 못 보는 아버지를 정성껏 모셨습니다.

어느 날, 원량은 길에서 한 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은 홍법사(洪法寺)의 법당짓는 불사를 책임진 성공(性空)이라는 화주승이었습니다. 성공 스님은 원량을 향해 공손히 인사하고는 말했습니다.

“우리 절의 법당불사에 큰 시주님이 되십니다.”

눈이 먼 원량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성공 스님은 다시 말했습니다.

“간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말씀하기를, ‘내일 아침에 길에서 반드시 장님 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 사람이 바로 그대의 큰 시주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시주님을 만났으니 틀림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 절의 법당불사를 이루도록 큰 시주공덕을 지어주십시오.”

원량은 기가 막혔으나 부처님이 꿈에 그렇게 말씀하셨다니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이때 원량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불쑥 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가난하여 넉넉한 양식도 없고 손바닥만한 토지도 없으니 무엇을 어떻게 시주하겠습니까. 다만, 딸아이가 하나 있을 뿐이니 그 아이라도 데려가서 보탬이 되도록 하십시오.”

화주승은 기뻐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원량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그 화주승의 말만 믿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덜컥 시주한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그는 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딸은 아버지의 기막힌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 답답하여 마을 바닷가에 앉아서 서쪽 수평선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고인 그녀의 시야에 두 척의 배가 매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참으로 빠르고 호화로운 큰 배였습니다. 어느새 그 배는 홍장이 앉아 있는 근처의 나룻가에 닿았습니다.

그런데 육지에 닿은 그 배의 대관이 급하게 다가와 홍장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깍듯이 예를 올리고는 말했습니다.

“낭자야말로 정말 우리의 황후님이 틀림없으십니다.”

홍장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는데, 그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저는 진나라[東晋] 사람입니다. 모년 모월에 우리나라 황후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황제께서 무척 슬퍼하셨습니다. 침식을 전폐하시고 괴로워하셨는데 하루는 꿈에 신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황제의 새 황후가 지금 백제에서 태어나 장성해 있으며, 그 용모가 단정하고 숙덕을 갖추었으니 너무 슬퍼 말라.’ 하시고는 우리들로 하여금 황후 되실 낭자의 모습을 자세히 일러주시고는, 이렇게 폐백과 금은진보를 내려주시면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빨리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홍장은 앞을 못 보는 아버지를 혼자 남겨 놓고 자신의 영화만을 위하여 중국으로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자신의 몸은 이미 홍법사의 법당불사를 위해 화주스님에게 보내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량은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이 애비는 걱정할 것 없다. 오늘 홍법사 화주스님한테 너를 맡기기로 하였으니 어차피 너는 내 곁을 떠나야 하지 않느냐. 그리고 화주스님한테는 법당을 지을 시주 돈이 필요한 것이지, 네 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무 염려 말고 빨리 떠나도록 하여라.”

하여 홍장은 중국으로 가서 하루아침에 진나라 황제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 후 아버지 원량이 중국 사신으로부터 받은 보물을 시주하여 홍법사 법당불사를 완성하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딸이 진나라의 황후가 되고, 또한 법당 불사도 원만하게 이루었으니 원량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딸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딸이 보고 싶어 실컷 울고 나서 눈물을 닦았더니 갑자기 눈이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진나라의 황후가 된 홍장은 그 아버지와 고향을 생각하고 많은 불사공덕을 지었습니다. 그는 많은 불상과 탑을 조성해서 바다에 띄워 고국 땅으로 보냈습니다. 그와 더불어 홍장 황후는 자신의 원불(願佛)로 관음상을 조성하여 돌배에 싣고 바다에 띄우면서, 배가 모국 땅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봉안되기를 간절히 기원하였지요.

바로 그 돌배가 동쪽을 향해 떠내려 와서 낙안 땅에 이르렀는데, 처음에 그곳 바닷가를 지키는 관원이 그 이상한 배를 보고 잡으려고 가까이 가니 사공도 없는 배가 저절로 쏜살같이 바다 저쪽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옥과 땅의 성덕이 바로 그 바닷가에 나와 서 있을 때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 배가 성덕의 앞으로 이끌리듯 떠 왔다는 것이며, 그 관음상이 바로 홍장 황후가 보낸 그 원불이라는 것이지요.

훗날 전하는 말로는, 홍장 황후와 성덕 모두 관세음보살님이 화현한 몸이었다고 합니다.

이 땅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관세음보살이 가난한 장님의 딸로 태어나서 그러한 불사를 일으켰다는 것이지요. 참, 불자여러분들께서는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심청전은 바로 이 연기설화에서 나온 것임을 명기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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