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종 개산조 혜원 백련결사 맺은 고찰

동림사 가는 길목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절은 서림사다. 절 개창도 서림사 다음으로 동림사가 창건됐다고 한다.

혜원은 처음부터 동림사로 오기로 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같은 석도안(釋道安)의 제자이면서 사형이었던 혜영(慧永)과 함께 나부산(羅浮山)으로 가 수행하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혜영이 먼저 나부산으로 가는 도중에 여산으로 들어왔다. 혜영은 당시 강주자사(江州刺使)였던 도범(陶范)의 도움을 받아 376년에 서림사(西林寺)를 짓고 주석하게 되었다. 나중에 형주를 거쳐 여산으로 찾아온 혜원은 혜영의 만류로 나부산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혜원에 의해 설립
처음에는 서림사 옆 용천정사(龍泉精舍)에 머물다가, 386년에 새로운 절을 서림사 동쪽에 짓고 동림사(東林寺)라고 명명했다. 서림사는 현재 동림사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데 서림사탑과 함께 장구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여산에는 300~500여 개소의 사찰이 있을 정도로 불교가 융성했다고 한다. 이중 동림사, 서림사, 대림사(大林寺)는 3대 사찰로, 개선사(開先寺) 귀종사(歸宗寺) 서현사(棲賢寺), 원통사(圓通寺)는 4대 총림(叢林)으로 불렸다고 한다.

혜원은 동림사에 와서 스스로 반야 불영(佛影)의 두 당각을 건립했고, 그밖에 여러 전각을 지었다. 그후 양(梁)의 효원(孝元)은 중각을 이룩하고 장엄사를 지었다. 또 제(齊)의 혜경선사(慧景禪師)가 산 대중들의 연이은 청을 받아들여 봉정사로 올라가 주지가 되었다. 그후 양의 혜귀(慧歸)가 혜경선사의 뒤를 이어 봉정사로 올라가 주지가 되어 가람을 이루었다.

천태대사는 동림사에 머물고 때때로 봉정사에 올라가 고요히 수행하고 교화를 폈쳤다.

▲ 동림사 금강문. '나무아미타불'이란 글자가 적혀 있어 정토종 사찰임을 알려준다.

정토신앙의 시원
호계를 지나 ‘수읍여산(秀廬山)’이라 쓰여있는 대리석으로 된 산문을 들어서면 수령이 1500년이나 된 동림사의 녹나무 고목이 나타난다. 동림사가 1620년이 넘는 고찰이니 이 나무는 혜원 이후 심어졌을 것이다.
이어서 새로 단장한 금강문 벽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어 정토종 사찰임을 알려준다.

이 문을 들어서면 백련지(白蓮池)가 나타난다. 여름에는 흰 연꽃이 핀다고 하는데, 지금은 겨울인지라 백련을 볼 수 없다. 혜원의 백련결사도 이 백련지에서 이름을 얻은 듯하다.

연지 구석 쪽에는 3층 종루가 있는데 맨 아래 층에 지장보살을 모셔놓은 것이 이채롭다. 다음 사천왕문 속에는 중국적 표정이 흠씬 묻어나는 사천왕들이 절을 수호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양쪽으로 사대천왕을, 가운데에는 포대화상을 모시고 그 뒷면에 동진보살로 위타보살상을 조성한 점이다. 이 상은 남방 증장천왕의 팔대 장군의 한 분이라 한다.

이윽고 동림사의 중심이 되는 전각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나온다. 대웅전에는 전면에 ‘淨土(정토)’라고 써 있다. 주존불은 중심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측에는 아미타불 우측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대웅전 내부 양식도 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벽에는 다시 나한상을 모시고, 대웅전 뒤쪽 좌우에는 문수 보현을, 삼존불 뒷면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과 33응신상을 조상했다. 이런 양식은 중국 여러 대웅전에서 많이 보이는 양식이다.

대웅전 앞쪽에는 동서 양쪽에 하나씩, 한 절에 두개의 나한당(羅漢堂)이 있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 서 있는 육조송(六朝松)은 나한송(羅漢松)이라고도 하는데, 혜원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대웅보전 뒤쪽으로는 호법전, 신운전, 삼소당이 있다. 호법전(護法殿)에는 미륵불을 모셔 놓았고, 삼소당(三笑堂)은 호계삼소의 일화에서 생긴 전각이다.

신운전(神運殿)에는 신이한 전설이 전한다. 혜원이 동림사를 짓기 위해 재목을 구하러 향곡산에 갔을 때 꿈속에 신이 나타나 말하기를, “이곳은 그윽하고 고요한 곳으로 부처님이 계실 만한 곳이다”라고, 절 지을 곳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날 밤 천둥 번개가 치고 큰 비가 오더니 광풍으로 나무가 뽑혀나갈 정도였다. 이튿날이 되자 구릉이었던 곳이 평지가 되어 있었고, 연못안으로 절을 지을 만한 좋은 재목들이 가득 떠내려와 있었다.

이와 같이 신이 재목을 운반해 주었다고 하여 ‘神運(신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대웅전 뒤쪽에는 ‘연사중광(蓮社重光)’이 있다. 여기는 염불정토를 닦는 곳으로, 오늘날까지 백련결사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뒤쪽에는 혜원이 불경을 번역한 것을 기념해 세운 역경대(譯經臺)와 혜원이 지팡이를 꽂아서 생겼다는 총명천(聰明泉)이 있다. 장경루는 삼층으로 지어진 이른바 장경각으로 당시 일만 여권을 소장한 중국제일의 서고였으니 오늘날의 도서관인 셈이다. 장경루 옆으로 붙어 있는 건물이 원공전(遠公殿)으로, 여기에는 혜원의 상이 모셔져 있고 벽면에는 유명한 석각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 동림사 산문. 산문 위로 우거진 나무는1500년 된 녹나무이다.

모든 결사 시초된 백련결사
동림사 뒤쪽에는 대나무숲이 울창하다. 혜원은 그 대나무 만큼이나 대쪽같은 성품을 지녔던 모양이다.
당시 진나라의 환현(桓玄)은 불교의 승려들이 왕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다는 핑계로 대대적인 불교 탄압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곳 동림사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그것은 혜원 스님의 덕망이 워낙 널리 알려져 함부로 하지 못하였고, 한편으로는 환현과 깊은 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혜원은 불교계에 대한 환현의 이러한 위협에 대하여, 그의 꼿꼿한 소신을 밝혔다. 그것이 이른바,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다. 혜원은 이 글에서 “불교와 유교는 비록 도는 다르지만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승려는 속세에서 출가하여 세속을 떠났기 때문에 왕에게 예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황제가 곧 부처[王卽佛]”라는 사상으로 황제는 부처를 대신해서 모두의 위에 굴림하려던 황제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다.

천태대사 또한 이러한 경향을 그대로 이어받아서인지, 후대 진왕 광(廣)에 대하여 태극전에서 보살계를 주고 광으로부터 삼배를 받았다. 그리고 광은 서신을 통하여 스스로 제자라 하면서 천태대사에 대해 깍듯이 존경을 표하였다.

혜원의 불교 사상은 당시 도교의 불로장생에 대하여, 불생불멸하는 열반을 설파했다. 그 열반의 경지는 누구나 쉽게 아미타염불을 통하여 정토에 들어 열반에 나아가는 것이었다. 또 중생들의 고는 인과응보로 발생하여 윤회전생한다는 윤회업보사상을 설파하여 일반대중들을 선도했다.

마침내 혜원은 진나라 원흥 1년(402)에 당시 여산에 은거하던 거사 유유민(劉遺民)에게 발원문(發願文)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뜻을 같이하는 123명이 동림사 반야대(般若臺) 아미타불상 앞에 모여 염불수행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훗날 ‘백련결사(白蓮結社)’라고 이름하는 신행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하여 누구나 일심으로 염불하면 서방정토에 태어나 생사윤회의 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정토신앙은 당나라 때 이르러, 선도(善導)가 정토종(淨土宗)으로 승화함으로써 혜원은 정토종의 시조로 추앙되었다.

이 정토종의 근본 교리는 일심염불하여 업을 닦아서 내인(內因)을 이루고, 아미타불의 중생을 구제하려는 본원력이 외연(外緣)이 되어 아미타불의 불국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누구나 열심히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정토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실천행을 제시했다.

이러한 정토사상은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남송의 모자원(茅子元)이 백련결사를 본받아 연종참당(蓮宗懺堂)을 조직하고 대중들을 모아 백련종(白蓮宗)이라 했는데, 여기서도 아미타불을 염불하도록 했다. 이 단체는 후에 미륵사상 등과 합하여 백련교로 성립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토사상과 동림사 백련결사는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토신앙은 신라시대에 널리 수용되어 《삼국유사》에는 노힐부득 달달박박의 염불에 의한 현신성불이야기나 광덕 엄장의 염불성불, 욱면비의 염불로 극락세계로 간 이야기 등이 보인다. 이들 모두 혜원의 염불 정토 신행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 혜원이 동림사에 있으면서 세속에 나오지 않고 청정 수행한 내용이라든가, 동림사 결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결사정신은 우리나라의 많은 청정수행자들의 ‘신행의 거울’이어서 많은 저술의 시문에 종종 인용되었다.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결사인 지눌의 정혜결사와 요세의 백련결사 또한 동림사 백련결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지눌(1158~1210)의 정혜결사는 당시 승단의 무사안일한 수행, 사회적인 말법사상, 오도된 정토신행을 비판하고 출가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바라는 일종의 개혁운동이었다.

지눌은 처음에는 공산 거조사에서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여 정혜쌍수를 실천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많은 대중이 참여하자 지리산 길상사(송광사)로 옮겨 정혜(수선)사를 조직했다. 이 결사문에 의하면, 바른 인연을 함께 맺고, 정혜를 함께 닦으며, 행원을 함께 닦고, 불지(佛地)에 함께 태어나, 보리를 함께 증득한다는 내용이다.

백련결사는 그 취지와 수행내용에서 동림사 백련결사와 매우 흡사하다. 이 운동은 고려 천태종 원묘국사 요세(了世. 1163~1245)가 만덕산에서 보현도량을 결성하고 천태지관 법화삼매참회 정토업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실천문을 두어 전개한 신행운동이었다. 이를 ‘백련사(白蓮社) 결사운동’이라 한다.

또 요세는 결사하면서 50여 년 동안 서울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하니, 이 또한 혜원이 36년간 동림사를 나오지 않고 수행한 것을 따른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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