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  도산 종의회의장

꽃샘추위가 매서워도 봄꽃의 행진은 어김없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제주도 서귀포에서 처음 꽃망울을 터뜨린 개나리는 부산과 마산, 대구에 이어 포항까지 치고 올라와 춘심을 전하고 있다 합니다. 이에 따라 화려한 봄꽃축제가 꼬리를 물고 개최됩니다. 봄의 전령이 먼저 도착한 남도 쪽에서는 저마다 매화, 산수유, 벚꽃 축제 등을 열어 사람들을 손짓합니다.

해마다 이맘 때 쯤이면 사람들은 봄의 정취에 푹 빠지게 됩니다.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과 만물의 소생을 바라보며 감탄과 탄성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아름다운 광경을 만날 수 있기까지 겨울의 혹독한 시련을 견뎌낸 아픔마저 기억하고 있다면 또 다른 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의 회춘은 계절이 바뀐다고 해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푼 것이 있다면 그 베푼 만큼 우리 인간도 자연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있어야 아름다운 상관관계가 형성됩니다. 만일 우리 인간이 자연에게 받기만 하고 돌려주는 데 인색하다면 자연은 해마다 그 빛과 풍채를 점차 잃어갈 것입니다.

봄의 전령이 전하는 소식이 이러한 가르침을 일깨워주고 있는데 세속의 저잣거리에서는 여전히 너와 나를 가르며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주고받음의 미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면 상대편을 무너뜨리고 내 이익을 극대화할 것인지에 골몰합니다. 그러다 보니 갈등이 생기고 원한이 커지게 됩니 다. 얼굴 마주치는 것조차 싫어 기피하고 가슴 속엔 원망만 키웁니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라’는 《법구경》의 말씀은 주고받는 관계를 악에서 선으로 돌리라는 당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생들은 상대방이 돌을 들면 바위를 들어 응징하려 합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서로가 깊숙이 얽혀 있습니다. 서로가 상대하지 않으려 해도 그리 할 수 없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존재이든 주고받음의 역학관계가 성립됩니다. 무엇을 주고받느냐 하는 것은 내 존재의 의미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주고받는 것은 단순히 선물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철학적 가치를 수반합니다.

불교에서는 주고받는 관계의 청정함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보시를 하고자 할 때도 주는 자와 받는 자, 주는 물건이 모두 깨끗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을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 하여 이를 다 갖춰야 올바른 보시가 이루어진다 하였습니다. 이 삼륜청정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예화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옛날 어떤 농부들이 밭을 갈다가 구슬을 주웠습니다. 농부들은 그 구슬을 벼슬아치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벼슬아치는 그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한 농부가 나서 간청했습니다.

“이 구슬은 저희들의 보배이니 꼭 받아주십시오.”
그러자 벼슬아치는 타이르며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그 구슬로 보배를 삼고 나는 받지 않는 것으로 보배를 삼으니, 만일 내가 그 보배를 받는다면 그대들과 내가 모두 보배를 잃는 셈이 아니냐.”

주고 받는 관계가 이처럼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보배를 벼슬아치에게 주려는 농부들의 갸륵한 마음과 그것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배를 삼겠다는 벼슬아치의 덕목은 우리에게 진한 감동의 여운을 안겨줍니다.
진정한 보시란 일방적으로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일화처럼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할 때, 그리하여 지속적인 덕화를 발휘할 때 보시로서 가치를 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습니다. 때문에 ‘베풂과 나눔’의 공덕을 으뜸으로 칩니다. 베풂과 나눔이 있을 때 상생의 기반이 다져지며 조화의 아름다움이 있는 법입니다.
식목일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심는 일에만 열중하고 돌보는 일에 소홀하다면 아마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고사하는 나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베풂과 나눔의 일을 간과했다는 얘기입니다. 나무를 심었다면 육림(育林)에도 공을 들여야 합니다. 사람도 어릴 때부터 부모의 각별한 정과 교육에 의해 그 장래가 달라질 수 있듯이 나무 역시 ‘가꾸기’에 기울인 정에 따라 성장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나무를 심고 키우는 일은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삶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자연에게 베푸는 것이 클수록 자연 또한 인간에게 그만한 상응한 대가를 치러 줍니다. 이 같은 이치는 세속사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고받는 관계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구축한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는 성장과 발전의 동력을 지니게 됩니다. 인간은 결코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 공업중생의 신분을 지니고 있음을 잘 유념한다면 도덕불감증의 시대를 탓하기 앞서 공동선을 실현해 나가는 데 집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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