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열창하고 있다.

“깨달음 통해 자유 찾듯
자유로운 재즈 찾아
음악으로 수행 할래요”

재즈(Jazz)는 19세기 말 미국의 흑인 민속음악과 클래식·행진곡 등이 만나 형성된 음악장르다. 다양한 요소와 섞이며 발전했는데, 블루스·비밥·펑크·라틴음악 등을 아우른다.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로움’이다. 정해진 형식에 얽매이기 보다는 독창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이 강해서 같은 곡도 연주자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매력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1926년 코리안재즈밴드가 공연을 통해 재즈를 선보인 뒤 1950년대부터 조금씩 알려졌고, 이후 몇몇 재즈클럽이 생겨났다. 여러 매체에 재즈가 소개되면서 점차 대중에게도 알려졌지만 다른 장르와 비교한다면 크게 활성화되지는 않았다.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즈 보컬리스트는 웅산(雄山·본명 김은영, 48)이다. 그녀는 재즈 불모지로 불리는 한국에서 25년째 활동 중이다. 일본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해 아시아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로 꼽힌다. ‘재즈의 지평을 넓히는 게 목표’라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스튜디오 녹음실에서 싱글앨범을 녹음하고 있다.

출가 결심한 소녀

김은영은 1973년 경북 문경 가은에서 1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은 지역 천태종 지회에서 신도회장을 역임한 신심 돈독한 천태불자였다. 집안에 기도실이 별도로 있었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관음주송을 하거나 불교 관련 글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관음주송을 했고, 〈반야심경〉을 외는 건 일상이었다. 장래희망 중 하나가 ‘스님’이었던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면 보통 대학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국·영·수 과목과 씨름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김은영은 이 시기에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미래를 꿈꿨다. 음악에 관심이 많아 어린 시절에 금관악기 합주체인 브라스밴드(Brass band)에서 트럼펫을 불었고, 합창·중창을 했던 그녀는 ‘가수’와 ‘스님’ 두 진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교실에 앉아 있을 때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아 마음이 답답했다. 그런데 사찰에 찾아가 은은히 울려 퍼지는 풍경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설레었다.

결국 출가를 결심했다. 부모님께 출가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자 아버지는 “자식 중에 부처님 제자가 있어도 좋다.”고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학업도 채 마치지 않고 남들과 다른, 평범하지 않은 길을 가려는 딸을 걱정했다. 그래도 결국 그녀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1989년 가을, 김은영은 열일곱 살의 나이로 천태종 총본산인 충북 단양 구인사로 가서 입산을 신청하고 사찰에 머물렀다. 사찰에 머무는 동안 여러 고민을 했지만, 이내 자신의 마음속에 ‘음악’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음을 알게 됐다. 고민 끝에 그녀는 구인사에 들어온 지 두 해가 되기 전인 1991년 가을 구인사 산문을 나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출가를 결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음악을 하겠다.’는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해주었다.

가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1980~1990년대는 대학가요제의 전성기였다. 신인가수의 등용문이라고 불리던 대학가요제에 참가해 가수의 길을 모색해봐야겠다고 결심한 후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대학입학의 목적이 뒤바뀌었지만, 어떤 길을 선택하든 꿈을 이루려는 목표를 향한 발걸음이 아니겠는가.

상지대학교 중국어과에 입학했고, 대학에서 록(Rock)음악 동아리 ‘돌핀스’에 가입했다. 그녀는 돌핀스 창단 이래 최초의 여성 리드보컬이었다. 무대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한 곡을 수십 번씩 불러가며 밤을 새워 연습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징징~’ 울리는 디스토션(Distortion) 소리에 묻혀 지냈다. 무대를 누비며 노래를 하는 매순간은 그녀에게 감동의 연속이었다.

1993년 MBC강변가요제 강원도 예선에서 가창상과 인기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동아리활동을 통해 공연을 이어나갔다. 당시 록은 그녀 인생의 전부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음악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런 김은영에게 음악을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세상에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많다.”며 여러 장르의 음악을 직접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몇 개를 선물로 줬다. 록 음악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선물로 받은 만큼 방청소를 하면서 테이프 하나를 재생했다. 카세트에서는 재즈가수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1915~1959)의 ‘I Am A Fool To Want You’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어느 순간 청소는 하지 않은 채 손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노래에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첫 소절을 듣는 순간 세상이 멈춘 기분이었어요. 그 다음은 지진이라도 난 듯 온몸에 전율이 일었어요. 머릿속에는 ‘저 노래를 꼭 불러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친구에게 받은 녹음테이프 속에 담긴 한 곡의 노래는 그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2014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공연하는 웅산과 웅산밴드. 웅산밴드는 곡의 편성에 따라 세션이 바뀐다.

재즈란 음악과의 만남

재즈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하자마자 곧장 재즈클럽을 찾아다녔다. 여러 뮤지션들의 무대를 보고 느끼며 ‘재즈는 어떤 음악일까?’,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재즈음악을 할까?’, ‘내가 이런 음악을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에 답을 찾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주 찾아가던 재즈클럽의 사장님이 공연을 위해 클럽에 온 신관웅(재즈피아니스트)·류성복(드러머) 씨에게 그녀를 소개해주었다. 즉석 오디션 무대가 열렸다. 그녀는 한영애의 ‘누구없소’를 불렀고, 그 자리에서 합격했다. 재즈 보컬리스트 ‘웅산’의 탄생이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이름인 ‘웅산’은 구인사에서 머물 때 인연을 맺었던 스님이 ‘산과 같이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지어준 예명이다.

1996년 1월, 그녀는 홍대 인근의 ‘써티클럽’에서 첫 무대에 올랐다. 이날부터 일당 2만 원을 받으며 경기도 성남에 있는 집과 홍대 앞을 오갔다. 무대에 오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음악공부와 노래 연습에 온힘을 쏟았다.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즐거움에 고단한 줄도 몰랐다.

우직하게 노래연습과 음악공부, 재즈공연에 매진해온 웅산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건 1998년 일본 ‘오모리밴드’가 내한공연을 왔을 때다. 그녀는 오모리밴드의 게스트보컬로 출연했는데, 공연이 끝난 후 투어매니저에게 일본 활동을 제의받았다. 새로운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잠시, 이내 가슴 가득 설렘과 열정이 차올랐다. 그 후 본격적으로 일본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에서의 경험은 그녀에게 또 다른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당시 우리나라 재즈 음악은 네 가지 악기를 사용하는 사중주(Quartet)나 피아노와 다른 두 악기를 사용하는 삼중주(Trio) 편성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일본의 재즈밴드들은 악기의 수나 종류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연주했다.

2014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블루노트 콘서트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다.

웅산이 일본 첫 무대에서 사용한 악기는 베이스와 색소폰이 전부였다. 당시 웅산은 두 악기의 화음 속 빈자리를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채워야하는 부담감에 휩싸였다. 무사히 무대를 끝냈지만, 그녀의 첫 무대는 내공을 더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시간이었다.

오사카 지방의 작은 클럽에서 활동을 시작한 웅산은 점차 일본 재즈마니아 사이에서 조금씩 알려졌다. 입소문을 타면서 공연 횟수가 늘었고, 규모도 조금씩 커졌다. 무대에 오르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새롭고 다양한 편곡을 시도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일본의 한 프로듀서가 웅산의 음반을 제작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함께 녹음작업을 할 세션(Session)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주었다. 웅산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제가 가장 편안하게 노래할 수 있는 일본의 웅산밴드와 당시 일본을 대표했던 아티스트들, 마지막으로 세계적인 뮤지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어요. 음악에 대한 욕심이 많은 저는 바로 세 번째 선택지를 골랐죠. 일 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뉴욕에서 앨범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웅산은 한국인 중 최초로 일본 재즈레이블과 계약한 재즈 보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앨범 작업에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베니 그린(Benny Green)을 비롯해 콘래드 허윅(Conrad Herwig, 트롬본)·로드니 그린(Rodney Green, 드러머) 등이 세션으로 참가했다. 이렇게 데뷔 8년만인 2003년에 낸 1집 앨범 ‘러브레터(Love letter)’가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발매됐다.

앨범은 발매 후 양국 재즈마니아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웅산은 자신이 하는 재즈음악의 본질과 ‘스스로 하고 싶은 음악’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고민 끝에 ‘블루스에 도전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주변의 만류가 거셌다.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강행 끝에 2집 앨범 ‘더 블루스(The Blues)’를 출반했다.

“1집 앨범은 지금 들으면 풋풋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져요. 하지만 당시에는 많은 고민을 안겨주기도 했어요. 마음속 어딘가가 꽉 막힌 느낌이었죠. 고민 끝에 2집 앨범을 발매했는데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게 앨범 판매량은 고민거리도 아니었어요.”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꾸준히 음반을 냈고, 어느덧 10집 앨범 발매를 앞두고 있다. 특히 2010년 발매한 5집 앨범 ‘클로즈 유어 아이스(Close your eyes)’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의 재즈 전문잡지 〈스윙저널〉에서 골든디스크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겨주기도 했다.

2019년 7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김주원의 탱고 발레’ 공연에 참여한 웅산과 출연진.

“재즈 대중화의 새지평 열고파”

쉼 없이 달려온 만큼 슬럼프도 자주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에 도전하며 극복해왔다. 하모니카·국악·판소리 등 새롭게 배운 음악들은 성장의 자양분이 됐다. 이렇다보니 슬럼프는 불청객이라기보다 그녀와 재즈의 길을 함께 걷는 도반이 되었다.

“멈춰있는 순간 더 이상 재즈가 아니에요. 살아 움직이는 것만이 재즈이고, 살아있는 재즈는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죠.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는 종교잖아요. 깨달음이란 목표를 위해 수행자가 정진하듯이, 저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재즈를 선보이기 위해 음악적 수행을 이어가고 있답니다.”

웅산은 재즈 보컬리스트로서 앨범을 준비하고 무대에 오르는 동시에 작사·작곡을 겸하는 싱어송라이터로도 활동 중이다. 자신의 고민과 노력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습작노트 ‘리얼 웅산북’을 바탕으로 자신의 색깔을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그녀는 재즈에 국한하지 않고, 대중에게 다양한 모습을 선보이기 위해 도전을 이어왔다. 드라마 ‘추노’와 ‘경성스캔들’을 비롯해 영화 ‘그림자 살인’, ‘미쓰고’ 등의 OST와 CF음원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창작뮤지컬 ‘하드락 카페’의 배우로 무대에 올랐고, 케이블TV MC와 라디오 진행을 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 중이다.

2021년10월 대한민국 연예예술상(재즈부문)을 수상한 뒤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멈추지 않는 노력 덕분일까? 그녀는 2015년에 리더스폴 베스트 보컬로 선정됐고, 2017년에는 제25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재즈대상을 수상했다. 또 2021년에는 제27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재즈부문), 제12회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경희대 포스트모던 음악과·상명대 뮤직테크놀로지학과 겸임교수, 배재대 실용음악학과 초빙교수로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연말에 ‘사랑, 그 그리움’이라는 선물앨범을 발매를 앞둔 그녀에게 “더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재즈라는 음악을 하는 동안은 멈추지 않고 계속 도전할거에요. 수행정진을 위해서도 도전이 필요하듯 새로운 음악을 찾기 위해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가수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불자로서 노래를 통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데 힘을 보탤 수 있도록 말이죠.”하고 우문에 현답을 내놓았다.

달리는 말의 발굽이 멈추지 않듯 재즈의 길을 달려가는 웅산의 발걸음도 쉬지 않고 달려간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달리고, 가끔은 천천히 걸어갈지라도 언제나 살아 숨 쉬는 음악으로 대중의 마음에 훈풍을 불어넣고자 하는 그녀의 앞날에 항상 꽃길이 펼쳐지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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