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이틀 강원도 산골짝을 다녀왔다. 무작정 차를 몰다 포장 안된 길, 인적이 드문 마을에 들어섰다. 불꺼진 집들이 대부분이었고, 날은 올해 들어 가장 추웠다. 식당도 없어 주인집 김치와 식은 밥에, 홀로 끓인 라면으로 허기를 달랬다. 시린 새벽 공기와 햇살에 반짝이는 잔설이 아주 흔쾌했고, 물이 아주 달았다.

역시 산을 찾는 것은 불교적이다. 나는 불교를 한 마디로 정화의 의식(儀式)이라고 부른다. 절간을 찾는 장삼이사들의 뿌리깊은 욕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상의 짐으로부터, 그리고 관계와 시선, 비교에 내몰리는 피곤으로부터 구출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가. 절간에서 하는 자신과 가족에 대한 축원은 성공 자체보다 그 성공이 가져다줄 심리적 부담과 고통의 경감에 더 무게가 실려있다고 생각한다.

‘벗어난다’는 점에서 불교는 레저나 피크닉과 비슷한 효용을 갖고 있다. 아울러 다른 심오한 정신적 전통들과도 같은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불교는 “콧 구멍에 바람 쐬러 가는” 마음의 연장이며, “덜어내고 또 덜어내 주기 위해(損之又損) 내가 왔노라”는 노자를 동지로 삼고 있다. 이 말은 불교를 천박하게 만들려 하거나, 혹은 다른 사상과 대충 뒤섞고 뭉뚱그리자는 스노비즘이 아니다.

나는 이 시대 불교 본래의 방편(方便) 정신을 깊이 숙고하자고 주문한다. 방편이란 실용적 정신의 산물이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출신과 기원을 묻지 않고 연대하고 출입시킨다는 뜻이다. 불교의 목표는 ‘정화’이고 거기서 오는 안심입명과 축복인 바, 거기 효율적이라면 ‘이름’을 묻지 않고, 끌어다 쓰고,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버린다. 불교는 그 점에서 도그마일 수 없고, 최종적 권위를 갖지도 않는다.

《금강경》의 반복되는 명구처럼 “불교가 설하는 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렇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설법을 불교라고 부른다.

21세기는 새 불교의 전통을 만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근본정신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시대와 환경에 맞는 새 정화의 노하우를. 그러자면 낡은 틀을 깨야 하고, 아울러 불교를 그 ‘이름’ 아래,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유의 오랜 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중에 하나가 재가(在家)와 재사(在寺)의 구분이다. 물론, 다른 삶을 살려면 ‘장소’를 바꾸고 ‘관계’를 달리 해야 한다. 그렇지만 산속에서 출가인들 또한 새로운 삶의 관계를 맺고 일정한 공동체 속으로 들어간다.

관계는 인간의 운명이고, 우리는 일과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 밖에 다른 초월적 세계는 없다. 불교는 저 너머의 위안을 몰수하고, 퇴로를 여지없이 차단시켜버렸다. 이것이 불교의 매력이고, 또 위험이다. 이 지점에서 재가와 재사의 경계가 지워지기 시작한다.

수행자는 일상 속에서 바깥을 차단하고 새로운 장소를 자기 속에서 설정해야 한다. 그렇게 비워진 공간에서 각자 기도와 염불, 선정을 통해 홀로만의 정화 속으로 들어간다.

이 성패와 지속 여부는 다시 말하지만, 장소와 관계의 양상을 묻지 않는다. 오직 관건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入處皆眞)’에 달려 있다. 그 칼 끝을 재가든 재사든, 홀로 감당해야 한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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