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재세시 오른쪽 세 번 돌며 예경
민속과 결합…1970년 이후 재조명

지난 8월 12일 봉행된 월정사탑돌이. 스님들과 불자들이 탑 주위를 돌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역사적 질곡을 거치면서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던 월정사탑돌이를 본격적으로 재조명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이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오대산불교는 한암(漢巖) 스님과 제자 탄허(呑虛) 스님으로 이어졌는데, 근대불교의 대표적인 두 선승은 월정사탑돌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월정사에는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민속적 성격의 신행의례로 탑돌이가 전승되고 있다. 신앙의 대상을 도는 것은 불교를 떠난 보편적인 종교행위다. 민간에서도 원을 그리며 도는 다양한 민속이 전하여, 탑돌이는 이른 시기부터 놀이와 결합된 특성을 지녔다.

월정사에 전승되는 탑돌이 또한 석가탄신일ㆍ대보름ㆍ한가위 등의 명절과 지역축제에서 출재가의 구분 없이 공동체와 개인의 발원을 담아 활발하게 설행되고 있어, 한국 토양 위에서 불교와 민속이 결합된 대표적인 의례로 주목받고 있다.

따라서 월정사탑돌이의 바람직한 전승을 위해 ‘평창오대산월정사탑돌이 보존회’가 구성되어 매달 월례탑돌이를 행하고 있으며, 수차례의 학술조사와 연구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요잡, 신성한 대상을 향한 예경의식
신앙의 대상이나 성소(聖所)를 도는 행위는 여러 문화권에서 보편적인 예경의식으로 널리 행해져왔다. 불교가 성립되기 전부터 고대 인도에서는 깨달은 자에 대한 예경으로 그 주위를 도는 요잡(繞) 의식이 있었고, 특히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우요삼잡(右繞三)’을 행하였다. 석가모니가 수행하던 시절에 마가다국의 왕이 그의 발에 예배하고 세 차례 돌았다는 기록이 전하고, 석가모니에 대한 예경의식에서도 처소에 가서 예배한 뒤 그 주변을 세 번 돌고 공덕을 찬미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석가모니 재세 시에도 우요삼잡이 행해졌고, 불멸후에는 그의 유골을 모신 탑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탑돌이의식이 성행한 것이다. 탑을 도는 횟수는 3회를 중심으로 7회·10회·100회 등으로 행해졌는데, 〈무구정경〉에는 8·13·14·15일에 탑을 오른쪽으로 77회 돌면서 다라니를 77회 염송토록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고대인도의 불탑인 스투파를 보면 둘레에 탑을 돌 수 있는 길을 마련해두고, 그 바깥으로 난간을 둘러 탑돌이 구역이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었다. 우리나라에도 신라유적에서 이러한 탑돌이길[塔道]을 볼 수 있는데, 불국사 석가탑 주위를 돌아가며 바닥에 깔아놓은 여덟 개의 연꽃 돌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 탑구(塔區)라 부르며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를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 그 기능은 탑돌이를 유도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대상을 중심으로 도는 예불전통은 탑돌이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불탑보다 뒤늦게 조성되기 시작한 불상을 도는 의식과, 불보살을 모신 법당을 도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요잡의식이 석가모니에서 탑으로, 그리고 탑에서 불상과 법당으로 확대되어간 것이다. 우리의 고대 사찰법당에서 보이는 3칸×3칸 구조는 사방을 12개의 기둥으로 두르고 내부에 4개의 기둥을 둔 회(回)자형인데, 이는 요잡의례를 전제로 건축된 것이기도 하다.

성스러운 대상 앞에서 도는 유형도 있다. 법당에서 의식을 행할 때면 불단 앞에서 원을 그리며 도는 단계가 으레 따르게 된다. 본래 법당의 불단은 벽에 붙이지 않고 불벽(佛壁)을 두어 불상을 돌 수 있었으나, 근대 이후 법당을 중수하면서 많은 불벽이 사라져 불상을 돌며 예불하던 전통이 점차 그 앞을 도는 의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법당 안에서뿐만 아니라 탑이 없는 법당 앞마당을 도는 의식도 일반화되어 있다. 이를테면 사십구재 때 다른 공간에서 관욕을 마치고 법당을 들어서기 전에 법당 앞을 돌거나, 시련(侍輦, 불상이나 죽은 사람의 위패를 연 안에 두고 절 안을 세 번씩 돌아다니는 일)을 하여 성중과 영가를 모시고 법당을 들어서기 전에도 대규모 행렬을 이루어 돌게 된다.

이처럼 성스러운 대상 앞에서 도는 것은 대상을 도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면서 신성한 대상을 중심으로 다양한 ‘돌기의 의식’이 성행해왔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8일에서 15일까지 경주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의 탑을 도는 복회(福會)를 가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출가절에서 열반절에 이르는 뜻깊은 시기에 많은 대중들이 저마다의 소망을 담아 탑을 돌았던 것이다. 아울러 마당에서 행하는 탑돌이의 특성으로 인해 이른 시기부터 축제적ㆍ민속적 성격을 지니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설행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탑전공양상
고려시대인 10세기 말에 세워진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우리나라의 팔각석탑으로는 가장 크고 높을뿐더러, 미적으로도 으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불탑은 평면이 사각인 데 비해 8각이고, 층수 또한 9층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같은 8각9층의 석탑은 고구려계 형식으로, 신라문화의 기반이 쇠퇴한 시기에 백두대간을 타고 고구려 계통의 문화가 오대산을 중심으로 부활하고 있었던 것이라 한다.

월정사 탑은 층수와 평면구성이 음양의 수 개념에서 최고치인 9층과 8각으로 이루어져 충만한 음양의 기운을 담고 있다. 본래 탑의 층수는 3ㆍ5ㆍ7ㆍ9층의 양수이고, 평면구성은 4각을 중심으로 6각ㆍ8각 등 음수를 취하게 마련이다. 하늘을 향한 층수는 양수(陽數)로, 땅을 이루는 면은 음수(陰數)로 구성해 음양의 조화를 기한 것이다.

아울러 탑 앞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보살상이 탑을 향해 자리하고 있다. ‘탑과 그 앞에서 기도하는 이’의 형상은 절대자를 향한 중생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는 간절한 소망을 지닌 이라면 누구든 탑을 향해 기도 올리고 탑돌이를 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 보살상은 단순한 탑전공양상(塔前供養像)이 아니라 〈법화경〉 설화에 근거를 두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월정사사적〉에 “탑 앞에는 약왕보살(藥王菩薩) 석상이 있는데 손에 향로를 들고 탑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때의 약왕보살은 〈법화경〉에 나오는 희견보살(喜見菩薩)의 전신이다.

〈법화경〉에 따르면 과거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 재세 시에 희견보살이 부처님의 법화경 설법을 듣고 그 힘으로 1만2천년 동안 수행해 묘한 경계를 얻게 되었다. 이에 허공에서 꽃과 향을 비와 구름처럼 내리게 하여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자신의 온몸을 태워 바쳤다. 이후 환생하여 일월정명덕 부처님을 다시 만나자 여래는 그에게 장차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내리고 열반에 들었다.

이에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 8만4천의 탑을 세워 화려하게 장엄하고 탑 앞에서 자신의 두 팔을 태워 공양하였다. 불구가 된 그를 보며 사람들이 슬퍼하자, “여래를 위해 두 팔을 공양했다면 나는 영원불멸한 불신(佛身)을 얻고 팔은 원래대로 회복되리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세계가 진동하며 꽃비가 내리고 그의 팔은 원래대로 되었다. 이후 희견보살은 석가모니불 당시 약왕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월정사 탑은 〈법화경〉의 내용을 현실화하여 다른 탑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상륜부로 약왕보살의 공덕을 아름답게 구현한 특성을 지녔다. 지금은 보살상이 두 손을 움켜쥐고 무엇인가를 잡은 듯한 모습만 남아있는데, 법화경의 이야기를 유추하면 손에 향 뭉치나 손잡이가 달린 향로 등을 들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약왕보살 설화는 간절한 소망과 믿음을 지닌다면 어떠한 경계도 뛰어넘어 궁극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해준다. 탑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미소를 띤 채 기도하는 약왕보살의 이미지는 탑을 도는 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다. 아울러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시대의 탑돌이 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들에게 탑을 도는 일은 축제처럼 즐겁고 환희심이 우러나는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법화경〉과 〈삼국유사〉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모습들은 탑을 둘러싼 인간의 심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월정사탑돌이 역사
탑돌이는 승속(僧俗)의 구분 없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의식으로 우리나라의 탑돌이에 대한 기록은 신라시대부터 등장한다. 따라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고려시대에 조성된 점을 고려하면 천 년의 세월 동안 무수한 이들이 간절한 소망을 담아 탑돌이를 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일상적 탑돌이와 함께 석가탄신일과 같은 명절이나 사중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대웅전 앞마당에서 각종 의식이 펼쳐졌고, 탑돌이 또한 축제적 의식으로 설행되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역사적 질곡을 거치면서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던 월정사탑돌이를 본격적으로 재조명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이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오대산불교는 한암(漢巖) 스님과 제자 탄허(呑虛) 스님으로 이어졌는데, 근대불교의 대표적인 두 선승은 월정사탑돌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암 스님은 1925년 봉원사(奉元寺) 조실로 있던 중 고향인 강원도 오대산으로 들어와 27년간 주석했는데, 평소 의식을 중요하게 여겨 범패를 비롯하여 의식 전반에 능한 봉원사 대하(大河) 스님을 오대산으로 청하였다. 따라서 월정사ㆍ상원사는 의식불교를 소홀하게 여기던 근현대기에 대하 스님을 어산(魚山)으로 하여 범패와 작법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69년에 주지로 부임한 만화(萬化) 스님은 대하 스님과 함께, 당시 월정사 조실로 주석하던 탄허 스님을 모시고 예전에 행하던 탑돌이를 고증하여 체계화시켜나갔다.

이에 1977년 평창군 민속경연대회와 태백문화제 등에서 처음 월정사탑돌이를 공개하고, 같은 해 10월에는 1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강원도 대표로 출연하여 관심을 모았다. 당시 민속놀이 종목으로 출연해 30분간 공연하였고, 월정사 주지 만화 스님과 노전 대하 스님이 고증을 맡았다. 송암 스님ㆍ동희 스님ㆍ춘성 스님 등 4인의 승려가 범패와 승무를 담당하고 사물 담당 4인과 큰스님 등 스님 10여 인, 일반신도 40~50인 등이 참여하였다.

이처럼 복원 이후 초기에는 경연대회에 적극 참가하여 월정사탑돌이를 알리는 데 주력하는 한편, 사찰행사나 지역축제에서 탑돌이를 행하며 종교의식이자 강원도의 전통 민속놀이로 자리를 잡아갔다. 1992년에는 제10회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여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꾸준히 전승맥락을 이어왔다.

2000년대부터는 탑돌이가 월정사의 정기행사로 자리잡게 됐다. 매년 석가탄신일과 가을에 연 2회의 탑돌이를 행하면서, 저녁 무렵에 연등으로 사찰을 환히 밝혀놓고 탑돌이를 하는 이들 또한 저마다 등을 든 채 탑을 돌았다. 특히 2004년부터는 월정사를 주축으로 한 오대산 불교문화축전이 출범하면서, 불자들은 물론 단풍놀이로 오대산을 찾는 이들에게 불교문화와 탑돌이를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되고 있다.

2011년에는 지역주민들과 함께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대보름탑돌이를 성대하게 치르는가 하면, 유치가 확정되자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는 탑돌이를 봉행하였다. 2013년에는 월정사탑돌이보존회가 출범되어 그간 연 2회씩 저녁에 행하던 탑돌이를 매달 음력 14일에 보존회 회원과 신도들이 함께하는 탑돌이로 확대하였다.

아울러 단기출가학교를 운영하는 월정사의 특성을 살려 이들 단기출가자도 수행체험의 하나로 탑돌이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월례행사로서 탑돌이 외에 지역행사와 명절 등에 꾸준히 탑돌이를 행하여 지역공동체의 염원을 담은 의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탑돌이의 절차와 내용
월정사탑돌이는 크게 여섯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마당은 ‘준비와 입장’이다. 탑돌이에 필요한 설단과 장엄은 탑 앞에 단을 차려 육법공양물과 참여대중이 정성스레 마련한 공양물을 올려둔다. 탑신에 오방색 천을 연결하여 탑을 장엄하는데, 이는 오방을 활짝 열어 모든 상서로운 신을 도량에 강림케 하고, 탑돌이가 걸림 없이 원만하게 회향될 수 있도록 하는 종교적 장치이다.

아울러 1970년대 이후 복원한 자장ㆍ사명ㆍ한암 스님의 번(幡)과 오여래 번, 보산개(寶傘蓋)를 갖춘다. 참여대중의 복장은 자유롭게 열어놓되, 준비된 공동체축제의 마음가짐을 담아 법복과 한복을 권장하고 있다.

탑돌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대중스님들이 나각ㆍ나발ㆍ범종ㆍ법고를 울리면, 모두 탑 주위로 운집한다. 선두에는 대중스님들이 대열을 인도하고 이어 인로왕보살을 상징하는 보산개가 앞장선다. 그 뒤를 신도들이 따르는데 저마다 경전을 적은 번, 지혜를 상징하는 등, 발원을 적은 축원문 등을 들고 탑 앞에 행렬을 이루어 선다.

둘째마당은 ‘정화와 공양’이다. 먼저 탑과 도량을 정화하는 의식으로, 탑돌이를 진행하는 법주스님이 솔가지에 향탕수를 찍어 오방을 향해 뿌리는 쇄수(灑水)로써 도량과 모든 참여대중을 정화한다. 이어 삼귀의를 하고, 공양단에 육법공양을 올린다. 삼귀의와 육법공양이 진행되는 동안 재가불자들은 모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합장해 탑전공양상을 재현함으로써 지극한 마음으로 탑돌이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드러낸다.

셋째마당은 ‘석가모니불 정근’이다. 본격적인 탑돌이를 시작하면서 초심을 다지고자 석가모니불의 명호를 염송하며 탑을 오른쪽으로 세 차례 돈다. 원을 크게 그리며 탑돌이를 하는 가운데, 안쪽에서는 작은 원을 그리며 바라무를 춘다. 바라춤은 스님만이 아니라 재가불자들도 함께 추면서 탑돌이의 주체로서 적극 참여하고 있다.

넷째마당은 ‘관세음보살 정근’이다. 석가모니불 정근에 이어 관세음보살 정근으로 중생의 서원을 기원하며 다시 탑을 세 차례 돈다. 안쪽에서는 다시 작은 원을 그리며 나비춤인 착복무(着服舞)를 추는데, 착복무에도 스님과 함께 재가불자가 참여한다.

다섯째마당은 탑돌이노래이다. 석가모니불 정근을 통해 초심을 유지하고 관세음보살 정근을 통해 서원을 발원했다면, 불보살을 찬탄하고 귀의하며 참회하는 마음을 탑돌이노래로써 표현하는 가운데 탑을 돈다. 이때 대열에 합류하고 있던 풍물패가 세마치장단을 연주하며 흥을 돋우고, 참여대중은 모두 노래를 부르며 각자 자유롭게 춤을 춘다. 탑돌이를 하며 발흥된 환희로운 마음으로 불법에 대한 찬탄, 발원에 대한 희망으로 자연스러운 몸짓의 자발적인 춤사위를 이어가며, 박수를 치거나 손을 흔들어 환희로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때의 탑돌이는 오른쪽으로 돌고 다시 왼쪽으로 도는 순행과 역행을 반복한다.

여섯째마당은 반야심경과 회향이다. 마지막으로 탑 앞에서 반야심경을 염송하고 합장반배를 올린 뒤 일정한 대열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퇴장한다. 이때 풍물패가 굿거리장단에 맞춰 흥겹게 연주를 시작한다. 한국특유의 풍물소리와 흥겨움은 탑돌이를 통해 다함께 공동체의 소망을 염원하는 대화합의 축제로 마무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월정사탑돌이는 사찰의 대중스님과 신도들ㆍ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공동체의 소망을 함께 기원하는 축제적 대동의례로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이 도량 정화의식을 하고 있다.
설단과 장엄.
육법공양
탑돌이 설행 전 모여 있는 대중들(준비 단계).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탑을 도는 대중들.
바라무.
작복무.
탑돌이 의식을 진행하는 스님들.
반야심경 독송과 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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