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아주 더디게 온다. 겨울을 밀어 내기에 힘이 부쳤던 모양이다. 그래도 봄은 온다. 한설(寒雪)에 휩싸여 갈색으로 을씨년스럽던 먼 산자락에도 어느덧 연둣빛이 감돈다. 봄이 저만치서 산색청정신(山色淸淨身) 했으니, 이제 부처님오신날 연등절이 가깝다.

 샤카의 성자(聖者) 석가모니가 오신 이맘때면, 지구 북반구 깊숙한 데까지도 봄이 찾아든다. 이렇듯 봄이 와서 꽃이 피어난 날, 인도 동북쪽 작은 왕국의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모니는 태어나셨다. 《서응경(瑞應經)》은 이날을 ‘4월 8일 밤, 밝은 별이 나올 때'라고 적었다. 《서응경》을 비롯한 몇몇 경전이 기록한 석가모니의 첫 말씀은 “하늘 위와 아래서 나 홀로 우뚝하다.(天上天下唯我獨尊)”였 다고 한다.

 우리가 연등절을 기리는 참뜻 속에는 이 말씀이 내포 되었다. 이는 인간이 속박(束縛)이라는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자유선언(自由宣言)이다. 오늘날 세계가 ‘인간으로서의 붓다'에 초점을 맞추어 불교를 바라보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한때는 여느 사람들처럼 사바의 속세에 머물렀던 붓다는 인간적 실존을 빌려 번뇌의 고리를 끊어 버리고, 올바른 깨달음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았던가.

 석가모니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첫 말씀에는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 보다 더 큰 뜻이 보인다. 인간을 우주의 한 존재로 여긴 것이 분명하다. 은하계에 모인 무수한 별무리 성운(星雲)은 어떤 중심체를 따라서 도는 엄청난 숫자의 행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때 지구는 태양을 맴돌아 떠다니는 천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무한한 공간 우주의 한 존재를 사람으로 본 석가모니의 인간관은 실로 대자대비(大慈大悲)할 뿐이다.

 오늘도 지구가 태양을 맴돌기는 마찬가지여서, 겨울이 간 다음 봄볕이 따사로운 연등절을 맞게 되었다. 봄소식이 더디다 싶더니, 곡우(穀雨)도 벌써 지나갔다. 곡식이 자라는데 이로운 비가 내린다는 절기가 곡우다. 이미 대지에는 새싹의 곡식이 파릇파릇 돋아나 막 자랄 참이다. 이왕 내친 김에 온 들녘에 옹골진 풍년이나 들면 좋겠다.

 그런데 올해 연등절 초파일은 마침 여염집 사람들이 새싹처럼 보살피는 동자들의 잔치 어린이날과 겹쳤다고 한다. 어린이만을 위해 특별한 날을 제정한 나라는 우리네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인격체(人格?)로 존중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그분이니 저분이니 할 때 ‘분'과 같은 높임말 ‘이'를 붙여 어린이라고 했다. 1923년 어린아이들에 관심을 두었던 선각자(先覺者)의 모임 색동회가 ‘어린이날'을 만들었으니,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후 1957년에 선포한 ‘어린이 헌장'에서는 아이들을 어떻게 올바로 키울 것인가에 대한 몇 가지 길을 제시했다. 사회와 가정의 애정 어린 교육 등을 강조한 이 헌장은 공부나 일이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자신의 창의성(創意性)이 무시된 채 공부와 성적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어른들의 출세지향적(出世指向的)욕구에 어거지로 말려든 어린이들의 대리희생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연등절과 함께하는 올해 어린이날만큼은 모든 절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일주문을 활짝 열었으면 한다. 어린 동자들이 떼로 몰려와 붓다의 품에 안기는 새로운 풍속도 같은 정경을 보고 싶다. 붓다께서는 일찍부터 동자들을 어여쁘게 여겼다. 동자들이 흙을 모아 불탑을 만드는 놀이를 보고, 불성을 찬탄해 마지않았다는 이른바 ‘동자희작불사(童子戱作佛事)'이야기가 《법화경(法華經)》방편품(方便品)에 나온다. 이때 붓다는 그 특유의 크나큰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황규호 방송작가 <금강불교 3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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