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거짓 없이 기록하고 이를 잘 보관해서 만대에 전하려는 노력은 옛적부터 있었다. 사관제도가 확립되었던 고려 초로부터 실록의 편찬과 보관은 국가적 사업이었고, 또 이를 위한 국가적인 노력은 대단했다. 거란의 침략으로 선대의 실록을 소실한 아픔을 경험한 고려에서는 고종 14년(1227)에 명종실록을 사관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외사고 설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사관제도를 계승하여 내외(內外) 양사고를 둠으로서 실록의 안전한 보관을 꾀했다.

 

월정사 수호총섭의 전통 자임

오대산사고가 건립된 초기에는 수호군 60명, 승군 20명이 수직했지만, 숙종 43년(1717)에 응원 등이 올린 상소문에 의하면, 춘추로 20명씩 수직을 세워야 할 것과 이들에 대한 처우의 개선 등을 건의한 바 있다. 월정사 주지는 오대산사고의 실록수호총섭으로 사고의 수호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월정사와 사고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영감사라는 암자에서 실제적인 수호를 했기에 이 암자는 사고사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에 본래의 사고로부터 실록을 옮겼는데, 정족산사고본과 태백산사고본은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겼다가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여 지금은 규장각 소장으로 전해온다. 적상산사고본은 구황실문고로 편입되어 장서각에 소장되었지만, 산질이 많고 6·25 때 분실되었다고 한다. 오대산사고본은 이왕직도서관에서 관리하다가 1911년 3월 조선총독부 취조국에서 강제로 접수한 후, 1913년 10월 동경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옮겼다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많은 책이 소실되었는데, 소잔본(燒殘本) 27책은 1932년 5월에 경성제국대학에 이전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전해오고, 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29책, 선조실록 8책 등 소잔본 46책과 대여한 1책 등 모두 47책은 아직도 동경대학교 총합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오대산사고 수호총섭의 전통을 자임하는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가 지난 3월 초에 조직되고, 3월 15일에는 공식 활동을 개시하여 동경대에서 실록의 반환 문제와 관련한 실무자들의 1차 협상이 있었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다. 환수위는 반환요청서를 전달했고, 동경대 측에서는 요청서를 내부적으로 검토한 뒤에 4월 17일까지 의사를 밝히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동경대 측의 응답은 기다려 봐야 하겠지만,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이 책을 돌려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또한 환수위의 정당한 요구는 관철되고야 말 것이다.

 

환수위 정당한 요구 관철돼야

올해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의 탄생 800주년이 되는 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단군신화를 수록하여 우리 민족의 근원을 밝혔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삼국유사를 바위굴에 숨겨서까지 전해왔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유사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황룡사와 미륵사, 그리고 원효와 의상 등에 관해 기억할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단재선생의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탑 속에 넣어 오래 보관하려던 계획이 일경에 발각되어 모진 고통을 당한 스님도 있었다. 오대산사고 수호총섭의 후예로서의 책무를 다 하려는 월정사 주지스님을 비롯한 환수위의 노력을 보면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김상현 동국대 교수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