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신마저 감화시킨 ‘처용’
헌강왕과 인연 맺어 ‘관용’ 전한 곳

서라벌 달 밝은 밤에 밤 깊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 보매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 처용설화의 현장인 개운포와 처용암. 신라 헌강왕이 유행차 방문했다는 이곳이 지금은 산업화의 대명사인 공장들에 둘러싸여 있다.

‘처용가’. 제목과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중ㆍ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 이상은 들어봤다. 워낙 유명한 노래인 탓에 지난 80여 년 동안 관련 연구논문만 수백 편에 달한다. 다양한 시각에서 들여다보니 화랑일 것이란 추측에서부터 세력이 큰 지방 호족의 아들, 무당, 더 나아가 페르시아인 등 처용의 신분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심지어 처용이 설화 속의 가상인물이라는 의견까지 있다.

처용이 춤을 추면서 불렀다는 이 노래의 맨 마지막 구절 역시 불타는 질투심을 억누르는 체념의 표현이라고 해석하는 이부터 자신과 자신을 흉내 낸 역신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아내의 순진함을 이해하는 무한한 관용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이렇게 처용은 실존여부에서부터 신분 등 모든 면에서 의문에 휩싸인 신비스런 존재다. 한동안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처용이 얼마 전 불현듯 생각났다. 부산의 한 대중목욕탕에서 한국인으로 귀화한 한 여성이 피부색 등을 이유로 출입을 거절당한 사건이 있고 나서다. 표면적인 이유에서든 문화적 관점에서든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한 세태를 보면서 그의 관용이 떠오른 것인지 모른다. 처용 이야기는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處容郞 望海寺)’조에 전한다.

 

▲ 망해사 법당 뒷면에 그려진 벽화. 신라 헌강왕과 처용의 조우 장면이다.

신라 49대 헌강왕이 울주 바닷가로 행차했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에 갇혀 길을 잃었다. 천문을 살피던 일관이 “대낮이 졸지에 캄캄한 어둠으로 바뀐 것은 동해의 용이 조화를 부린 것”이라며 “뭔가 좋은 일을 베풀면 풀어질 것”이라고 아뢴다. 왕이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지으라고 명하자 구름과 안개가 씻은 듯이 걷혔다. 기분이 좋아진 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면서 왕의 덕을 칭송하고, 한 아들을 딸려 보내 왕을 보좌하게 했다. 그가 처용이다.

왕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하는 처용의 마음을 붙잡아두기 위해 절세미녀를 뽑아 짝지어주고, 급간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너무 아름다운 처용의 아내를 연모한 역신(疫神)이 처용으로 변해 잠자리를 같이 했다. 이를 본 처용이 춤을 추며 노래하자, 역신이 그 도량에 감복해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봐도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이후 세간에는 처용의 얼굴을 문에 붙여 귀신을 쫓는 풍습이 생겼다.

일연 스님은 ‘처용랑 망해사’조에 헌강왕이 유람을 다닐 때 포석정에서 남산의 신이 나타나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금강령에서는 북악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를 함께 전하며 “신라 패망을 경고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얼핏 〈삼국유사〉만 봐서는 처용랑 이야기가 설화처럼 느껴진다.

 

▲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39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처용무. <울산문화원 처용무전수학교 제공>

하지만 유사한 이야기가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도 전한다. 〈삼국사기〉 권11 헌강왕편은 ‘왕이 나라 동쪽 지방에 행차했을 때 알지 못하는 사람 4명이 어전에 나타나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고 의관도 다르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해의 정령이라 했다’고 전한다. 〈고려사〉의 내용도 처용이라는 이름을 명기한 점을 제외하고는 이와 유사하다.

당대에 중국 당나라와 일본은 물론 여진, 말갈 등 여러 나라와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고, ‘괴이한 모양과 의관’이란 표현으로 미뤄 짐작할 때 처용랑이 외국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경주 괘릉 무인상과 경주 용강동 석실분에서 출토된 문관상의 풍모가 아라비아 계통이라는 점에서 신라시대 이미 그 지역과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특히 최근 페르시아 고대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처용=페르시아인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쿠쉬나메’는 7세기 사산왕조 페르시아(226~651) 멸망 후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을 광범위하게 다룬 서사시다. 11세기쯤 만들어져 구전되다 14세기에 필사됐다. 당시 필사된 원본이 현재 영국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998년 이란에서 번역ㆍ출간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페르시아 멸망 후 지도자 아비틴이 유민을 이끌고 신라로 기항해 항구에서 신라왕 아들의 영접을 받았으며, 왕정을 보좌하고 왕과의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며 신라의 공주와 결혼하고, 둘 사이에 태어난 왕자가 후일 아랍군을 물리치고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 줄거리다.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처용설화와 맞물려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하다.

역시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가 쓴 〈제도로 및 제왕국지(Kitabu’l Masalik wa’l Mamalik)〉에도 신라가 언급되는데 ‘중국의 맨 끝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이 사는 곳이 있는데 바로 신라다. 금이 많이 나고 기후와 환경이 좋기 때문에 많은 아랍인들이 신라에 정착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 봤을 때, 처용이 페르시아 계통의 유민이란 주장에 상당한 설득력이 생긴다. 그렇다면 처용은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아랍계 귀화인이 아닌가! 물론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를 읽어내고, 그 속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그의 흔적을 찾아 울산 개운포(開雲浦)와 망해사(望海寺)를 찾았다.

 

▲ 망해사 건립 연대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들.

울산에서 장생포 방면으로 가다보면 여러 공장들 사이로 처용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따라 2㎞ 정도 들어가면 낚싯배 몇 척이 묶여 있는데, 개운포다.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바로 앞에 용과 처용이 나왔다는 처용암(岩)이 있다. 처용암을 찾아온 길손들을 위해 마련된 정자 옆에 울산문화원과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1985년 1월 8일 세운 처용가 시비가 서있다. 마침 이곳을 찾은 날, 보슬비와 더불어 물안개가 낮게 깔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도 주변은 이미 공장으로 가득 찼고, 대형 트럭들만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곳으로 변해 옛 사람의 자취를 그리기는 힘들다.

헌강왕이 동해용을 위해 지었다는 사찰이 망해사다. 이곳은 처용암에서 17㎞ 정도 떨어져 있다. 공단을 빠져 나와 언양ㆍ경주방면으로 7번 국도와 만나는 지점, 공영차고지 옆으로 난 솔숲을 따라 오르면 나온다.

 

▲ 신라 헌강왕이 용을 위해 지었다는 망해사.


조선 순조 31년(1831년) 발간된 ‘울산읍부지’와 철정 12년(1861년) 제작된 ‘대동여지도’에 나타나지만, 1899년 나온 ‘간행읍지’에는 폐찰로 기록돼 있다. ‘울산읍부지’와 ‘대동여지도’에 나온 망해사가 폐사로 기록된 것인지 사찰로 기록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1960년대 발굴 당시 ‘가정23년갑진(嘉靖二十三年甲辰. 조선 중종 39년. 1544년)’이라고 새겨진 명문기와가 발견돼, 이 즈음에 보수공사 내지 중창불사가 진행됐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사찰은 1960년대 이후 발굴ㆍ중창된 것으로, 그 이전에는 논과 밭이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1991년 개축됐는데 법당 뒷면 벽화를 △헌강왕의 개운포 행차 △동해용과의 만남 △망해사 건립 △부도제작 등의 일화로 장식한 것이 이채롭다.

모든 구조물들이 근ㆍ현대에 세워진 탓에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사찰 뒤편에 망해사 창건연대와 비슷한 것으로 평가되는 부도 2기가 남아 있다.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취하고 있는 이 부도들은 1963년 1월 보물 제173호로 지정됐다. 동ㆍ서 두 기 중 동쪽 부도는 도굴로 파괴돼 방치된 것을 1960년 11월 다시 세웠다. 현재도 동쪽 부도의 탑신과 옥개석은 크게 훼손된 그대로다.

지역에서는 용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왕이 지은 절인 만큼 당대 고승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혹여 용의 아들 ‘처용’의 흔적이 남은 것은 아닌지 추측해본다.

이쯤에서 한 가지, 처용이 외국인이면 처용이 췄다는 처용무 역시 외래의 풍습으로 봐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시각은 단견이다. 문화는 어디서 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받아들여 계승ㆍ발전시켰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사실 문화라 부르는 대부분의 것들은 타 권역에서 유입돼, 현지에 맞게 변이한다.

처용무는 통일신라에서 고려후기까지는 한 사람이 추었으나 조선 세종 이후 오방(五方)을 의미하는 다섯 사람으로 구성됐고, 성종 이후부터는 궁중의식에도 사용됐다.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됐으며,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도 등재된 한민족의 전통문화다.

현재 울산에서는 해마다 ‘처용문화제’를 연다. 1967년 시작된 울산공업축제가 1991년부터 처용문화제로 변경된 것이다. 2007년부터는 울산월드뮤직페스티벌도 문화제의 일부로 포함돼 30만 명이 찾는 지역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축제 기간 동안 다양한 문화ㆍ체험행사와 더불어 처용맞이ㆍ처용무(處容舞) 등이 선보인다.

1000년 넘게 이 땅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처용은 문화ㆍ인종ㆍ종교 등 다양성이 복합적으로 얽힌 오늘날 우리들에게 나와 다른 문화를 대하는 자세를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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