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신, 선재 구도행·깨달음 상징

<수월관음도>, 1310년, 비단에 채색, 419.5 X 254.2cm, 일본 가가미진자(鏡神社).

고려 귀족 사회의 화려함과 아취(雅趣)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불화 중에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아름다움은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중에서도 일본 카라쓰(唐津) 가가미진자(鏡神社)에 전하는 〈수월관음도〉는 고려불화 최고의 정수를 보여준다. 1310년 5월 고려 충선왕의 애첩인 왕숙비가 후원하여 도화원의 화원이 그린 이 불화는 가로폭이 419.5cm, 세로폭이 254.2cm의 거대한 화폭에 그려진 고려 최대의 불화이기도 하다. 이 불화의 화면 아래에는 1391년 승려 양현(良賢)이 구입하여 가가미진자에 봉안하였다는 묵서명이 남겨져 있어 일본에 전래된 경위도 알 수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가가미진자의 〈수월관음도〉는 정교한 필치와 색채감,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문양의 표현 등에서 당시 화원들이 최고 기량을 발휘해 그려낸 고려불화의 우수성을 잘 보여준다. 화사하면서도 아름답고 풍만한 얼굴의 관음보살은 부드럽고 덕성스러운 모습이다. 풀방석이 깔려 있는 암좌에 반가좌의 자세로 걸터앉은 모습에서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얼굴과 가슴 등을 옅은 금색으로 밝게 채색한 관음은 화불이 있는 보관 위로부터 투명한 베일을 걸치고 있는데, 구름문과 화려한 봉황이 금니로 베풀어진 베일은 몸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여 오묘한 느낌을 준다.

보수과정에서 약간 변형이 생기기는 했지만 관음보살은 두광을 비롯하여 커다란 원광을 두르고 있으며, 오른쪽 옆으로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이 놓여 있다. 뒤쪽에는 대나무 두 그루가 있으며, 암좌 아래 연못 같이 보이는 물 속에는 붉고 흰 산호들과 보주들로 화려하다. 암좌의 형태는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로 굴곡이 심하다.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 앉은 관음보살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선재동자가 무릎을 살짝 굽힌 채 두 손을 모아 합장한 경건한 자세로 법을 구하고 있다. 선재동자가 찾아온 시간은 늦은 밤인 듯 화면의 바탕은 어둡게 처리되어 있지만 거친 바위 면은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금빛으로 빛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자는 어린아이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불교적으로는 도를 구함에 있어 지극히 순수하고 정성스러워 순진한 어린아이와 같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구도행을 떠난 선재동자의 여정은 〈화엄경〉 ‘입법계품’에 자세히 나와 있다. 구도의 여정에서 선재동자가 만난 53지식인은 〈화엄경〉의 수행단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마치 53층의 계단을 밝고 올라가듯 〈화엄경〉의 진리를 배워간다는 의미이다. 그 중 관음보살은 27번째로 찾아간 선지식인이다. 그런데 왜 선재동자가 찾아간 관음보살을 수월관음이라 특정하여 부르게 된 것이고 수월관음의 배후에 있는 커다란 원광(圓光)은 수월관음에 이미지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까?

관음보살 신앙이 성행함에 따라 관음의 성격은 다양하게 분화하여 변화관음이 생겨나는데, 그 중 한 분이 수월관음이다. 수월관음의 명호는 대체로 10세기 이전에 생겨났다고 알려져 있으며, 돈황출토 〈수월관음도〉에서 광명산(光明山) 그윽한 연못에 달과 같이 아름답고 빛나며 현신(現身)하는 관음으로 형상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월(水月)’은 ‘수중월(水中月)’의 줄임말로 물 속에 비친 달을 말하는 것이지만 수월관음도에서는 관음의 후면에 커다란 원광을 그려 달을 상징하고 있다.

대승교리에서 ‘수월’이 갖는 의미는 심오하다. 수월은 모든 존재하는 것이 영원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의미하는 공(空)을 비유하는 용어이다. 공사상은 불교의 핵심적인 사상 가운데 하나로, 일체의 모든 법이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화엄경〉 80권의 ‘십지품(十地品)’에서 잘 드러난다. “일체의 법이 요술 같고 꿈같고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물 속에 달 같고 거울 속에 영상 같고 아지랑이 같고 화현(化現) 같으므로 평등하다”. 다시 말해 물 속에 달 같다는 비유적인 의미는 인연 따라 잠시 나타난 것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러한 개념에 비추어본다면 수월관음도에서 선재동자의 앞에 있는 관음자체도 선재의 구도행과 그 인연에 따라 잠시 나타난 존재라는 의미일 것이다. 다만 수월관음이 감응하는 데에는 전제가 뒤따른다. 14세기 찬술된 〈보타락가산전(補陀洛迦山傳)〉에서 ‘거울에 비친 상이나 물에 비친 달은 모두 청정한 마음[淸淨心]에서 비롯된다’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수행을 통해 청정심을 가진 연후에 비로소 중생의 요청에 감응한 관음의 현신을 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현신한 수월관음도의 존재는 선재의 구도행과 깨달음의 정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한다.

한편 화엄에 근거한 ‘수월’의 개념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데 비해 다른 한편으로는 관음의 자비롭고 평등한 중생구제의 비유로서 ‘수월’이라는 명호를 쓰기도 한다. 고려후기 화엄승려였던 체원(體元)은 1328년 찬술한 〈백화도량문약해(白花道場文略解)〉에서 ‘일체의 중생이 고난에 처했을 때 그 음성을 살펴 여러 모습으로 두루 응하심이 마치 달이 여러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적고 있다. 혜영(惠永, 1228~1294)이 쓴 〈백의해(白衣解)〉라는 글에서는 “두려움과 고통에 처한 중생의 소리를 살피는 것이 비유하자면 마치 높은 하늘의 달이 여러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