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은 신록과 함께 법등 행렬이 이 나라 방방곡곡을 장엄하는 달이다. 언제 누구로부터 이어져오는 행렬인지 어디까지 이어져 갈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길을 묻는 자를 위한 가리킴의 손길이 분명하다. 몇 백 년 몇 천 년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앞서 걸어간 스승들이 저 영원의 빛깔인 신록의 가지에 걸어놓고 간 지혜의 등불.
필자가 제일 먼저 만나게 된 법등은 ‘인과응보(因果應報)’ 라고 하는 네 글자로 다가왔다. 꽃이 없는 봄에 비유될 만큼 캄캄한 시절이었다.

가정형편으로 진학은 좌절되고 설상가상으로 가망 없는 짝사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슨 까닭으로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는 채 기차 길이 마당을 질러가는 부산의 어느 산동네에서 벌을 서듯 열여덟 살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그 무렵 우리 가족은 70년대 산업화 물결을 타고 기러기 같이 이농하던 도시 유민 행렬에 끼어 있었다. 몸 하나로 대가족을 이끌고 내려온 어머니와 함께 우월감과 열등감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던 그 당시 골목 입구 헌책방에서 구해 읽은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테마로 만나게 된 ‘인과응보’.

이 한마디는 백납같이 희고 무거운 어둠속에서 나를 구해올리고 있었다. 주위가 갑자기 환해지면서 앞뒤가 보이기 시작했고, 무엇인가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인과응보, 무릇 모든 것은 그것을 있게 한 원인의 결과라고 하는 평범한 진리로 인해 감당하기 어렵던 번민은 홀연 사라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보다 더 분명한 원리는 없다. 한 치 어긋남이 없다고 하는 이 법칙 앞에 나는 비로소 처음이듯 내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그것의 원인이 되었을 지난 시간과 지금 이 순간의 결과가 될 앞으로의 긴 시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조금도 억울할 것이 없었다.

사춘기 나이 때
밤새워 읽은 《사랑》
진리 접하는 계기 돼


지금의 현실이 누구의 잘못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만든 원인의 결과라면 미래를 마음대로 지어낼 수 있는 힘도 바로 지금의 나에게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 작은 깨달음을 계기로 무진장의 매력으로 다가오는 불법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고 나와 세상에 대한 작지만 굳건한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알고 보면 세상은 곳곳에서 서로 돕기 위해 가동되는 거대한 프로젝트다. 주경야독이나 야경주독을 가리지 않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 자체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관장하는 정진의 연속이었다.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성과에 감사하고 순간을 소중히 하는 마음도 배울 수 있었다. 하루하루 마주하는 현재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무한하고 새로운 기쁨이었다.

오늘도 우주 어디로부턴가 흘러들어와 하나의 몸을 이루며 흘러 나가는 물을 생각한다. 흙과 불과 물과 바람을, 그것들이 길러낸 쌀과 야채와 열매와 갖가지 짐승들의 몸이 흘러들어와 잠시 이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단 하루라도 남의 몸을 얻어먹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 몸을 두고 나라고 할 것이, 내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부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된 계기가 그 ‘인과응보’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다시금 생각한다. 그러면 안으로부터 솟아올라 더 깊고 크고 무한한 안을 향하는 감사로 가득 차오르는 것이 있다. 기쁨이다. 어쩌면 현대인에게 찾아오는 갖가지 불행의 대다수 원인은 이 법칙을 믿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맹목의 불안 때문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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