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라 기원, 서역-중국 거쳐 전해져
조선조 성행, 한국적 관념 속 의례로 정립돼

오방단을 갖춘 불복장의식 설단 모습.

불복장의식은 불상 내부에 여러 물목을 봉안함으로써 예배의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의식이다. 불상을 새로 조성했을 때 주로 행하지만, 개금 등으로 복장을 열었을 때 이전의 물목을 꺼내고 새로운 물목을 넣기도 한다. 불복장은 마지막 단계에 점안(點眼)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완성된다.

불상 내에 물목을 봉안하는 것은 탑에 사리 등을 봉안하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석가모니 입적 후 사리(舍利)를 모신 탑을 세워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초기에는 탑에 사리를 모시다가 점차 경전 등을 법신사리(法身舍利)라 부르며 모셨다. 이처럼 탑 속에 진신·법신 사리를 봉안하듯이, 후대에 등장한 불상에도 여러 상징적 물목을 봉안하여 단순한 조형물을 신앙의 대상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불복장은 밀교의궤에 근거한 의식으로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고 승려들에 의해 비전(秘傳)되어왔으며, 한국의 독자적ㆍ체계적 법식으로 정립되어 1,000년에 가까운 전승역사 속에서 불교적 가치를 구현해온 대표적인 전통 무형유산이라 할 수 있다.

불복장의 기원과 각국 사례

상(像) 안에 사리 등을 봉안한 것은 불상이 유래된 간다라에서 비롯되어 서역을 거쳐 중국에 전해졌다. 간다라 불상 가운데 정계(頂)에 홈을 판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사리나 그 대체물인 보주(寶珠)를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3~4세기경 중국과 중앙아시아에서 조성된 일련의 불상 정계에서 이러한 사리봉안 장치가 발견되었다.

이후 점차 불상의 몸체 내부에 사리를 비롯한 물목을 봉안하기 시작했다. 4~6세기경에 조성된 아프가니스탄 바미얀(Ba_miya_n) 석불에서 사리ㆍ직물ㆍ경전이 발견됐는데, 가장 이른 시기의 불복장 사례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사리가 아닌 여러 공양물이 봉안되었고, 9세기에 이르면 오장(五臟)의 모형을 만들어 납입한 복장물과 기록이 전한다. 비단 등으로 오장육부의 형상을 만들고, 간장ㆍ심장ㆍ비장ㆍ폐장ㆍ신장 등 각 장기 안에 생명력을 상징하는 사리ㆍ옥ㆍ향 등의 물목을 넣은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통일신라 때 불복장에 준하는 사례가 등장하여 고려시대부터 집중적으로 드러나며, 일본에서도 10세기 말에 이미 상내납입의 전통이 형성되어 있었던 점에서, 10세기 무렵이면 동북아 3국에 불복장이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의례행위에 대해 한국에서는 복장(腹藏)이라 일컫는 데 비해 중국에서는 장장(裝藏), 일본에서는 납입(納入)이라 부른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어느 시기부터인가 의식으로서 불복장이 거의 사라지고 점안ㆍ개안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만이 수량이나 형식 등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해왔다. 아울러 티베트에서도 대표적인 밀교의식의 하나로 불복장을 행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는 의식과 납입물목 등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현재의 전승상황을 참조할 때 티베트를 제외하면 체계적인 의식으로 정립되어 전승되는 경우는 한국이 유일하다. 많은 불교국가에서 복장보다는 점안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불복장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간략하게 경전이나 사리대용품, 발원문 등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 불복장의 역사와 전개

불복장과 관련해 현재까지 밝혀진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766년(혜공왕 2)에 조성된 석남사(石南寺) 비로자나불좌상에서 찾을 수 있다. 불상 대좌에서 곱돌로 만든 사리항아리가 발견되었고, 표면에 새겨놓은 기록을 통해 불상을 조성하면서 그 안에 모신 현존 최고(最古)의 복장유물임이 밝혀졌다. 불상의 몸체가 아닌 대좌라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의 불복장과는 차이가 있다.

고려시대의 불복장에 대한 초기기록은 이규보(李奎報)가 편찬한 <동국이상국집>에 당시 복장물목의 종류와 납입정황 등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슬프도다! 저 무지막지한 오랑캐들의 포악함이 전각과 불상에까지 미쳐 파괴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의 성상도 형체는 겨우 보존됐으나 복중(腹中)의 진장(珍藏)은 모조리 드러내어 텅 비고 말았다. …이에 옛 소장물목에 근거하여 2개의 심원경(心圓鏡)과 오향(五香)ㆍ오약(五藥)ㆍ색사(色絲)ㆍ비단주머니 등을 갖춰 본래대로 복구하였다.” 몽고의 침입으로 낙산사 관음보살상이 훼손되고 복장물을 잃게 되자, 13세기 초에 이규보 등이 불상을 보수하고 이전의 복장물목에 따라 다시 납입한 사실을 적은 것이다.

고려시대 불상 내부에서 복장물이 발견된 것은 1274년 이전에 조성된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10여 사례로, 고려 중ㆍ후기에는 불복장 전통과 납입물목이 정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복장의 기본법식은 밀교계통 경전에 근거해 성립된 것으로, 불상을 조성하고 나서 불단의 사방을 장엄했던 요소들과 의식에 쓰던 물목이 점차 불상 내부로 복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불복장이 널리 행해져 대부분의 불상에서 복장물을 넣었던 복장공(腹藏空)이 발견되었고, 수많은 복장유물이 국보와 보물 등으로 지정되었다. 복장이 보편화되면서 1500년대에 이르면 불상을 조성하는 의미와 의식에 필요한 여러 내용을 체계적으로 망라한 의식집 〈조상경(造像經)〉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조상경〉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경전으로 불복장의 설단과 의식, 복장물목의 종류와 의미, 납입순서 등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5종의 목판본과 여러 종의 필사본이 전하며, 그 가운데 널리 사용되는 것은 1824년에 화악지탁 스님이 편찬한 유점사본이다. 이에 따르면 여러 경전에 담긴 내용들을 발췌하고 의례목적에 맞도록 자주적으로 분과ㆍ해석하여 한국적 불복장의식으로 정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복장의식의 의미와 가치

불상을 조성하는 일은 불자들에게 가장 신앙심이 고조되는 일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불복장은 신앙대상인 불상의 내면에 자신의 소망을 담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민중의 종교적 심성을 깊이 반영하는 의식이라 하겠다. 복장물은 반드시 시주로 채워야한다는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신도들은 각자의 여건에 따라 물목에 대한 보시를 하거나 사경에 참여함으로써 공덕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불복장은 보편화되어 있지만 편의에 따라 간소하게 행하면서, 의문(儀文)의 체계적인 법식대로 행하는 경우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의식이 어렵고 번거로운 데 비해 설행빈도가 높지 않아 전통법식을 익히고 실천하려는 이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근래 불교 무형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불복장의식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어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해본다.

첫째, 800여 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가운데 단절 없이 전승되어온 역사성을 들 수 있다. 불복장의식은 고려시대부터 설행된 의례로, 다른 불교의례와 달리 물목과 형식과 의례절차 등에서 별다른 변형 없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오고 있다. 이는 이른 시기부터 의문으로 정립되었고, 세부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사상적ㆍ교리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승려들을 중심으로 비전(秘傳)되어온 특성으로 인해 공동체행사나 전통문화를 탄압 당했던 일제강점기에도 단절 없이 전승의 맥을 이어왔다.

특히 복장물의 다양한 공예품과 경전ㆍ복식, 발원문ㆍ연기문ㆍ시주질 등의 문서에는 전통문화의 다면적 양상이 담겨 있어 현재도 복장물이 출토될 때마다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모으는 타입캡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면서, 무형(의식)을 통해 유형(유물)의 역사를 함께 전승해나가는 독특한 문화라 할 수 있다.

둘째, 의식에 담긴 뛰어난 사상성과 예술성을 들 수 있다. 불복장의식의 절차와 의례요소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면서 놀라울 만큼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다. 오보ㆍ오곡ㆍ오약ㆍ오향 등 다섯 묶음으로 구성된 13개 물목의 정밀한 납입의식은 자연의 일체를 압축하여 함장(咸藏)하는 의미를 지녀 종교적 장엄미와 정형미가 뛰어나다.

또한 불복장에서는 ‘오보병→후령통→황초폭자→불상내부’로 네 차례에 걸쳐 거듭 함장(咸藏)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각 단계 속에서 오륜종자에 의해 싹이 튼 보신(報身)ㆍ화신(化身)이 법신(法身)을 상징하는 후령을 울리면, 불사리로 오색을 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상징성을 지닌다. 각 방위에 따른 오보병은 종자(種子)의 역할을 하여 비로소 중생세계에서 필요한 곡식과 약과 향 등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셋째, 보편성 속에 한국적 특수성이 뚜렷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불복장은 불교국가에서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의식이지만, 우리의 문화토양과 결합되어 의례절차와 의례요소는 물론, 의문의 정립 등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이를테면 중국과 일본에서는 오장을 모형화한 복장물이 성행한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사례가 전혀 없을뿐더러, 〈조상경〉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의 경우 오장육부라는 직접적인 요소로서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후령과 후령통의 상징성으로 이러한 생명력을 드러내었다. 고려시대에는 생명력의 상징을 목[喉]에 납입한 방울[鈴]로 드러냈다면, 조선시대에는 법력으로 함장된 물목의 기운이 후령통의 관[喉穴]을 통해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장치로써 이를 드러내었다. 이러한 특성들은 모두 한국적 관념과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불복장의식의 절차와 요소

불복장의 절차와 의례요소는 매우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다. 큰 틀의 정형성은 고려시대 불복장물에서부터 드러나며, 조선시대 <조상경>의 성립과 함께 체계화되어 유점사 본에서 실제 의식에 참조할 수 있도록 크게 개편되었다.

불복장의식은 이른 시기부터 의문(儀文)으로 정립되어 있는 데다 하나하나의 내용마다 사상적ㆍ교리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어 절차와 형식과 물목 등에 큰 흔들림 없이 전승되어왔다. 불복장은 여건에 따라 다양한 설행양상이 있으나, 체계적인 순서대로 법식을 갖추어 행할 때의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설단과 결계 : 먼저 의식을 치르기 위해 오방단ㆍ송주단ㆍ삼화상단 등을 꾸리는 설단(設壇)을 하게 된다. 삼화상단(三和尙壇)에는 불사를 증명하고 지켜줄 증명법사로 지공(指空)ㆍ나옹(懶翁)ㆍ무학(無學) 스님을 모신다.

오방단(五方壇)은 의식을 진행할 다섯 법사의 자리로, 중방법사를 비롯해 동서남북 사방에 각 법사의 단을 마련한다. 각각 동방의 녹색, 남방의 홍색, 서방의 백색, 북방의 청색, 중방의 황색으로 단을 꾸며 준비된 기물을 진열한다. 의식을 주관하는 중방단에 각종 의식구를 진열해두고, 중방단과 불상을 결계한 오색실을 매어 천장에서부터 아래로 천원(天圓), 팔엽(八葉), 금강저를 결계한다. 송주단(誦呪壇)은 의식문을 염송할 승려들이 자리하는 곳이다.

다음은 도량 안팎에 정화와 금기의 표식으로 금난방ㆍ진언ㆍ번 등으로 결계(結界)를 한다. 잡되고 어지러운 것을 막기 위해 사찰입구에 붉은 글씨로 ‘금난방(禁亂榜)’을 써서 붙이고, 불복장을 행하는 법당 내에 각종 번과 진언을 붙인다.

(2) 정화와 증명 : 의식의 시작되어 오방법사가 각자의 단으로 입장하면, 중방법사가 사방법사들에게 쇄수기로 물을 뿌려 정화의식을 행한다. 불사를 증명하는 삼화상을 청하는 삼화상청, 신중을 청해 도량옹호를 발원하는 신중작법, 불보살을 청하는 증명창불, 중방법사가 몸에 향을 바르고 청정수를 각 단에 뿌리는 결계문(結界文)이 이어진다.

(3) 후령통 조성과 납입 : 후령통(喉鈴桶)은 불상에 납입할 물목을 담는 용기로, 이를 조성하는 과정이 불복장의식의 핵심에 해당한다. 후령통을 조성하기 전에 법당 밖으로 나가서 일주문 앞, 정중(庭中), 법당 앞의 세 곳에 공양물을 차려두고 생반삼분(生飯三分)을 올린다.

오방법사가 각자의 자리에 앉고 나면, 의식문 염송과 함께 먼저 후령통에 들어갈 오보병(五寶甁)을 조성한다. 오보병은 금속ㆍ비단 등으로 만드는 5개의 통으로, 오보병 안에 오곡ㆍ오보ㆍ오약ㆍ오향ㆍ오개자 등 13가지의 물목을 오방의 색깔에 따라 각각 넣게 된다. 따라서 오보병에 들어갈 물목은 병을 포함해 총 70가지이다.

중방법사가 오보병을 각 방위의 법사에게 건네면, 사방법사들은 이를 받아 가운데 놓는다. 오보병에 이어 13가지 물목마다 동-남-서-북-중방의 순서대로 건네고, 이를 받아 각각 병에 넣는 과정이 길게 이어진다. 법사들은 물목을 모두 넣은 다음 비단으로 된 것은 천으로 감싸고 합 형태로 된 것은 뚜껑을 덮어 오보병을 실로 묶는다. 중방법사는 사방법사로부터 오보병을 받아서, 다섯 개를 오색실로 함께 묶은 다음 실을 길게 빼어둔다.

다음은 오보병과 여러 물목을 넣어 후령통을 조성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후령통은 원통이나 방형으로 만들어 뚜껑 위로 긴 후혈(喉穴)을 뚫어놓은 모습이다. 먼저 후령통 바닥에 오륜종자ㆍ진심종자ㆍ보신주ㆍ화신주ㆍ준제구자주를 넣고, 하면원경에 이어 오보병을 넣는다. 오보병 위에 사리를 넣은 사리함, 무공심주를 넣은 무공심주함을 넣고, 맨 위에 양면원경을 놓는다. 오보병을 감싼 오색실을 뚜껑의 후혈 바깥으로 빼낸 다음 뚜껑을 덮는다.

이렇게 조성한 후령통은 다시 황색비단으로 만든 황초폭자(黃幅子)로 싸게 된다. 황초폭자를 펼쳐놓고 발원문과 다라니류를 놓은 다음, 그 위로 땅을 상징하는 열금강지방도를 놓고, 중방경에 이어 후령통을 안치한다. 후령통 위에는 팔엽대홍련도를 놓고, 하늘을 상징하는 천원도를 놓는다. 이때 천원도는 아래를 향하도록 하여 바닥면의 지방도까지 덮어 하늘이 땅을 감싸는 형상을 만들어 종자를 보호한다. 황초폭자를 묶고, 후혈로 나온 오색실을 매듭 밖으로 빼낸 뒤 몸통을 가로세로 교차하여 엮어 마무리한다.

완성된 후령통을 불단에 올려놓고 알가공양(閼伽供養)을 올린 다음, 가장 수승한 대명문자(大明文字)를 마음으로 관하고 나서, 후령통을 불상 내에 안치한다. 불상이 작을 때는 아래쪽으로 납입하며, 클 때는 등 뒤로 납입한다. 이어 각종 경전과 다라니 등을 넣어 불상 내부를 채운 다음, 복장공을 마개로 막고 오륜종자로 마감한다.

불복장 물목의 안립 구성(사진 왼쪽)과 오보병에 납입하는 물목.
삼화상청.
생반삼분.
오방법사 좌정.
물목 전달.
오보병에 들어가는 물목.
오보병을 싸는 모습.
후령통에 오보병을 넣는 모습.
황초폭자에 싸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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