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논리적 해명

개는 컹컹 짖고 고양이는 야옹 울지만 그것이 몸 받고 태어난 것들의 배고픔 때문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한가지다. 소는 움머어 하고 염소는 매애애 하지만 그것이 어미를 찾는 짐승의 외로움이라는 점에 있어 동질의 슬픔이다.

이들은 제각기 다른 소리로 소통하지만 그것이 목숨이 빨아들인 허공의 깊이이며 생의 구경과 맞닿는 절규이자 노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울음소리는 그 종의 언어요 이름은 하나의 기호라고 본다면, 언어와 언어로 된 이름이 없어져버리면 본질도 사라지는 것일까?

예를 들어 불안이라는 단어가 없어지면 불안한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불교며, 기독교며, 회교며 하는 이름들이 사라져버린다면 종교의 본질은 사라지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이 세상에 언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주의 본질과 현상의 변화는 영원히 그대로 유전하여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이 현상계의 우주적 진리는 언어가 생기기 이전에도 있어왔을 것이고 언어들이 모두 멸한 뒤에도 존재할 것이기에 그렇다. 오히려 하나님이니 부처님이니 하는 이름이 없어지고 나면 아득하고 그윽한 종교의 본질만 남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난립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생성하고 전승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불안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종교의 다양성보다 더욱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 불안의 여러 형태와 요인들이다. 현대인은 이 불안이라고 하는 짐승에게 쫓기고 쫓겨 종교의 지붕 아래로 찾아들거나 급기야 스스로 기른 불안의 깊은 아가리에 먹히고 마는 것인지 모른다.

종교는 어쩌면 살아서 완전한 평화를 얻으려고 하는 불안의 한 피난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 종교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좀처럼 그 울 밖을 나서려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종교성이라는 것 자체가 믿음이라고 하는 무형의 탑을 쌓아올리는 일이어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릴 것을 불안해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 종교를 섬기면 타 종교를 공부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와 타 종교를 비교할 만한 지식이나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맹목적인 믿음에 매달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불안을 피하여 찾아들어간 종교 안에서조차 불안은 완전히 소멸되지 못하고 여전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어떤 사람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면서 기독교의 설교를 들어 본 사람은 아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가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지, 얼핏 보면 다른 방향인 듯이 보여도 비유체계나 이름이 다르다뿐이지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가 닿고자 하는 근본자리는 똑같은 자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근본적 불안으로부터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해방되어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에 대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해명이 불교의 원리라는 것을,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밝혀 궁극적으로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전 우주적 생명과학이 불교라는 것을 아는 타 종교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경 시인,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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