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부족한 이가 조직요직 차지하면 큰 위기에 봉착할 수도

가을이다. 바야흐로 만산이 홍엽으로 물들고 하늘이 높아지며 가축이 살찌는 계절인 것이다. 봄과 여름 내내 제 일에 열정을 쏟은 선남선녀들이 모처럼 산과 들로 나가 자연이 베푸는 아름다운 색의 향연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산은 온통 붉고 노란 색깔로 우리를 유혹하고 너른 논엔 황금물결이 넘실거린다.

책력(冊曆)상으론 가을이 분명한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설악산이나 지리산까지 갈 것도 없이, 눈앞의 남산은 붉게 타오르는 황홀한 단풍이 아니라 칙칙한 갈회색으로 뒤덮여 있다. 아침저녁으론 제법 선선하지만 한낮은 아직 여름 기온 그대로인데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나뭇잎이 단풍도 들기 전에 바싹 말라버린 것이다.

옛 사람은 “나뭇잎 하나 지는 것으로 천하에 가을이 옴을 안다[一葉落兮天地秋]”고 했거니와, 단풍 들지 않은 채 맥없이 떨어지는 건조한 낙엽을 보며 우리는 지금 관념적인 가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올해도 세계는 태풍과 허리케인, 지진과 해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커다란 태풍 없이 지내 대풍(大豊)을 맞았지만, 그 때문에 곡물과 과일 가격이 떨어져 농민들은 울상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태풍이 오지 않은 걸 탓할 수도 없으니, 세상사가 참으로 오묘하다. 자연은 우리에게 매사가 넘쳐도 부족해도 안 된다는 자명한 진리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돌아가신 이형기 시인의 절창·낙화·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그렇다, 모든 유무정물은 생겨난 때가 있으므로 사라질 때가 있는 법이고, 그 때를 제대로 알아 사라져야 슬프면서 아름다운 정조를 자아낸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주야장창 똑같은 모습으로 있으면 싫증날 게 뻔하고, 입맛에 딱 맞는 음식도 밥과 김치 아니고는 사흘 이상 먹으려면 여간 고통스럽지 않을 터이다.

자연은 제 스스로 생겨나고 자라 스러지는 주기를 결정한다. 하루살이는 말 그대로 하루밖에 살지 못하지만 그 나름대로 전력을 다해 살다 가는 것이고, 십장생 같은 것도 언젠가는 생명을 다하고 소멸한다. 인간 사회의 여러 제도와 관례 등도 자연의 순리를 본받은 것이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듯 한 단계를 마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그런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치다 보면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데, 이를 우리 사회에서는 졸업이니 정년이니 하는 말로 표현한다.

인간사회에서 인위적으로 정한 임기는 여러 문제가 있다. 어떤 이는 능력이 있는데도 임기 제한 때문에 그만두어야 하고, 그 역의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전자의 경우는 아쉬움은 있지만 부작용은 없는 데 반해 후자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능력이 부족한 이가 단체나 조직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임기를 강조할 때 그 단체나 조직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는 단체의 요직을 차지한 이들이 애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주변사람들의 대다수 의견이 부정적이면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야할 때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 시기를 놓친 사람이나 자연은 추해지게 마련이다. 가을답지 않은 가을을 보내면서 새삼 이형기 시인의 시구절을 되새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장영우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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