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장례법, 한반도 7세기 이후 유행
죽은 자와 산자 해탈ㆍ열반 염원 의식

예경하는 사부대중.〈사진제공=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스님 불 들어갑니다!”

외침과 함께 대중스님들이 거화봉으로 불을 붙인다. 스님의 법체를 둘러싼 나무더미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법구를 둘러싼 불자들은 합장하며 ‘석가모니불’ 염불을 한다. ‘화중생연’ ‘화중생연’ 간절한 바람도 들린다.

불교 상장의례는 해탈 방편
큰 스님이 열반하면 사찰의 다비장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인간에게 죽음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를 극복하고 초월케 하는 신념을 준 것이 종교였다. 통과의례 가운데 상장의례는 해당 문화권의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여준다. 불교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生死不二)’라고 강조한다. 해탈하지 않는 한 중생은 끝없이 윤회한다. 불교 상장의례는 해탈을 위한 방편이다. 죽은 사람에게 번뇌와 업장을 소멸하고 해탈해 윤회고를 벗어나 불생불멸하기를 바라는 의례이자 망자를 위한 법회이다.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의례에 동참한 산 사람도 해탈·열반에 이르기를 염원하는 의식이다. 이 같은 이유로 불교 상장의례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뭇 중생의 관조와 깨달음을 촉구하는 법문으로 이어진다.

화장 보편…다비는 큰스님만
불교 장례는 ‘다비(茶毘)’로 특징된다. 한국 장례문화는 화장 문화로 바뀌었다. 현재 한국에서 화장이 널리 유행하고 있지만 불교의 전통다비는 큰스님 입적(入寂)에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한 행사가 됐다. 사중에 빈소와 다비장을 장엄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스님 가운데는 사찰이 아닌 일반 장례식장에 빈소가 차려지고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승화원(화장장)에서 여느 속인처럼 다비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재가불자도 일반 장례식장에서 유교식 관례에 따라 수습·입관하고 승화원에서 화장한다. 장례기간 중 연고 있는 사찰 스님을 모셔 염불독경을 청하고, 장례 후 망자의 위패를 사찰에 모셔 재(齋)를 모시는 것이 전부다.

경전 곳곳 ‘다비’ 기록
불교가 태동한 인도에서는 시신을 불에 태우는 화장(火葬), 숲에 버리는 임장(林葬), 갠지스 강 물속에 버리는 수장(水葬), 빈 터에 놓아두는 기장(棄葬) 등 여러 장례법이 행해졌다. 화장(火葬)은 불교에서 다비(茶毘)라고 불린다. [이는 팔리어 jhapeti의 음역이다] 다르게는 야순(耶旬), 차유(遮遺)로도 음역됐다. 시신을 불태우는 것을 뜻한다. 의역해 소신(燒身), 분소(焚燒) 등으로 표기됐다. 불교 경전 곳곳에서 죽음과 시신 처리에 관한 장례법의 절차를 확인할 수 있다. 〈입세아비담론(立世阿毘曇論)〉에는 소장(燒葬), 수장(水葬), 매장(埋葬), 기장(棄葬) 등 고대 인도 장례법이 나온다. 〈정반왕반열반경(淨飯王般涅槃經)〉은 붓다의 부친 정반왕을 화장했다고 전한다. 〈사분율행사초(四分律行事)〉에서는 붓다와 전륜성왕이 화장으로 장례를 치뤘음을 기록했다. 불교 장례법 절차를 알 수 있는 경전들이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傳)〉은 당시 인도 불교계에 화장이 유행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여기서는 ‘화장 때 〈무상경(無常經)〉을 독송했다’는 다비의식의 기원을 보여준다. 〈장아함경(長阿含經)〉에는 불멸(佛滅) 후 장례절차를 설한 내용이 있다.

한반도 7세기 이후 화장 유행
춘천 교동 등 신석기시대 동굴 유적에서 불에 탄 사람 유골이 발견됐다. 보령댐 수몰지역인 보령 평라리 유적에서도 화장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불교 유입으로 한반도에서 화장이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자장(慈藏) 스님의 장례를 다비로 치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2세기 이전까지 출가자의 장례는 다비와 풍장(風葬), 가매장(假埋葬) 등이 혼재하던 과도기였다. 12세기에 이르러서야 다비가 정착됐다. 조선시대 배불(排佛)로 억압받던 중에도 출가자는 모두 다비로 장례를 치뤘다.

붓다 장례, 전륜성왕처럼
붓다의 장례법은 Pali본 〈대반열반경〉과 한역 〈유행경(遊行經)〉,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반니원경(般泥洹經)〉,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雜事)〉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대반열반경〉에는 장례 절차가 다른 경전에 비해 자세하게 서술돼 있다.

“아난이여! 전륜성왕의 [장례]를 공양하는 법은 ①새롭고 깨끗한 무명천과 가는 모직물을 사용하여, 그 몸을 두루 싸기를 이와 같이 하여 천겹을 한다. 그런 뒤에 ②금관 속에 넣고, 또 ③은관을 만들어 금관을 담고 또 ④동관을 만들어 은관은 담으며, 또 ⑤철관을 만들어 동관을 담고 ⑥온갖 미묘한 향 기름을 붓고, 또 관 안에 모든 향과 꽃으로 바르기도 하고 뿌리기도 하며 온갖 풍류를 지어서 노래하고 찬송한다. 그런 후에, ⑦덮개를 덮고 큰 보배 수레를 만들되 아주 높고 넓게 하여 수레의 위를 덮는 지붕과 난간에 온갖 미묘한 것을 장엄한다. 관은 그 위에 두며, 또 성안에 화장할 장소를 마련하되 ⑧그 사면을 청소하여 아주 깨끗하게 하고 ⑨좋은 전단향과 모든 유명한 향을 모아 큰 땔감을 만들고, ⑩그 위에 비단과 모직을 깔고 큰 보배 휘장을 쳐서 위를 덮는다. 그런 후에, 관을 마주 들어 화장할 장소에 다다르면, ⑪향을 사르고 꽃을 흩뿌리고 춤과 음악으로 공양하면서, ⑫저 향나무 땔감을 일곱 번 두루 돌고, 그런 후에 ⑬관을 향나무땔감 위에 놓고 향유(향기름)를 사용하여 뿌린다. 그리고 ⑭불을 사용하는 법은 아래로부터 시작한다. 화장이 끝나면 ⑮사리를 거두어 금병에 넣고, 곧 그 곳에 탑을 세운다. 표찰로 장엄하고 비단과 번기와 일산을 달면, 모든 사람들이 항상 매일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어 갖가지로 공양할 것이다.… (중략) … 나의 몸을 다비함도 역시 전륜성왕과 같이 하되, 탑을 세우는 것은 전륜성왕과 다름이 있으니, 표찰을 장엄하고 마땅히 일산 아홉 개를 달아야 할 것이다.”

초기 다비의례는 독송 뿐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는 출가자 장례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비구가 죽거든 응당 공양을 하라 하셨다. 비구들이 어떻게 공양해야할지 모르니, 부처님께서 분소(焚燒)로 공양해야 한다고 하셨다…. 비구를 장사지낼 때에는 〈무상경(無常經)〉을 세 번 외우고 아울러 게송을 읊어서 주원(呪願)하도록 하라.”

인도불교 화장법은 장례 때 〈무상경(無常經)〉을 독송하는 것이 전부였다. 현재 다비의례는 불교의 중국 전래 후 유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선종에서 망승(亡僧)의 장례 때 불법의 진리를 체득케 하는 방편으로 수용 내지 발전해 정토교ㆍ밀교 등과 융합한 결과로 보여지기도 한다.

입적 후 다비까지
불교 다비의식은 ①수계발원(授戒發願) ②염습(殮襲) ③성복(成服) ④영결(永訣) ⑤발인재(發靷齋) ⑥화장(火葬) 순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상용되는 의식은 안진호 스님의 〈석문의범(釋門儀範)〉 가운데 ‘다비편(葬儀篇)’이 중심이다. 다만 구체적인 절차 내용은 상세히 기술하고 있지 않다. 월운 스님의 〈삼화행집도(三化行道集)〉와 〈석문의범(釋門儀範)〉이 보다 자세하다.

스님이 입적하면 먼저 주지에게 알리고, 주지는 3번(혹은 108번) 종을 쳐 대중에게 알린다. 누워서 입적했을 경우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붙여 모로 눕히고, 머리는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앉아서 입적했을 때에는 얼굴을 남쪽으로 향하게 하여 안치한다. 이어 사자반(使者飯)을 차린 다음 휘장을 설치하고 그 앞에 명정과 사진, 위패를 둔다. 중앙의 노란기에는 비로자나불을, 동방의 청색기에는 약사불, 남방의 붉은기에는 보승불, 서방 미타불은 백색, 북방 부동불은 흑색으로된 오방번(五方幡)을 설치해 오방례(五方禮)를 올리고 무상계(無常戒)를 일러준다.

①신원적(新圓寂) / 내빈 차례로 헌향배례 한다.→송주(誦呪), 거불(擧佛) 후 청혼(請魂) →삼귀계(三歸戒)와 오계(五戒)를 줌(재가자만)→독경, 정근, 발원 후 회향

②염습(殮襲) / 삭발(削髮)→목욕(법주가 병풍 앞에서 법요를 진행하고, 바라지는 병풍 안에서 시신을 향탕수로 닦음, 이후 같음)→세수(洗手)→세족(洗足)→착군(着裙, 속옷을 입힘)→착의(着衣, 겉옷을 입힘)→착관(着冠, 관을 씌움)→정좌(正坐, 재가자는 정와(正臥)라 함)→ 시식진반(施食進飯)→입감(入龕, 재가자는 입관(入棺)이라 함)→제사

③성복(成服: 재가자의 경우) /반혼(返魂)→청혼(請魂)→진반(進飯, 진지를 드림)→송경(誦經)

④영결(永訣) / 반혼착어(返魂着語)→위패(位牌)와 교의(交椅)를 들어 법주의 오른편에, 명정은 법주의 왼편에 서게 한 후)→기감(起龕, 운구를 고함)→ 오방배례(五方拜禮, 오방의 부처님께 인사드림)→산화락(山花落)→영결식→독경→발인(發靷)→ 노제(路祭)

⑤화장(火葬) / 다비장에 도착할 때까지 법주가 독경하며 왕생 축원→다비장에서 100보 거리에서 미타단(彌陀壇)과 산신단(山神壇)을 만들고 미타불공과 산신제(미타불공할 동안 화장 준비함)→거화(擧火)→방화(下火), 1ㆍ5ㆍ9월엔 서쪽, 2ㆍ6ㆍ10월엔 북쪽, 3ㆍ7ㆍ11월엔 동쪽, 4ㆍ8ㆍ12월엔 남쪽에서 불을 지른다→창의(唱衣, 입적자가 쓰던 물건을 대중에게 나누어줌)→봉송(奉送)→다 탈 때까지 대승경전 독송→뼈를 일으켜 수습한 다음 부순다(起骨, 拾骨, 碎骨)→산골(散骨, 동남서북과 중앙의 순서로 골호에 담긴 뼈를 흩으며 본디 땅으로 되돌아가라는 還歸本土眞言을 한다)

사찰마다 조금씩 달라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와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13년 현재 전국에서 설행되는 다비를 조사해 〈다비식 현황 조사 보고서〉를 펴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문헌상 다비절차와는 별도로 현재 다비장(茶毘場, 연화대) 장엄에는 지역 사찰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속리산 법주사는 약 50cm 높이로 다리를 세워 법구 받침대를 만든다. 여기에 다시 약 2m 높이로 장작을 둘러쌓는다. 쌓아놓은 장작 가운데 법구를 모실 헛곽을 만들고 숯을 사이에 넣는다. 그 위에 다시 장작을 쌓는다. 전체 덮개는 짚으로 둥근 모양을 내고 천으로 씌우고 연잎을 붙여 연화대를 만든다. 법구는 관 채 넣고 거화한다. 김천 직지사는 해인사와 비슷하게 연화대를 조성한다. 다만 해인사처럼 연화대 외부를 연꽃잎을 붙여 장엄하지 않는다. 직지사는 연화대에 광목만 두른다.

부산 범어사는 돌담을 활용하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 돌담처럼 다비장을 조성 후 숯으로 바닥을 채우고 중간에 법구를 모신다. 그 위는 다시 숯으로 채운다. 멍석이나 새끼로 연화대를 덮는다. 연화대 위에 상여를 올리고 거화한다.예산 수덕사는 마른 장작과 젖은 통나무, 젖은 솔가지, 마른 솔가지를 높이 2m, 너비 2m 규모로 사다리꼴 모양으로 쌓아 연화대를 만든다. 바닥은 깊이 1m, 길이 3m 정도로 일자형 도량을 파서 통나무로 보를 놓는다. 그 위에 장작을 쌓고 법구를 이운한 후에 탈관해 법구를 안치하기도 한다. 법구 안치 후 다비식 때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장작을 더 쌓는다. 그 위는 생솔가지를 덮어 연화대를 완성한다.

백양사는 연화대 주위에 물 항아리를 묻어 두는 특징이 있다. 연화대 바닥을 열십자로 파서 바람 길을 만든다. 중앙에 물을 2/3 가량 채우고 한지로 뚜껑을 덮은 항아리(명당수)를 묻어 그 위를 흙과 돌, 기와로 덮는다. 다시 그 위에 법구를 안치하는 감실을 두고 참나무 장작으로 연꽃모양이 되도록 쌓는다. 동서남북 사방을 열십자로 판 사방에도 물이 든 항아리(사방수)를 놓아둠과 동시에 깃발을 세운다. 다비 때 사리가 습기를 찾아 중앙의 항아리에 남아 생성된 사리를 1차 사리로 진사리라고 한다. 사방에 깃발을 세우고 아래에 물을 담은 항아리를 묻어 수습된 사리를 2차 사리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뼈와 함께 수습되는 사리는 3차 사리이다. 순천 선암사 다비법은 백양사와 대동소이하다. 다비장에 관을 앉힌 후 불길을 모으기 위해 멍석으로 덮는 것이나, 다비에 쓰이는 나무를 주변에서 구해 사용하는 것도 두 사찰이 같다. 선암사의 다비는 〈귀감〉을 저본으로 실행한다. 선암사는 다비 후 사리가 나오면 사발통문을 돌려 전국 사찰에 알렸다. 남양주 봉선사는 다비에 짚을 사용한다. 연화대는 8인치 벽돌로 만든다. 가로·세로 4장씩으로 바닥에 바람 길을 만든다. 벽돌 위는 유공 철판을 얹고 그 위에 새끼타래를 쌓아 올린다. 합판으로 그 위에 관실을 꾸민다. 바깥은 나무로 두른다. 완성된 연화대 겉은 광목천으로 장엄한다.

무형문화재 지정 필요
다비는 한국불교에서 불교 전래 후 지금까지 1600여 년 동안 이어져온 전통이다. 영산재 등 불교무형문화재가 최근 주목 받고 있지만, 다비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 사찰에서도 다비 전통의식은 체계적으로 전수되고 있지 못하다. 전문 교육과정이 없다. 스님들은 어른스님의 장례를 봉행하면서 습득한 경우가 많다. 경험을 통해 다비 의식을 습득한 스님마저도 마땅한 전수자가 나타나지 않아 전통의 왜곡ㆍ단절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불교문화재연구소가 해인총림 해인사 도성 스님, 고불총림 백양사 성오 스님, 태고총림 선암사 지허 스님 등 전통다비의식 전수자를 만났을 때, 스님들은 다비작법을 배우려는 스님이 없어 “안타깝다”며 다비작법 전승이 중단될 것을 우려했다.

한반도 불교 전래와 함께 이어져 온 다비 의례ㆍ의식 보존은 한국 불교계의 당면 과제다. 다비의식 보존은 전국에 산재한 사찰별 전통을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특색을 지키는 방법이어야 한다.

오방번과 만장 입장.〈사진제공=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마른가지로 관을 뒤덮음.〈사진제공=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연화대에 법구 안치.〈사진제공=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연화대 완성.〈사진제공=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거화.〈사진제공=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습골.〈사진제공=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연화대 주변 산골.〈사진제공=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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