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다. 벚꽃이 만발하고 너도나도 꽃놀이를 가고 싶은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좋은 날 남해로 향했다.
진교 IC를 지나서 남해대교로 들어서는 길까지는 그야말로 벚꽃 터널이다. 부처님 보러가는 길이 이렇게 꽃길이라니 환희심이 저절로 솟아올랐다. 게다가 이곳은 우리나라의 3대 관음성지의 하나인 보리암이 아닌가!

남해의 보리암은 동해의 낙산사, 서해의 보문사와 함께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관세음의 정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보리암 주차장에는 이미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물론 등산객이나 행락객들도 있겠지만 주차장에서 암자까지 오르는 마을버스가 가득가득 차는 것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뿌듯해졌다.

▲ 남해 보리암의 해수관음상(왼쪽)과 보리암 앞 삼층석탑. 금산 능선의 큰 바위 아래 자리한 보리암에는 기도객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금산(金山)자락을 굽이굽이 돌아서 바다가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 보리암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얼마나 간절했으면 이 산중을 한달음에 올라와서 그토록 오랫동안 기도했을까? 문득 관세음보살님의 ‘일심칭명(一心稱名)으로 염염물생의(念念勿生疑)’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한 치의 의심도 일으키지 말고 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꼭 이루어진다는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있는 바로 그 어구다.

아무리 소원을 빌고 자신의 원을 세워도 그 속에 터럭만큼의 의심이라도 생기면 그 소원은 이루어지기가 힘든 것이다. 분명 이성계도 자신의 세속적인 소원이기는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염염물생의’했으리라고 본다.

원효대사 관세음보살 친견해

원래 금산 보리암은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다음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절을 만들어 보광사라고 명명한 곳이다.오래된 절인 만큼 많은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 바로 보리암이다. 지금은 금산 보리암이라고 돼 있는 곳이 예전엔 보광산 보광사였던 것이다. 보광산이 금산이 된 사연을 보자.

아마도 보리암을 한 번이라도 다녀 온 사람이라면 이성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알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때 바로 ‘남해 바닷가 보광산에 가라’는 산신의 계시를 받고 이곳에 와서 백일기도를 했다. 그때 이성계가 자신이 왕이 되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싸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이성계가 왕이 된 후 어느 날, 이 약속이 생각난 이성계는 그때부터 고민에 휩싸였다. 신하들과 회의 끝에 그는 이 산을 비단으로 감싸지는 못하는 대신 이름을 금산, 즉 비단산으로 바꾼 것이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이 산은 금산이 됐다. 또한 보광사는 조선 현종 원년(1660)에 이 절을 왕실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으로 개명했다. 그래서 바로 이 산과 이 절은 금산 보리암이 됐다.

하루 네 번 기도객 맞아

보리암의 해수관음상 옆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가락국의 김수로왕비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올 때 배에 싣고 왔다고 하는 탑이다. 그래서 이 탑 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다고 하기도 한다. 이 탑 위에 나침반을 올려놓으면 그 바늘이 방향을 잡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법당의 관세음보살상도 허황후가 가져왔다는 설이 있고, 또 원효대사가 바다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설도 있다.

보리암에 깃든 이야기들이 옛날이야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보리암에는 매일 기도를 하러 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특히 보리암의 경우는 누구나 기도를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산문을 활짝 열고 기도객을 맞이하고 있다.

▲ 보리암으로 오르는 길목에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연등이 걸려 있다. 멀리 남해의 섬들이 보인다.

보리암의 기도는 하루 네 번, 한 번 시작하면 1시간 30분 동안 계속된다. 오전 3시 30분과 9시, 오후 2시와 6시 30분에 행하는 기도에는 기도객으로 온 사람이라면 꼭 참여해야 한다. 물론 약간의 강제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보리암은 관광하는 곳이 아니라 바로 기도하는 기도처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반가이 맞이해서 그 원을 들어주는 곳이 보리암이다.

보리암을 찾은 날 해수관음상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한 가족은 아들에게 부처님 앞에 삼배를 올리라고 하더니 “너 지금 소원이 뭐니?”라고 물었다. 그 아들이 씩 웃으면서 “비밀!” 이라며 조르르 달려가서 관음상 앞에 기도를 했다. 순간 소원은 그렇게 소중하고 간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암 종무소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매년 이 맘 때면 천 개도 훨씬 넘는 연등이 보리암으로 올라가는 입구부터 경내에까지 가득 찬다고 말했다. 보리암에는 흔히 생각하는 법회와 신도모임이 없으나 전국에서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곳 관세음보살님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해수관음상은 불기 2535년에 다시 모신 것이라고 한다. 이 관음상이 헬기로 이운될 때 하늘에는 서광이 비쳤다고 한다. 지금 현실에서도 신묘한 관음의 이적은 계속 생기고 있는 것 같다. 보리암에서 내려오는 마을버스는 오후 6시에 끊긴다. 그러니 낮에 가서 나올 사람들은 6시에 있는 막차를 타고 내려오거나 산길을 걸어서 내려오면 된다. 굽이굽이 산길을 내려오면 힘들게 올라갔던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갈 때의 간절함은 관세음보살님이 짊어주셨기 때문이리라.

 



3대 관음성지의 하나인 남해 보리암을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관음성지가 있고 또 앞으로도 성지가 될 수 있는 곳들이 많습니다. 불교성지는 원래부터 그렇게 성스러웠던 공간이라기보다는 불자들의 간절함이 만들어 낸 공간입니다. 또한 이 땅의 관세음보살은 어떤 특정한 곳에서만 상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전체에 그리고 간절한 불자들의 마음속에 내내 상주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의 관세음보살〉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저는 또 우리나라의 숨은 관음성지를 찾아 떠납니다. 고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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