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서 교수"내부로부터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스스로의 신념은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가 몸담고 있던 개신교계의 아집과 독선을 향해 비판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 달 17일 기독교계의 대표적 원로이신 강원룡 목사가 향년 89세로 우리 곁을 떠났다. 그의 타계를 많은 사람들이 애석해하는 것은 그가 단순히 개신교 지도자라기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온 지난 반세기 동안 해박한 지식과 개혁적인 안목,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바탕으로 사회를 바로세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던, 해방 이후 가장 행동반경이 넓었던 종교시민운동가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강 목사는 '걸어다니는 현대사'라는 별명만큼 언제나 격동의 한국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정치지도자들에게 넓게 멀리 보고 나라를 이끌어 주기를 주문하였고, 국가 이익과 민족 전체의 장래를 우선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정당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리는 정치꾼들에게는 거침없이 질타하곤 하였다. 사회공동체 의식을 일깨우고 중간지도층을 양성하기 위해 1963년 '크리스찬아카데미'(현재 '대화 아카데미')를 설립, 현 총리를 비롯한 많은 시민사회지도자들을 배출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강 목사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념이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집단 간의 갈등을 대화를 통해 풀어가려 했던 그의 확신과 실천적 모습이 아닐까 싶다. 특히 그는 다종교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종교 간 협력분위기를 조성하고자 노력한 대표적인 종교인이었다. 그 역시 청년시절에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 였다. 그러나 1950년대 미국 유학 후 자유신학자들로부터 극단적 선악 논리를 벗어난 신학을 접하고 자신의 신앙과 세계관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강 목사는 "대화는 상대방을 대결대상이 아닌 협조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느 편이 절대 선이고 그 반대편은 절대 악이란 사고방식은 옳지 않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는 불교 교리의 깊이와 포용성 때문에 환경과 평화 문제에 불교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고, 종교간 화합을 위해서는 언제나 특유의 원칙적이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격려를 해주곤 하였다. 2001년 필자가 달라이 라마 성하의 방한을 위한 활동을 지도해 주십사 하는 요청을 드렸을 때 두말없이 앞장을 서주었던 일은 한국 참여불교운동의 역사 속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인연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 점 때문에 강 목사는 때때로 기독교 교단 내부로부터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스스로의 신념이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가 몸담고 있던 개신교계의 아집과 독선을 향해 비판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은 배타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기독교를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왔다. 믿음을 강요하지 말고, 이제는 꼼꼼히 따져보고 제대로 믿어라"고 과감하게 충고까지 하던 강 목사. 경직된 기독교계에서 그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역할 중의 하나였다.

사회원로의 지헤가 절실히 필요한 이때에 깨어있는 한 분을 잃은 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남은 후손들이 그 높은 뜻을 이어갈 것을 믿고, 이제 그물을 벗어난 사자처럼, 아니 하늘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우리 곁으로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당신의 아호처럼 '바다 같은(如海)' 마음으로 온 세상의 평화 실현을 위하여 큰 족적을 남긴 강원룡 목사님, 편히 영면하소서!

박광서 참여불교재가연대 상임대표·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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