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연선사의 진영이 안치된 국사전.
▲ 현재 인각사에서 조용한 모습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일연선사가 상주할 당시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유물 발굴 작업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지난달 9일 인각사에서 마련된 유물 공개 현장. 이 일대는 유물 발굴 때문에 곳곳이 파헤쳐져 있다.

일연선사 얼 서린 九山禪門 문도회 열린 도량

보각국존 일연선사를 가슴에 품고 여기 인각사로 오라
아 여든살 그이 촛불 밝혀 한자 한자 새겨간 그 찬란한 혼 만나 뵈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 
 - 고은 ‘일연찬가비’ 中

고은 시인이 일연선사를 기리며 지은 ‘일연찬가비’ 중 한 부분이다. 고려시대 승려면서 학자이기도 했던 일연선사(1206~1289)는 한국 고대 신화와 설화, 향가를 집대성한 역사서 《삼국유사》를 집필한 스님으로 익히 알려졌다. 스님의 업적은 오늘날에도 길이 남아 널리 회자되고 있으며, 이 같은 사실은 인적 드문 시골마을인 경북 군위군에 자리한 사찰 인각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각사(麟角寺)는 절 입구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의 형상이 마치 전설 속 동물인 기린이 뿔을 바위에 얹었다고 붙여진 명칭이다. 이곳에는 일연 스님을 기리기 위한 시비(詩碑)와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인각사 보각국사정조지탑 및 비명(碑銘)’은 물론 법당의 명칭 또한 임금의 스승, 즉 일연선사를 일컫는 ‘국사(國師)전’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삼국유사 특별 전시관도 마련돼 있다.

일연선사의 얼이 곳곳에 서린 인각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기록 등이 전무해 명확하지 않지만 현재 다음의 두 가지 설로 압축된다. 선덕여왕 12년(643)에 원효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선덕여왕 11년(642)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인각사 측은 “창건연대나 조사명을 달리한 것은 불확실성을 말해주지만, 유존유물로 볼 때 인각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됐다는 사실은 틀림없다”고 밝히고 있다.

▲ 일연선사의 진영이 안치된 국사전.
이런 인각사가 문헌상에 종종 등장하게 된 건 일연선사의 하안소(夏安所)로 지정되면서부터다. 일연선사는 인각사를 하안소로 지정받은 1284년부터 입적하던 해인 1289년 까지 사찰에 상주하며, 인각사 중수와 함께 구산선문의 중추적 역할을 주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접어들며 유교사상이 지배하면서 불교는 쇠퇴했고, 이 같은 운명은 인각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태종 6년 단행된 사원정리를 통한 242개 사원에도 포함되지 못했고, 세종 6년에는 242개 사원 중 36개를 본사(本寺)로 공인하고 나머지 사원을 말사에 편입시켰는데, 말사  중 하나로 명맥만 겨우 유지해 왔을 뿐이었다. 이렇게 조선 초기 이후 빈약해진 사세를 이어오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폐사의 위기에 직면했다. 임진왜란 당시 보각국사비는 물론 사찰의 모든 전각들이 불타는 등 전소됐던 것. 이후 효종 때 한 차례 중수를 거쳐 경종 원년에 이르러 본격적인 중수가 이뤄졌다고 한다.

하지만 1890년경 일연선사의 승탑지에 조상의 묘소를 사용하려다 실패한 황보씨가 일연선사 비와 전각을 파괴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대웅전과 요사채도 1934년과 1956년에 붕괴되고 말았다. 1963년 이도원을 비롯한 몇몇 뜻있는 이들의 중수를 계기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에도 제 모습을 갖추지는 못했다. 지난 1992년부터 인각사 측에서 관계기관의 협조를 받아 일연선사가 상주할 당시의 절 규모를 밝혀 복원하기 위해 유물 발굴 작업을 계속적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금동병향로를 비롯해 청동 소재 정병, 향합, 그릇, 금고 등 유물 20여점이 발굴돼 2월 9일 현장설명회를 열고, 이를 공개하기도 했다. 


 

“《삼국유사》 집필 정신 함양할 터”
인각사 주지 도권 스님

“일연 스님의 유물이 아직도 땅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하루빨리 유물들을 발굴해서 연혁을 증명하고, 일연 스님의 정신을 기반삼아 민족정신을 함양시킬 수 있는 수행 도량으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지난 2월 9일 금동병향로와 청동 소재 정병 등 20여점의 발굴 유물을 공개한 인각사 제5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주지 도권 스님<사진>은 이같이 포부를 밝혔다.

인각사는 1992년부터 유물 발굴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왔고, 지금까지 1,700여점의 유물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런 성과는 일연선사가 상주했던 절이라는 자부심이 뒷받침돼 가능했다. 하지만 인각사 측은 일연선사와의 인연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연혁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의 발굴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인각사 복원 작업은 마무리되지 않은 채 여전히 진행형이다.

스님은 “일연스님 탑비를 통해 스님의 상주 당시 전국 선종계 스님들이 모이는 구산문도회가 두 번이나 인각사에서 개최됐음을 알 수 있다”고 일연선사와의 인연을 강조하며, 인각사 복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 고대 신화와 설화 및 향가를 집대성한 《삼국유사》 집필로 큰 업적을 남긴 일연선사를 통해 국민들의 민족정신 함양을 추구할 것이라는 스님의 말은 조만간 실현될 지도 모를 일이다. 군위군이 직접 나서 인각사와 함께 사찰 일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고,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을 공개하기 위한 전시관 건립은 물론 중창불사도 병행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일단 인각사 일대의 유물들을 발굴해 당시의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 시급하다. 온전한 복원을 위해서다.

스님은 “이번 유물 발굴로 안개 속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면서 “인각사가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유물의 발굴조사와 함께 학술연구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복원작업을 우선적으로 시행하는 한편 추후에는 유물 전시에도 힘을 쏟겠다”고 계획을 밝혔다.

 



일연선사(1206~1289)

 

▲ 일연선사 진영.
1214년(고종 1) 지금의 광주 지역인 해양(海陽)의 무량사에서 학문을 닦고, 1219년 승려가 됐다.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2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를 거쳐 1246년 선사(禪師), 1259년 대선사가 됐다. 1261년(원종 2)에는 왕명을 받고,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돼 목우(牧牛)의 법을 이었다.
1268년 운해사(雲海寺)에서 대장경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조직해 맹주가 됐다. 1277(충렬왕 3)에는 운문사(雲門寺) 주지가 돼 왕에게 법을 강론하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돼 원경충조(圓徑沖照)의 호를 받았다. 1284년 경북 군위 인각사를 중건하고 궁궐에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다.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 고대신화와 설화,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 《어록(語錄)》, 《계승잡저(계승잡저(界乘雜著)》, 《조도(祖圖)》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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