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동네에서 형님 아우하며 지내는 이웃사촌끼리 사소한 말다툼으로 살인까지 저지른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늘 위해주는 척 하면서 기실 깔보아 오는 태도가 거슬려 손을 본다는 게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가해자의 말이 쉬 납득되진 않았지만 한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 따라서 답은 제각각일 것입니다. 누구는 보시라 하기도 하고 서로간의 믿음이라고도 하며 부지런함이라고도 답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하다고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상황과 형편이 꼭 같지만은 않은 것이 인간사회니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진실로 늘 웃는 얼굴과 따뜻한 말로 대하면 나를 해코지할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웃는 얼굴, 따뜻한 말은 명예와 권력과 재산이 없더라도 남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상의 보시 요건입니다. 불교에선 이를 자안애어(慈顔愛語)로 표현합니다.

명예·권력·재산이 넘쳐난들 ‘자안애어’가 배어있지 않은 이에게 사람들이 따를 리 없습니다. 반대로 내가 비록 명예·권력·재산이 없더라도 늘 자안애어로 사람들을 대한다면 항상 화기애애하고 주위에 원한을 살 일은 절대 없습니다. 물론 진실함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얼굴은 웃고 있으나 마음속으로 상대방을 경멸하고 있다면, 앞서 말한 기사의 예처럼 상대방을 더욱 자극할 수 있습니다.

자안애어는 예로부터 출가 수행자의 덕목이었습니다. 출가 수행자들은 대중을 제접(提接)할 때 가진 것이 없으므로 재보시를 하지 못하나 자안애어로서 중생을 구제하는 힘을 발휘했습니다. 즉 웃음과 말이 중생을 구제하는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웃음으로서 병을 고친 실례가 있습니다. 신라 신문왕 당시 국사였던 경흥법사의 일화입니다. 한 때 경흥법사는 근심걱정에 눌려 지독한 병을 앓았습니다. 어느 명의도 그의 병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한 비구니가 경흥법사를 찾아왔습니다. “스님의 병은 근심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한바탕 웃고 나면 씻은 듯 나을 것입니다.” 비구니는 곧 열한 가지 우스운 표정을 지으며 춤을 추었습니다. 요즘 공옥진 여사의 춤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병석에 누워있던 경흥법사는 비구니의 우스꽝스런 춤에 턱이 떨어져 나갈 듯 웃었습니다. 그와 함께 경흥법사의 병은 씻은 듯 나았습니다.

웃음을 잃은 이에게 삶은 무미건조할 뿐입니다. 정치도 따지고 보면 웃음을 안겨주는 통치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에게 웃음을 주지 못하는 정치는 무능력한 지도력, 대안 없는 정책이 원인입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웃음이란 냉소, 또는 코믹한 웃음과는 속성이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웃음만큼 중요한 것이 따뜻한 말입니다. 예로부터 말은 생각을 담은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온갖 수사와 비유를 동원하여 치장한다 해도 그 말 속에 진실성과 따뜻함이 없다면 죽은 언어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쉽게 정치인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도 그 말에 진실성과 따뜻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간결하고 쉬운 어투라 해도 자비와 사랑이 담겨있다면 상대방을 감동케 하고 긴장감을 해소시키게 됩니다.

부처님도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매우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불전은 구업(口業)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망어(妄語)와 기어(綺語)는 자신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고 남음을 경전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경전을 막론하고 주목되는 것은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 늘 맨 앞에 나와 있다는 점입니다. 입으로 짓는 업을 먼저 씻어야 함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일을 습관화한다면 구업도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감화함으로써 포교에도 기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의 삶에 있어서 나이를 앞세워 말투가 달라지는 경우가 허다한 모양입니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노인을 폭행한 젊은이의 못된 행태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 원인도 사실 말투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경로석에 앉아있는 젊은이에게 노인이 대뜸 ‘싸가지’ 운운하며 일어날 것을 요구하니 충돌이 빚어진 것인데 만일 그런 상황이라 하더라도 먼저 따뜻한 말로 충고했다면 봉변을 당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따뜻하고도 상냥한 말은 나이와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위와 신분과 성별에 관계없이 공업중생의 관계에서 애어의 자세가 발휘돼야 합니다. 그래서 애어(愛語)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남을 모함하지 않으며 오직 자비스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로운 말로 정의됩니다. 자안애어가 우리 사회에 보편적으로 넘쳐날 때 어떠한 위기상황도 쉽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우리 불자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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