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아닌 불교학자·저술가
미국 선불교 확립 이끌며
서구 심리학에 큰 영향 끼쳐

스즈키는 일본 선불교를 서구의 대중에게 알리는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대체적으로 심리학자는 마음의 수행에 대해 회의적이다. 영적 수행자도 대체적으로 심리치료나 심리학적 분석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이질적인 두 집단은 서로의 다른 점을 강조하고 상대를 부정하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심리학과 영적 수행이 동일한 방향을 지향한다고 보고, 두 분야의 차이점을 극복하면서 보완점을 모색하려는 심리학자와 영적 수행자도 있다. 이들은 상대를 부정할 때는 보지 못하는 상대의 장점을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선 두 집단이 함께 발전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안내자이자 개척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가 서구에 소개되었을 때 가장 먼저 그 가치를 알아보고 열렬히 환영하며 적극적으로 탐구했던 이들은 심리학자들이다. 물론 모든 심리학자가 그랬던 건 아니다. 불교를 알기 전부터 인간의 잠재력과 영적인 측면, 명상 수행의 신비로움 등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심리학자들이다. 이들의 불교에 대한 연구와 자상한 심리학적 해설은 서구의 일반 대중이 불교를 보다 잘 이해하고 별 어려움 없이 다가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이런 개척자를 대표하는 심리학자가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다. 융은 심리학과 동양의 영적 전통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유명한 종교학자 재너(R.C. Zaehner)는 융에 대해 “동양의 지혜를 해석하는 데 서양의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고 평한다. 그리고 융이라는 튼튼한 다리를 발판 삼아 선불교를 서구 사회에 빠르게 전파한 주인공이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 1870~1966)이다. 심리학자가 아님에도 그를 본 연재의 주제로 선정한 이유는 그가 서구 심리학자들에게 끼친 영향이 그만큼 지대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와 만난 스즈키.

스즈키와 융의 만남

융이 동양사상에 심취해 많은 동양학자들을 구루(Guru, 스승)로 삼아 동양의 영적 전통에 대해 배우고 있을 때, 융 연구소가 주최한 에라노스 학술세미나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두 사람은 1953년 이곳에서 딱 한 번 만났다. 이 만남이 있기 수년 전부터 서신교환으로 우정을 쌓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친분은 융이 스즈키의 책에 서문을 써주면서 시작되었다. 융은 스즈키의 선불교에 매료되었고, 비논리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을 중시하는 ‘선(禪)’이 자신이 추구하는 탈이성적 심리학의 방향성과 일치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또 선불교가 서양 물질문명 폐해의 대안으로 제공된다는 점에 매우 만족했다. 융은 스즈키의 선불교에 관한 책 〈Introduction to Zen Buddhism(선불교 입문)〉에 30페이지가 넘는 서문을 선사했다. 융은 이 글을 통해 선불교를 분석심리학의 시각으로 해석해 서구 심리학자들이 불교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스즈키는 일본 선불교를 서구의 대중에게 알리는 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임제종 사찰에서 참선 수행을 해 ‘다이세쓰(大拙)’라는 법명을 받긴 했지만, 선사(禪師)가 아닌 불교학자이다. 또 선과 대승불교에 대한 많은 저서를 펴낸 저술가이자 번역가였다. 와세다대학교의 전신인 도쿄전문대학교를 졸업한 스즈키는 27세 때인 1897년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주의 소도시에 있는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번역가·통역가·편집자로 활동했다. 이때 영어와 서양의 사상을 공부했으며, 후에 일본으로 돌아가 저술활동에 몰입했다. 만년에는 주로 서구에 머물면서 일본 선불교의 전법사로서 자신의 이론을 저서와 대중강연을 통해 적극적으로 알렸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1950년대에는 콜롬비아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이와 같이 일생 동안 저술가이자 강연가로 활동했지만, 당시 그를 추종하던 미국의 선불교도들은 그를 기독교의 성바오로에 비유하면서 성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작가 릭 필즈는 1981년 저서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이야기 미국불교사)〉에서 스즈키를 중국 선불교의 초조인 보리달마에 비유해 ‘미국선의 초조(初祖)’라고 평가했다.

스즈키는 선을 철학적으로 난해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상적인 경험과 개인의 자유로운 정신과 관련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그의 선 사상은 ‘일상성’과 ‘자유’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스즈키가 20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앞서 동양의 영적 전통을 설명하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중에게 접근했기 때문이다. 스즈키 이전에 동양사상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불교와 인도 종교를 난해한 신비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스즈키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일상의 경험과 연관해 선을 설명했다. 스즈키의 선에서 일상은 ‘평상의 나날’이라는 의미를 넘어 ‘진여(眞如)’ 즉,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뜻한다.

스즈키의 선은 실제적이고 직접적으로 삶을 향한다. 평범한 일상에 개입하거나 어지럽히는 그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그에게 선이란 삶이 흘러가는 모습 그대로를 포착하는 것이다. 그의 선에는 기이하거나 신비한 것이 없다.

나는 손을 들어 올린다. 이 책상 반대편에 놓인 책을 집는다. 창밖으로 공놀이하는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이웃한 숲 너머로 흘러가는 구름을 본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선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선으로 살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스즈키의 선은 관념으로 둘러싸인 이성의 감옥에서 벗어나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세계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해준다. 스즈키가 선의 본질을 일상생활과 연관시킨 이유는 사유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념으로 세상을 구분 짓는 경직된 마음을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스즈키에 의하면, 선은 존재의 내면에 작동하는 방식과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스즈키는 “삶의 지평이 넓어져 우주 그 자체를 담을 수 있을 때, 깨달음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영국의 작가 앨런 윌슨 와츠(Alan Wilson Watts, 1915~1973)와 만나고 있는 스즈키.

스즈끼 선불교의 역할

지난 세기 서구에서 불교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동양에서 불교가 보낸 기나긴 시간과 비교하면 한 세기 남짓한 서구의 불교는 그만큼 서구 사회 전반에 뿌리내릴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비해 불교가 서구인의 사고와 생활에 파고든 영향력의 강도는 과거 동양의 여러 나라에 전해질 때 불교가 가졌던 영향력보다 훨씬 파급력이 컸다. 이 파급력의 중심에 스즈키 다이세쓰의 선불교가 있었다.

100여 년 전 유럽과 미국에 뿌리내린 불교는 오늘날 그 위상이 엄청나게 커졌다. 불교는 19세기 끄트머리까지 일반대중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설사 아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단지 미개한 동양의 원시적인 종교의 하나로 취급 받았다. 그러나 이후 반세기만에 적어도 서구의 지식인들에게 그들이 믿고 있던 기독교의 전통에서 찾을 수 없는 새로운 방식의 종교였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는 고도로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신비함을 갖춘 종교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1970년대에는 지식인뿐만 아니라 불교를 신앙으로 여기고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을 하는 불교도를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 미국의 대도시에는 불교인들, 특히 선불교인들이 세운 공동체와 센터가 많았다. 다음은 1979년 〈뉴욕타임즈〉에 실렸던 칼럼의 한 대목이다.

한 아버지가 자신의 10대 아들에 대해 심각하게 말을 하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과 고통이 드러난다.

“그 아이는 자신이 무신론자이며 종교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죠. 이제는 자신이 불가지론자라고 말하고 있네요. 아, 솔직히 말해 저는 제 아이가 우리 가족의 종교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실망 가득한 말은 자녀가 가족 신앙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미국의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이나 유대인 부모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 이렇게 말한 아버지는 미국 태생의 개종한 불교도이다.

이 칼럼은 불교가 이미 미국의 대중에게 전혀 이질감이 없는 종교로 자리 잡았고, 하나의 사회현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1970년 후반에 이미 불교는 아시아계 이민자가 아닌 유럽계 미국인, 즉 기독교 전통의 사회에서 성장한 미국인들이 부모세대가 되어 자신이 믿는 불교를 자녀들이 물려받기 원할 만큼 자부심을 갖게 하는 종교였다. 개종한 서구의 불교도가 불교, 특히 선불교를 자신의 종교라 떳떳이 내세울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불교의 사회·문화적 위상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이미 미국과 서유럽에서 불교는 ‘가장 심오하면서도 동시에 이성적인 이론체계까지 갖춘 종교’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위상을 갖추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 게 스즈키 다이세쓰의 선불교이다.

현대 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서구인들은 더 이상 신비로움과 마법이 외부세계에 있지 않다고 믿게 됐다. 그들은 마술과 같고 신비로운 비밀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있다고 걸 느꼈다. 융은 선불교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선은 진정한 자기를 회복하고 드러나고 발견하도록 돕는다.”고 선불교를 해석했다. 융은 스즈키를 만났을 때, 영적인 차원은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탐구가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스즈키의 탁월한 점은 서구의 대중이 무엇을 갈망하는가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영적인 체험이 도그마(Dogma, 독단적 신념)나 종교집단의 제도에 의해 잠식당하지 않는 자유롭고 개인적인 성취를 얻을 수 있는 종교를 갈망했고, 스즈키의 선불교는 그것을 충족시켰다. 융의 표현에 의하면, 선불교는 “우주적인 무의식을 뚫고 나온 의식적인 마음의 성취”이다.

1962년 일본에서 미국의 작곡가 존 밀턴 케이지 주니어(John Milton Cage Jr, 1912~1992)와 만난 스즈키. 존은 선불교를 신앙하는 아방가르드 음악가로 선사상에 기본을 둔 작품을 만들었다.

오늘날 미국 속의 선불교

미국의 선불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여러 번 성장의 기간을 거쳤다. 첫 번째는 스즈키에 의해 촉발된 1950년대 ‘비트(Beat) 세대’이고, 그 다음은 1960년대 중반 ‘평화와 사랑의 세대’이다. 평화와 사랑의 세대는 베트남 전쟁과 미국 정부에 대한 전반적인 환멸을 해결해 줄 해독제로 자기 성장과 자기 이해를 추구하면서 불교에 심취했다. 물론 그 세대의 방랑자들 대부분은 이후 또 다른 사회적 자극에 동요해 불교를 떠났다. 세 번째는 무덤덤한 분위기의 1970년대가 지날 무렵 불교로 개종한 소수(50만 명)의 미국인들이다. 이들은 선불교의 가르침과 현대 미국 생활의 요구를 결합해 공동체를 이루거나 선 센터(Zen center)를 통해 불교를 전했다. 주로 뉴욕·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미국 전역에서 다양한 규모의 공동체를 이루며 정신적 수행을 하는 평범한 미국인들이었다. 30년이 지난 오늘날 미국이 300만 명이 넘는 불교도의 위상을 갖추게 된 것은 이들의 저력이라 할 수 있다.

스즈키가 세상을 떠나고 10여 년이 지난 1980년대에는 스즈키가 소개했던 선불교에 대한 비판이 학자들을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초월적 실재’에 대한 희구를 불러일으키는 스즈키의 논조는 철학자들에게 공격을 받기 시작했고, 결국 융과 스즈키가 함께 쌓은 업적에 대한 열기는 서서히 식어갔다. 하지만 미국 사회 속에 선불교는 이미 깊이 뿌리를 내린 후였다. 융을 잇는 심리학자들은 여전히 스즈키의 방식으로 선을 체험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심리학과 영적 수행을 함께 추구하는 그들에게 선불교는 중요한 수행법이 되고 있다.

문진건 -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조교수. 미국 ‘California Institute of Integral Studies(CIIS)’에서 동서양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CIIS 동서양심리학과 초빙교수(2012~2014), 미국 중독심리전문상담사(CAADAC), 동국대학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2015~2019)를 역임했다. 

동양에서 불교가 보낸 기나긴 시간과 비교할 때 한 세기 남짓 한 서구의 불교는 서구인의 사고와 생활에 파고든 영향력과 파급력이 상당했다. 그 중심에 스즈키 다이세쓰의 선불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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