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금까지 털어 방생 … 산짐승에 ‘법화경’ 독송

영명 스님은 약 1000년 전 송(宋)나라 스님입니다.

스님은 출가 전, 16세 때에 글을 지어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아주 비상한 글재주가 있었습니다. 원래 선근이 많으신 분으로서 일찍부터 불문에 출가하려고 하였으나, 부모님이 허락을 하지 않아 세속에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며 〈법화경〉을 볼 때마다 글을 한 번에 다섯 줄 씩 읽었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 중에도 살생이라고는 벌레 한 마리 죽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항상 방생하길 좋아하고 고기와 오신채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고을 태수가 되었습니다. 태수는 고을을 다니다가 산짐승이나 물고기를 파는 것을 보면 그것을 꼭 사서 방생을 해주어야만 직성이 풀렸습니다.

“저것들도 우리와 같은 생명인데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

그는 늘 그렇게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화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돈이 없을 때에는 공금으로 사서 방생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몇 해를 하다 보니 마침내는 많은 공금을 축내어 처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국법은 공금을 사사로이 쓴 자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베어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조전왕이 명령을 내리기를, 죄인을 형틀에 매달아 칼로 목을 치려고 할 때 죄인이 안색이 변하거든 목을 베고, 안색이 변하지 않거든 목을 베지 말고 풀어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형리가 그와 같은 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와 죄인을 형틀에 매달고는 칼을 들어 목을 치려해도 안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태연했던 것입니다. 형리는 왕의 분부대로 목을 베지 않고 풀어주었습니다.

그러한 일을 한번 당하고 나서 인생의 무상함을 크게 느낀 그는 가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나는 이번에 꼭 죽을 사람이었는데 부처님 덕에 살아난 것이니, 이제 부처님 제자가 되고자 한다.나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잊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명주(明州) 땅 용책사(龍冊寺) 영명대사[翠巖永明]에게 출가하여 정식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불과 34세였습니다.

그 후 천태산(天台山)의 소국사[天台德韶國師, 891~971]를 찾아가서 그곳에서 정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천태산 아래 지자암에서 90일을 정진을 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정에서 나와 출정을 하고 보니 옷자락 속에 종달새가 집을 지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 세상 사람으로서는 그와 같이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은 살기가 있어서 짐승들이 보면 모두 달아나는 것이거늘, 스님에게는 오직 자비로운 마음뿐으로 살생을 하지 않고 방생을 수없이 많이 하여 몸에 살기가 하나도 없이 따뜻하였기 때문이겠지요.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미증유의 일이라고 불가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에게 모여드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지요. 부처님께서도 6년 수행 시에 머리 위에다 까치가 집을 지었으니까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조사가 되고서도 두 가지 수행할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평생토록 〈법화경〉을 독송하여 많은 중생들께 이익을 주고자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죽을 때까지 계속 선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는 함께 행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둘 중에 어떤 것이든 하나는 버려야만 할 입장이었는데, 자기로서는 판단이 서지를 않아 부처님에게 의뢰하여 판단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자선원에 올라가 심지를 두개 만들어 하나는 ‘일심선정(一心禪定)’이라고 쓰고 다른 하나는 ‘송경만선장엄정토(誦經萬善莊嚴淨土)’라고 써서 말아놓고는 부처님 전에 판단하여 주시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집어서 펴보니, ‘송경만선장엄정토’라고 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다시 섞어 가지고 두 번째로 집어서 펴보았습니다. 역시 처음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도 미심쩍어 그와 같이 하기를 일곱 번을 해보았으나 ‘일심선정’은 단 한 번도 집혀지지 않고, 일곱 번 모두 다 ‘송경만선장엄정토’였습니다.

그제야 스님은 비로소 모든 의심을 풀고 〈법화경〉을 독송하며 많은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면서 정토수행을 하기로 결심하고는 그 즉시로 염불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매일갈이 설법과 만행을 행함에 단 하루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마침내는 산에 사는 조류, 금수, 미물들을 위하여 천주봉에 올라가 〈법화경〉을 외우고 높은 소리로 염불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3년을 하고 난 어느 날, 선정에 들어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여 관세음보살님께서 감로수로 스님의 입을 씻어 주었다는 일화까지 생겨났습니다.

그 후부터는 관음변재(觀音辯才)가 열리어 입을 열매, 청산유수같이 법문이 나와 듣는 사람들이 모두 환희심을 내어 발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스님의 영험력이 뛰어났다는 이야기겠지요.

그리하여 스님에게 법을 배우려 모여든 대중은 무려 2000명도 넘었습니다. 요즘이야 워낙 사람이 많아 그리 많은 대중이 아닐지 몰라도 당시의 상황을 보면 그야말로 구름처럼 많은 대중이 운집하였던 것이지요.

그렇게 스님은 낮에는 대중들을 위해 설법과 설계(說戒) 등을 해주고, 저녁으로는 산에 올라가 짐승들을 위하여 밤새워 염불을 해주었습니다. 산 위에서 염불하는 스님의 음성을 듣는 대중들이야 아름다운 하늘의 음악이 비처럼 울린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훗날 왕이 스님을 기려 정자사(淨慈寺, 永明寺)라고 이름하고, 스님의 호를 ‘지각선사(智覺禪師)’라고 칭하여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영명 선사는 이렇게 이름 지어진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날 새벽, 스님은 대중을 모아 고별인사를 하고는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향을 사르고는 고요히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여기서 끊어진다면 영명 스님다운 향취가 없겠지요. 후세 사가들에 의해 스님을 향한 또 다른 후일담이 존재합니다. 스님께서 열반하신 후 얼마를 지나고 나서 어디서 웬 스님이 한 분 찾아와 그 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영명 스님의 사리탑을 돌고 있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그와 같이 사리탑을 돌고 있어 그것을 본 대중들이 그 연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대답이 이상했습니다.

“나는 무주 땅에 살던 스님인데 전생죄업으로 병을 앓다가 죽어서 저승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염라대왕의 전당 안에 어떤 스님의 초상화를 모셔 놓고, 염왕이 단에 오를 때마다 그 초상화에 향을 사루고 예배를 드리고는 단에 올라가서 죄인들을 심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아직 수명이 남아 있는데 잘못 데려온 것이라고 하며 다시 나가서 수행을 더하라고 하면서 환생의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 벽에 걸린 초상화는 어느 스님이신지 물어 보았지요. 그랬더니 염왕이 말해주기를, ‘이 스님은 송나라 영명사에 계시었던 영명연수 대사이신데 이 스님처럼 모든 덕행이 구족원만한 분은 내 일찍이 보지 못했다. 특히 인간 세상 사람으로서 이 영명연수 선사처럼 많은 뭇 생명을 구제해주신 자비로운 분은 고금을 통해 없었던 일로, 그 덕이 너무나 높고 장하여 숭배하고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은 영명 대사의 사리탑이라도 참배하고자 찾아온 것이며, 탑을 도는 뜻은 죽을 때까지 이 스님을 따르고자 하여 탑을 돌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중들은 조용히 영명스님의 사리탑을 향해 합장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여기에 더 무슨 언어가 필요하겠는지요?

인간 세상 사람들을 사랑함은 물론, 한낱 미물들의 생명까지 자신의 생명처럼 아낀 스님의 공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없이 늘어나는 도시의 고깃집을 보면서 문득 그 오래 전의 영명스님이 그립습니다. 물론 아직 이 나라에는 세계에서도 드물게 영명 스님처럼 수행하시는 스님들이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산문의 사소한 문제들이야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나 항상 있어왔던 일이니까요.

작가/우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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