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줄이거나 버리라는 가르침은 매우 위험하다. 욕망 없이 무슨 힘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물어보면 바로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 다 욕망 추구를 통해 무엇인가 이루어 나가고 있는데, 나 혼자만 욕망을 버리고 초연하게 살다가 낙오자가 된다면? 불법의 울타리 속에서 혼자 행복할 수 있을까?

욕망이 적을수록 행복하기 쉽다는 말은 옳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욕망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면 역시 상대적으로 불행을 느낄 테니까. 그래서 욕망이 아주 없어지면 행복은 무한대가 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행복의 공식에 현혹되어 무조건 욕망을 버리거나 없애라고 말한다면 참으로 위험하다. 불자들이 대부분 종교 따로 삶 따로의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찰에 가서는 열심히 욕망 따라서 산 삶을 참회하고 비우고, 세속에 돌아오면 다시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그렇게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일반적인 불자의 삶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서원일 것이다. 욕망추구의 삶이 아닌 서원을 원동력으로 하여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불자의 삶이어야 할 것이요, 그러한 삶이야말로 건강하고도 힘찬 삶이 될 것이다. 연기법을 바탕으로 하여 세상을 보고, 나와 남과 사회와 국가, 나아가 온 중생의 안락을 함께 추구해 나가는 것이 서원 추구의 삶이다. 불법을 통해 이러한 전환을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불자의 징표가 아닐까?

욕망 추구가 아닌
서원 실천하는 삶이
불자의 삶이어야

그런데 문제가 있다. 현실의 불교에서 서원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법회 끝날 때마다 사홍서원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서원은 불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 서원이 너무도 크고 아득하게 멀어서 구체적인 나의 삶과 연결이 되지 않고, 그저 입으로만 뇌는 남의 서원이 되고 만다는 데 있다.

이제 좀 사홍서원을 지금 여기의 삶과 연결시키는 구체적인 서원을 세워보자. 중생을 다 건진다는 큰 목표 아래, 내 손이 닿을 수 있으며 중생들을 위한 올해의 봉사 계획을 세워보자.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가족을 위한 올해의 봉사 계획이라도 세운다면 나의 삶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여러 번뇌 가운데서 우선 작은 것 하나라도 끊어 나갈 계획을 세우자. 어떤 경전이라도 선택하여 공부할 계획을 세운다든가, 어떤 법회라도 나가서 불법에 대한 이해를 늘려갈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자. 자신의 수행 방편을 정하고, 하루하루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 되도록 하자.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불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는 바른 인식이 서야 하고, 그것을 향한 다짐으로 우리의 삶이 힘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 다리에 매달려 “이것 좀 해결해 주십시오. 제발 이것을 이뤄 주십시오”하고 기원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피를 입는 것이 아니다. 불법을 통해 내 삶이 변화되고, 그 변화된 삶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느끼며, 불법의 큰 힘에 감사와 환희를 느끼는 불자들이 늘어나야 한다.

불교의 사회화, 대중화를 아무리 크게 외쳐도 안 되는 까닭은 바로 삶과 불교가 떨어져 있는 불교의 현실에 있다. 불자들이 구체적인 서원을 지니고 그 힘에 의한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면 자연 나와 이웃과 사회의 문제가 남의 문제일 수가 없으며, 불법을 통해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러 나서게 된다. 건강한 불교를 이루는 첫 걸음, 바로 ‘나의 서원 바로 가지기’이다.

성태용/한국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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