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사님 추모열기 구인사경내 가득메워

대조사전 앞을 가득 메운 1만 천태 불자들의 대조사님에 대한 추모 열기가 구인사 경내를 가득 메웠다.  신축 중인 광명당 옥상이 대조사전 마당이 되어 수많은 불자들을 수용할 수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장엄하게 행사를 봉행할 수 있었다.

산 중턱에 마련된 천평이 넘는 넓은 광장은 목조 3층 탑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대조사전과 어우러져 웅장한 위용을 드러냈다.  이번 행사를 기점으로 상월원각 대조사님을 기리는 추모 행사는 여법하게 봉행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천태종도들에게 있어서 상월원각 대조사님은 구인사를 창건하시고, 천태종을 중창하신 분이며, 깨달음을 이루어 수많은 중생들을 제도하신 오늘의 선지식인이었다.  이 때문에 천태종을 말할 때 상월원각 대조사님을 빼놓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상월원각 대조사님께서는 일제 식민치하를 피하여 중국으로 운수행각을 하셨고, 해방에 즈음하여 귀국하신 후 지금의 구인사가 들어선 소백산 연화지에 이르러 중생을 제도할 길지임을 아시고 구인사를 창건하고 천태종을 중창하셨다.

이 때의 구인사는 칡 넝쿨을 얽어 만든 초가 삼간으로 조그만 수행공간이었다.  이곳에서 피나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시고 중생제도의 큰 서원을 발하신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러한 심심 산골에서 수행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조사님을 찾아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대조사님을 찾아 가르침을 배운 사람들은 대조사님의 커다란 서원에 감복하여 곁에서 수행하면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초기 구인사의 생활은 매우 열악하였다.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먹듯이 하였다.  그러면서도 할 일은 많아 막일꾼이나 다름 없었다.  이렇게 낮에 일하고 밤이면 수행하는 주경야선을 생활화 하며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누가 이런 일을 강제로 시켰다면 참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월원각 대조사님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일념으로 생활하는 수행자들에게는 이러한 어려움 또한 수행의 일환이었다.

참으로 힘든 세월이었다.  하지만 대조사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소원을 이루고 가피를 입었다.  이는 대조사님이 열반하시고 그 법통을 이은 제2대 종정 대충 대종사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들은 종정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면 반드시 소원을 이루곤 했다.  이러한 기도의 영험함은 구인사를 우리나라 제1의 관음도량으로 자리잡게 했다.

세월이 흘러 돌이켜 볼 때 대조사님의 말씀은 하나도 어긋난 것이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상월원각 대조사님의 가르침은 당시를 회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현실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위대함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변치않는 가르침이라는데 있다.

그래서 상월원각 대조사님께서도 변하는 것은 쓸모가 없으니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가는 곳마다 처처에서 연꽃이 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금강불교 3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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