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운율로 외워
노래·그림으로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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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불교계에서 학인 스님들의 설법대회와 염불대회가 잇달아 열렸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스님의 설법을 듣는 데 익숙했던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는 시간이었다. 신세대 스님들의 노래와 연행이 어우러지고 가요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아 부르는가 하면, 염불대회에 ‘랩 하는 스님’이 등장해 환호를 받기도 했다. 젊은이들과 친근하게 소통하는 불교가 되려면 스님들의 설법도 다양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데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중생 눈높이에 맞춘 설법

이처럼 ‘중생의 눈높이에 맞춘 설법’은 불교의 역사와 함께하는 것이었다. 근기가 다르고 수행이 부족한 재가자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러한 법문을 ‘속강(俗講)’이라 불렀다. 속인[俗]을 위한 가르침[講]이니, 대중설법이나 민간포교와 유사한 뜻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가 들어온 이래 저잣거리에 나가 불법을 전한 스님들이 많았듯이, 속강은 모든 불교국가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것이었다.

속강의 일인자는 단연 석가모니 부처님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유행(遊行)하는 ‘길 위의 삶’을 보냈다. 길을 걸으며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고, 대상과 상황에 따라 적절한 질문과 답변으로 가르침을 베풀었다. 수행자에서부터 왕과 귀족, 농부와 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근기에 따른 설법이었다.

특히 공양을 마친 뒤에는 늘 설법이 따랐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하루 한 끼의 탁발로 오후불식을 했는데, 점차 자신의 집으로 모셔 공양 올리기를 바라는 재가자들이 많아지자 청식(請食)을 허용했다. 이에 부처님과 제자들이 가사를 갖추고 발우를 든 채 재가자의 집을 방문하면, 가장이 발우에 음식을 담아주며 대접했다. 공양을 마치면 재가자 가족은 한쪽으로 물러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부처님은 그들에게 적합한 설법과 축원으로 공양에 답한 것이다.

최초의 경전 〈숫타니파타〉 곳곳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이들의 찬탄사가 등장한다. “경이로운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키듯, 가려진 것을 드러내듯, 방황하는 이들에게 길을 알려주듯, 어둠 속에 등불을 켜서 눈 가진 이에게 형상을 보이듯, 세존께서는 이처럼 갖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사변적이거나 복잡하지 않고, 갖가지 비유와 방편으로 상대방이 명쾌하게 알아차리도록 이끌었다. 따라서 마치 환자의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하는 듯하니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 부르고, 듣는 이의 근기에 맞추어 진리를 설하니 ‘대기설법(對機說法)’·‘수기설법(隨機說法)’이라 부른다.

스리랑카 담불라 황금사원의 석굴 벽화에 그려진 부처님과 제자들의 모습

노래에 실어 전하는 가르침

초기불교의 경전 내용은 게송(偈頌)으로 전한 것이 많다. 명료하고 소박하게 정리된 게송을 읊노라면, 마치 노래나 시처럼 저절로 리듬이 실리게 마련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문자가 없었기에 그 가르침을 쉽게 외워 전하려면 시적 운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기 경전은 음악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어, 이를 ‘인도(梵)의 소리(唄)’라는 뜻에서 ‘범패(梵唄)’라고 불렀다.

부처님의 말씀을 운율에 실은 범패는 속강의 소중한 발판이 되었다. 속강은 대중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구연(口演)의 방식을 띠게 마련이어서, 노래로 전하는 범패가 대중포교의 최일선에 서게 된 것이다. 〈증일아함경〉 ‘권청품’에는 제석천이 묻고 부처님이 답하는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문 : 무엇을 죽이면 편히 잠들고 무엇을 죽이면 근심이 없어집니까?

답 : 분노를 끊으면 편히 잠들 수 있고 분노를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 분노는 독의 뿌리이니 그 괴로움의 종자를 없애라. 고통의 종자를 없애면 근심과 두려움 사라지리니.

제석천의 질문도 부처님의 답변도, 반복되는 구절과 문장의 운율이 마치 시와 같다. 따라서 ‘분노의 뿌리를 끊으면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리라.’는 소중한 가르침이 노래처럼 쉽게 머리에 새겨질 법하다. 부처님은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약을 처방하듯 설법하고,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운율에 담아 후대에 전했으니, 초기불교의 설법에 이미 속강의 목적과 방편이 고루 담겨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기 경전의 운율을 번역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고대 중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번역할 수 있어도, 범어(梵語)의 가락은 전할 수 없다.”고 했듯이, 범어 특유의 리듬을 한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불교 또한 점차 그들 언어의 음률에 맞는 가창 방식을 만들어가게 되었고, 이러한 사정은 나라마다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날 스님들의 염불 소리가 자국의 언어와 정서를 깊이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스리랑카 이수루무니야 사원의 조각상.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마힌다 스님이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이다.

그림 활용한 이야기 구연

속강에 그림을 곁들이면 더없이 훌륭한 설법이 된다. 그림을 활용한 시청각적 설명은 예나 지금이나 이해와 흥미를 높이는 교육수단이기 때문이다. 인도에는 이른 시기부터 그림을 이용한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서 ‘이야기 구연’이 전승되었다. 십여 년간 이 분야를 연구한 빅터 메이어(Victor Mair)에 따르면, 고대 인도에서는 신과 지옥 등을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는 구연 방식이 성행했다.

초기의 구연자들은 주로 브라만 신분에 속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그림 상자를 휴대한 채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전시하는가 하면, 그림을 활용해 사람들을 교화하고 즐겁게 해주었다. 여러 장의 그림을 번갈아 보여주기도 하고, 기다란 천에 여러 장면을 그려서 말아두었다가 두루마리를 펼쳐가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갔다. 5세기의 저명한 인도 승려 붓다고사는 그림의 다채로운 예술적 특성을 찬탄하면서, 이들 떠돌이 그림 공연자들의 모습에 대해 묘사했다.

이야기 솜씨만 뛰어나도 흥미로운데, 그림을 접하기 힘든 시대에 생생한 그림까지 곁들였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따라서 그들이 그림을 짚어가며 마치 실제 눈앞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것처럼 재현하면, 관중들은 넋을 잃고 이에 푹 빠지곤 했다는 것이다. 그림자나 인형을 이용한 그림자극과 인형극도 기원전에 이미 존재했으니 인도 극예술(劇藝術)의 역사가 매우 깊음을 알 수 있다.

공연에서 가장 많이 채택된 주제는 사후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들은 환희로운 극락과 비참한 지옥을 그림으로 묘사하여 윤회설과 내세에 대해 설법하고 재가자들의 후원을 받았다. 사원 축제 때면 지옥과 관련된 그림 공연자들이 모여들었고, 이러한 전통은 2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지옥도(地獄圖)가 주는 충격과 흥미는 시대를 막론하고 교화의 방편으로 적합했던 셈이다.

이처럼 자국의 역사적 경험에 기반을 둔 서사, 구연에 적합한 운율, 그림과 인형을 활용한 연행 등은 모두 인도의 민간예술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고대 인도의 여러 종교에서 펼쳐나간 대중교화·민간포교는, 이러한 민간예술과 함께 대중의 눈높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며 공감을 얻었던 속강이었다.

미얀마의 인형극에 등장하는 스님과 병사들.

변문(變文)과 변상(變相)의 결합

나라마다 속강이 자연스레 생겨나면서, 그림을 이용한 고대 인도의 구연 방식도 중앙아시아와 중국 등에 널리 전파되었다. 불교 발생지인 인도의 문화는 서역에서 크게 유행해, 기원후 10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앙아시아는 불교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불경에 담긴 이야기를 벽화와 화폭에 형상으로 표현하고, 이를 구연의 보조도구로 사용하는 방식이 유행했다.

타림분지의 키질 석굴에는 6∼7세기에 조성된 독특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에는 부처님 당시 독실한 불자였던 아사세왕에게, 신하가 부처님의 생애를 네 장면으로 묘사한 그림을 보여주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는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에 나오는 주제로 아사세왕에게 부처님의 열반을 고하게 된 신하가, 왕의 충격을 완화하고자 그림으로 부처님의 행적을 설명하는 가운데 마지막 열반에 든 모습을 알렸다는 내용이다. 그림 설명이 등장하는 경전 내용을 다시 벽화로 그려서 이야기 자료로 삼은 ‘그림 속의 그림’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9세기경 중앙아시아 일원에 미륵신앙이 성행할 때 〈미륵회견기(彌勒會見記)〉라는 변문(變文)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속강의 구체적인 자료라 할 만하다. ‘변문’이란 산문과 운문을 섞어서 만든 이야기로, 공연의 극본과 같은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특히 이 변문은 5세기에 한역된 〈현우경(賢愚經)〉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어 조성연대는 훨씬 앞설 것으로 보고 있다.

위구르 왕국을 연구한 가바인(Gabain)에 따르면, 〈미륵회견기〉는 위구르족이 정월대보름날 사원 대중집회에 모였을 때 공연한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신도들은 집회에서 참회·시주·천도의식을 거행하고 나서 밤이 되면 설법을 듣기도 하고, 그림을 보면서 법사 스님과 배우들이 각자 역할을 맡아 대화하는 공연을 즐겁게 감상했다.

〈미륵회견기〉를 비롯한 변문은 교리에 정통한 이들이 대중을 위해 만든 것이다. 경전을 기반으로 한 다채로운 내용에 실생활에서 뽑아낸 사례를 넣어, 불교의 가르침에 흥미를 느끼게 할 목적으로 제작된 텍스트이다. 대중설법인 속강은 특정 주제를 다루더라도 설법자와 장소·목적에 따라 자유롭게 변용되는 특징을 지녔다. 따라서 대부분 문자로 기록되지 않고 구비 전승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문자화된 변문 또한 필요했던 셈이다.

변문이 청각자료라면, 시각자료는 변상(變相)이라 불렀다. ‘변상’이란 경전내용을 그림 등의 형상으로 표현한 것을 뜻한다. 따라서 커다란 그림 앞에서 필요한 부분을 가리키며 이야기하거나, 그림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변문을 구연하는 것이 속강의 중요한 방식으로 전승되었다. 모든 속강에 변상이 따른 것은 아니고, 속강 또한 텍스트 없이 연행되는 방식이 더욱 많았다. 그러나 이들 자료는 속강의 구체적인 흔적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중국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9∼10세기의 수많은 변문과 변상 또한 속강의 이해를 깊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구미래 - 불교민속학 박사. 동국대ㆍ중앙대ㆍ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등에서 불교의 의례ㆍ무형유산ㆍ세시풍속 등에 대해 강의했고, 현재 불교민속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저서로 〈한국불교의 일생의례〉ㆍ〈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ㆍ〈존엄한 죽음의 문화사〉ㆍ〈한국인의 상징세계〉 등이 있다. 

라오스 루앙프라방의 사원에 그려진 지옥도 벽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길을 걸으며 만나는 이들에게 문답설법을 하고, 길가의 숲에 누워 열반에 들며 ‘길 위의 삶’을 보낸 부처님. 태국 한 사찰의 벽에 걸린 열반상 청동 부조.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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