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식 노고 풀며 공덕 회향한 뒤풀이
승속ㆍ신분 넘어선 소통ㆍ화합정신 담겨

▲ 천태종이 2009년 구인사 대조사전 앞마당에서 개최한 삼히향놀이 시연 모습. <금강신문 자료사진>

삼회향놀이는 한국 불교의식 가운데 재의식(齋儀式)이 끝난 후에 펼쳐지는 뒷풀이 형태의 놀이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재의식으로는 영산재, 수륙재, 생전예수재 등이 있다.

의미와 기원
이중 영산재는 영취산에 상주하고 계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와 공양을 올리고, 설법을 청하여 들은 그 공덕으로 망자(亡者)의 영혼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의식이다. 조선 전기에 성립되어 오늘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천도재로 자리하고 있다. 또 수륙재는 수륙(水陸)의 모든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천도하고자 하는 의식이다. 본래 중국에서 성립되었으나 오늘날에는 한국에서만 전승되고 있다.

고려시대 갈양사(현 용주사)에서 수륙재를 개최했다고 하는 기록에서 처음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조선전기에 와서 국가와 왕실을 중심으로 매우 성행하였다. 생전예수재는 살아서 49재를 미리 지내면 그 공덕으로 극락왕생한다고 하는 의식이다. 수륙재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오늘날에는 우리나라에서만 전승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재의식은 어떤 불교의식보다도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설행되어진다는 점에서 한국의 불교의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국가불교가 왕성하게 개최되었던 신라나 고려시대보다도 조선시대에 와서 그 기록을 많이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영산재, 수륙재, 생전예수재 등의 재의식은 주로 사찰의 야외마당에서 개최되고 괘불을 이운하여 내어건다고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괘불의 주인공이 주로 석가모니부처님이 되는 것은 영산재와 수륙재가 법화사상과 그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화경〉의 설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도량으로 모셔온다는 의미에서 괘불을 설치하게 된다. 생전예수재는 지장신앙과 시왕신앙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생전예수재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영산재와 수륙재와 함께 개최되었던 경향이 역사적으로 살펴지고 있어, 영산재와 수륙재에 사용되었던 괘불이 그대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삼회향놀이는 이와 같은 재의식이 마무리 된 이후에 펼쳐지므로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재를 위해 설치되었던 괘불과 도량장엄 등이 그대로 삼회향놀이의 공간 요소로 활용될 뿐만 아니라 의식을 설행하기 위해 불교음악인 범패와 불교무용인 작법이 삼회향놀이에도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회향’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의식집으로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天地冥陽水陸齋儀梵音刪補集)〉이 있다. 이 책은 지환(智還)이 편집하여 1722년에 목판본으로 찍어낸 것인데, 수륙재에서 널리 사용되는 것만을 추려 모은 의식집이다. 수륙재의 절차 가운데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봉송의식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삼회향을 기록하고 있다.

- 삼회향(三回向)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
원만장보살마하살(圓滿藏菩薩摩訶薩)
회향장보살마하살(回向藏菩薩摩訶薩)

봉송의식의 말미에 위와 같이 삼회향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삼회향놀이가 재의식이 끝남과 동시에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환희장마니보적불은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사중죄(四重罪)를 멸할 수 있다고 하는 부처님이다. 삼회향놀이는 환희장마니보적불의 가피와 원만장보살마하살과 회향장보살마하살의 원력 아래 신명나게 펼쳐지는 놀이인 것이다.

삼회향놀이는 재의식에 참여했던 모든 대중들이 함께하는 놀이마당으로, 축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 제천의식이 거행된 이후에 펼쳐졌던 축제에서 그 연원을 구할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 들어와 연등회와 같은 불교행사에서 백희잡기를 연행했던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재의식이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서 성행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삼회향놀이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개최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삼회향놀이가 처음으로 학술조사된 것은 1976년 최정여 교수에 의해 작성된 논문 ‘사원잡희(寺院雜戱) 삼회향(三回向, 속칭 땅설법)’이 발표되면서이다. 이 글에서 최정여 교수는 1963년 8월초에 서울 서대문구 인왕사(仁旺寺) 주지였던 정순정(鄭淳政) 화상에게서 삼회향놀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으며, 그 스님은 개성 완복사(浣福寺)에서 있을 때 장모(張某) 화상으로부터 전수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삼회향놀이는 1960년대 전국의 불교의식을 조사하였던 홍윤식 교수에 의해서도 인지되고 있었다. 홍윤식 교수는 전국의 범패와 작법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여러 어장 스님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중 조계종 통합종단 소속의 어장이었던 권수근 스님으로부터 삼회향놀이의 존재를 듣게 되었다. 이때 들은 내용을 2002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간행된 학술조사보고서 〈불교민속놀이〉에 수록함으로써 삼회향놀이에 대한 불교계의 관심은 확대되어 갔다. 이들 조사를 통해 삼회향놀이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과 적어도 삼회향놀이를 설행하였던 승려들이 생존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구성과 절차
삼회향놀이는 재의식이 끝난 다음에 펼쳐지는 뒷풀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땅설법이라고도 불리는 것과 같이 삼회향놀이는 시작과 끝에 법회의 성격을 담아내고 있다. 삼회향놀이는 법주와 바라지에 의해 진행되는 회향 설법, 의식승들의 범패와 작법, 재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나와 펼치는 뒤풀이(또는 잡희) 그리고 탑돌이와 회향문을 낭독하는 마무리(파장)의 네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회향설법은 삼회향놀이의 시작으로 재의식을 담당하였던 법주스님에 의해 법문의 형식을 빌어 진행된다. 법문의 형식은 자유롭게 진행되는데, 재에 참가하였던 사부대중의 공로를 치하하고 때로는 그들의 근황을 소개하며, 기뻐할 일은 축하해 주고 슬퍼할 일은 위로해 주는 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회향설법의 핵심은 의식을 설행하는 기간에 노고가 많았던 소임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앞으로 펼쳐질 놀이마당에서 흥겹게 놀 수 있도록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법주의 법문은 때로는 육자배기로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흥겨운 가락으로 진행된다. 이 때 법주의 옆에는 바라지가 함께하여 법주의 말에 장단을 맞추며 재담을 한다. 회향설법은 법문의 형식을 빌리고는 있으나 법주와 바라지가 조화를 이루며 재담과 축원을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회향설법에 이어 의식에 참여하였던 의식승들이 등장하여 공연을 펼치는데, 범패와 화청 그리고 바라춤과 나비춤 등을 보여준다. 재에서 보여주었던 범패와 작법무가 질서 정연하고 엄숙한 것이었다면, 이 때 보여주는 의식승들의 공연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자신들의 끼와 재능을 한껏 보여주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회향설법이 삼회향놀이의 시작을 알리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것이라면 의식승들의 공연은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켜 좌중들의 흥을 북돋우는 과정이다. 이 때 재의식을 의뢰하였던 신도들은 음식을 준비하여 사부대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먹으며 공연을 관람한다. 이는 재의식을 준비해준 대중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의식승들의 공연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뒷풀이 마당이 진행된다. 뒷풀이는 전문 연희자들에 의한 공연과 사부대중이 나와 한바탕 놀게 되는 놀이마당으로 구성된다. 전문 연희자들에 의한 공연은 사찰의 의지에 따라 그 규모와 초청 인원이 달라진다. 줄타기 놀이가 진행되기도 하고, 사물놀이가 펼쳐지기도 하는데 정해진 것은 없다.

그러나 전문 연희자들을 불러 공연을 하는 데에는 사부대중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다. 흥을 최고조에 오르게 함으로써 사부대중들이 스스로 나와 자신들의 장기를 보여주며, 즐겁게 놀 수 있도록 배려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재를 준비하고 의식에 참여하였던 사부대중들은 자신들의 소임을 보여주고 그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과시하듯 각종 지물을 들고 나와 춤추고 노래하는데, 음식을 준비하였던 사람들은 칼과 도마를 들고 나오고, 기와 번을 들었던 자들은 이를 들고 나와 덩실 덩실 춤을 춘다.

이때 대중들은 가면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스님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신명나게 놀기 위함이다. 뒷풀이 마당의 흥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마당으로 나와 흥겨운 춤을 춘다. 의식에 사용되었던 모든 지물이 등장하고 삼현육각과 사물놀이 등 모든 악기들이 소리를 내어 천지는 진동하고 형형색색의 지물들이 들썩들썩하게 되어 사부대중들의 화합과 소통을 이루는 시간을 갖게 된다.

뒷풀이 마당이 끝나 가면 법주와 바라지가 등장하여 마무리를 한다. 마당을 가득 채우며 신명나게 놀았던 사부대중들은 의식승의 인도로 탑돌이를 진행한다. 이는 격을 헐어버리고 즐겁게 놀았던 분위기를 전환하여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과정이다. 사부대중들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재와 삼회향놀이가 원만하게 진행된 것에 대하여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탑돌이가 행렬을 멈추게 되면 법주는 사부대중을 향해 즐겁게 놀았는지를 물어보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의 회향법문을 하게 되고, 모두 ‘성불하십시요’라는 말과 함께 삼회향놀이를 마치게 된다.     

도 무형문화재 지정과정
삼회향놀이는 1960년대까지는 존재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정여 교수가 발표한 논문이 이를 증명하고 있고, 홍윤식 교수의 불교의식 조사과정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어느 시기엔가 삼회향놀이는 자취를 감추었고, 몇몇 사람들의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홍윤식 교수는 영산재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범패ㆍ작법ㆍ장엄의 기능만이 포함된 것에 대하여 크게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중에 1997년 12월에 삼회향놀이를 복원하자는 발원을 세웠다. 이 때 필자도 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그 장소가 여주 신륵사 인근이었고, 홍윤식 교수는 1960년대 불교의식의 어장이었던 권수근 스님이 신륵사에 주석하였으며, 이후 말년을 구인사에 거처하면서 천태종의 승려들에게 의식을 전수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삼회향놀이를 복원하고자 하는 원력을 세웠던 홍윤식 교수는 2000년 국립문화재연구소로부터 불교민속놀이 학술 용역을 의뢰받게 되면서 삼회향놀이에 대한 학술조사를 진행하였고, 권수근 스님의 불교 의식에 관한 제반 역량이 천태종의 춘광 스님(현 총무원장)에게 전수되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홍윤식 교수는 천태종에 삼회향놀이를 복원하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고, 천태종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2004년 2월 홍윤식 교수를 책임연구원으로 하는 (사)진단전통예술보존협회와 천태종 간에 학술용역이 체결되었다. 학술 용역의 결과로 2004년 6월에 〈삼회향놀이 학술조사 중간보고서〉가 간행되었다. 2005년 6월에는 불교축제 삼회향놀이 복원의 방향성 정립을 위한 한·중·일 국제학술회의가 서울 관문사에서 개최되었다.

그해 9월에는 수륙영산대재 및 생전예수재가 구인사 설법보전에서 개최되었으며, 이를 현장 조사하여 삼회향놀이 학술조사 2차보고서인 〈천태종 영산대재와 삼회향놀이〉를 간행하였다. 이로써 삼회향놀이 복원을 위한 학술적 기반은 마련되었고 천태종 스님들에 의해 삼회향놀이 복원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9년 9월 15일에는 구인사 대조사전 앞에서 3천여 명의 대중들이 모인 가운데 삼회향놀이가 처음으로 재현될 수 있었다. 천태종은 이후에도 2010년 9월 6일 설법보전에서 2차 시연회를 개최하였고, 2011년 8월 17일에도 설법보전에서 3차 시연회를 설행하였다. 3차에 걸친 삼회향놀이의 시연을 조사한 충청북도문화재위원회는 그 가치를 인정하여 2012년 5월 11일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함으로써 삼회향놀이 복원을 위한 천태종의 기나긴 노력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한국불교사에 있어 재의식이 활발하게 개최되었던 시기는 국가불교를 지향했던 신라나 고려시대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억불숭유정책이 시행되던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행하였다. 영산재는 왕실의 상례와 제례로써 채택되었고, 수륙재는 천도재 뿐만 아니라 사회 통합과 소통을 위한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영산재와 수륙재는 규모가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 불교의식이었다. 영산재와 수륙재가 국행으로 설행되던 조선 전기에서도 설행 비용은 큰 걱정거리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재의식은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있는 국가와 왕실 또는 사대부가들에 의해 개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에 참가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한 일이었고, 재의식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인 콘텐츠는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삼회향놀이는 재의식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민간에서 행해지는 연희들이 가미됨으로써 볼거리를 풍성하게 하고 있다. 삼회향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승속을 초월하고 신분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이 참가함으로써 축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억불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 불교행사인 삼회향놀이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어 그 자체로도 문화적 의미가 상당히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삼회향놀이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문화유산으로의 가치는 공동체문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과 여기에 참여하는 대중들이 승속과 신분을 뛰어넘어 어우러지는 소통과 화합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회향놀이는 다른 전통문화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하여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게 되었고, 1960년대 이후 산업화의 물결 속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천태종의 노력으로 삼회향놀이는 복원되었고, 종단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전승되고 있다.

삼회향놀이가 지니고 있는 무형문화유산으로의 가치는 외형적으로는 놀이에 반영되어 있는 각종 연희적인 요소가 언급될 수 있겠으나, 내재적으로는 공동체 문화를 지향하고 소통과 화합을 추구 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삼회향놀이가 천태종에 의해 복원되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신적 가치라고 하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 삼회향놀이의 마지막을 장식한 난장마당. <금강신문 자료사진>
▲ 북춤. <금강신문 자료사진>
▲ 인간 탑 쌓기. <금강신문 자료사진>
▲ 줄 타기. <금강신문 자료사진>
▲ 백봉 기생놀이. <금강신문 자료사진>
▲ 농악놀이. <금강신문 자료사진>
▲ 사물놀이. <금강신문 자료사진>
▲ 난장마당에 앞서 스님들과 신도들이 경내를 돌고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