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건설 염원 실현위해
세속 무관심서 나와
사회적 역할 재고해야

윤세원 시립인천전문대 교수


사회는 다양한 영역의 하위조직들이 결합된 하나의 거대한 구조이다. 이 구조를 전체적으로 지배하면서 특정 영역을 확대 재생산하기도 하고, 축소 재편하기도 하는 것이 정치이다. 정치는 ‘한 사회에서 희소한 자원의 권위적 분배’라는 고유의 기능을 통하여 이러한 일을 한다. 그리고 개인 혹은 하위단위의 조직들에 분배되는 몫은 각 영역의 역할과 능력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산업사회라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준비도 부족했고 불교도의 일체감을 형성시킬 교육도 부재 했던 불교계의 사회적 역량은 대단히 유아적이고 농경적이다. 정치와 종교는 서로 다른 영역이라고 하지만, 같은 사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희소자원의 분배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고, 서로 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불교도 정치 영역과 다양하게 접촉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노출되는 불교계의 모습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자기 몫을 요구하는 방법이 서툴고, 요구하는 몫에 대한 사회적 승인을 획득하는 합리성이 결여된 모습으로 각인되어 버렸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반불교적인 방향으로 구조화 되었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사회가 정초되는 과정에서 불교도의 역할이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불교를 신앙하는 개인들의 큰 역할들은 있었다. 그러나 불교를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역할이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사회의 산업화 과정에서 불교계는 사회적 자원의 분배를 요구할 정치 사회적 역할을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후 불교는 점점 희소한 자원의 분배과정에서 소외되었고, 분배의 몫에서 차별받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범불교도대회는 바로 이러한 반불교적인 사회구조와 불교적 가치의 충돌이었고,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이러한 충돌이 다반사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너무나 잘 갖추고 있다.

그 이유는 승속을 불문하고 불교인들이 불교를 통해 삶의 현장을 바꾸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강령 혹은 윤리강령을 제시하지 못했음에 있다. 국토가 한 번 예토(穢土)가 되면, 예토에서 기득권을 획득한 중생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 보존할 수 있는 법률과 제도를 만들어 그 국토를 영원히 예토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기득권이 도전 받는 경우가 생기면 더욱 공고한 법률과 제도를 만든다.

이렇게 되면, 불교도가 낸 세금과 정토건설의 염원이 예토를 유지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당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인데도 불교도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우리의 후손을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헛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불교는 사회적 기능이 없는 종교라는 보편적 인식을 넘어서고, 세속에 대한 무관심이 불교적 원칙에 충실한 것이라는 시대착오적인 견해를 타파해야 메아리 없는 범불교도대회를 반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현대사회는 제한된 자원을 두고 각자의 몫을 챙기기 위하여 이전투구하는 아비규환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불교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시 정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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