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앞에서 다소곳해지는 따뜻한 용맹심 배우시길”

ⓒ게티이미지

굶주린 어미 호랑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레 전에 새끼 일곱 마리를 낳은 참이었습니다. 녀석들은 나오자마자 본능적으로 젖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젖은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몇 날 며칠을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까무룩 정신을 놓쳐버리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호랑이는 모든 동물이 두려워하는 맹수입니다. 사납고 잔인하고 재빠르고도 유연하고 뒷다리로 우뚝 설 때면 그 큰 몸집에 밀림의 모든 동물들이 겁에 질려 움쭉달싹 못하지요. 밤에도 낮과 다름없이 활동하고 헤엄도 잘 쳐서 물에서도 끄떡없습니다. 그러니 굶주린 호랑이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동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너무 굶주려서 온몸의 힘이 다 빠졌습니다. 새끼 일곱 마리를 막 낳고서 굶주림에 죽어가는 이 암호랑이 앞에 토끼가 나타난들 눈앞에서 먹이를 놓칠 게 뻔합니다.

새끼를 위해서라도 무엇인가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모르게 새끼들이 버거워졌고, 그 따뜻하고 꼬물거리는 생명체에 나도 모르게 침이 고였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젊은 남자들의 목소리도 섞여서 들려왔습니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고서 흠칫 놀라는 눈치였지만 내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고서 말했습니다.

“저기 좀 봐라. 암호랑이가 새끼들을 품에 안고 쓰러져 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모양이다. 분명 제 새끼라도 잡아먹겠어.”

“형님, 호랑이는 평소 무얼 먹고 삽니까?”

“싱싱하고 더운 살코기와 피를 먹고 사는 맹수란다. 죽거나 썩은 고기는 먹지 않아. 아주 위험한 동물이지.”

저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세 남자는 형제이고, 호화롭고 의젓한 차림새로 봐서 한 나라의 왕자들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이 호랑이는 너무 오래 굶어서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 그러니 운이 좋아 사냥감을 얻는다 해도 먹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또 다른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글쎄, 누군가 제 몸을 호랑이 입에 넣어주기 전에는…….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내주기 어려운 것이 자기 몸 아니겠느냐? 누가 이 굶주린 암호랑이에게 제 몸을 내주겠느냐. 안타깝지만 그냥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신세야.”

“중생이란 끔찍하게 제 목숨을 아끼는 법이지. 굶주린 생명을 위해 제 몸을 내어주는 일은 보살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야.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위하여 평생을 살아가면서 남을 이롭게 하려고 제 한 목숨도 기꺼이 내놓는 사람이 바로 보살이거든. 우리 같은 보통의 중생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말이다.”

왕자들은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한참 내려다보더니 조용히 떠나갔습니다. 그때 막내 왕자가 홀로 내게 돌아와서 조용하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중생을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리려 합니다. 이 행동으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고 지혜로운 이의 찬탄을 받고자 합니다. 온 세상 모든 생명들이 행복하게 살고 생사의 두려움을 넘어서고 모든 번뇌를 끊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한 뒤 왕자는 내 옆에 누웠습니다. 사실 호랑이들은 인간의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굶주린 암호랑이 옆에 누운 여린 인간의 몸은 누가 봐도 최고의 먹잇감이었습니다. 침이 고였습니다. 앞발을 들어 저 몸을 내리치면 나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싱싱한 고기와 피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어린 왕자를 차마 물어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내 먹잇감으로 삼기에 이 여린 몸에서 자비로운 기운이 넘쳐흘렀기 때문입니다.

내가 꼼짝하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자 왕자는 말했습니다.

“너무 기운이 없어 나를 잡아먹지 못하는구나. 아, 그래. 피 냄새를 맡으면 식욕이 일거야. 그러면 즉시 나를 먹고 저 가여운 새끼호랑이에게도 젖을 물려줄 수 있겠지.”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날카로운 대꼬챙이 하나를 찾아 집어 들고서 자기 몸을 찔러 피를 냈습니다. 그리고 피를 뚝뚝 흘리며 높은 곳으로 올라가더니 그곳에서 내 앞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하자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 피를 핥아먹다가 어느 사이 왕자의 살을 뜯어먹고 이내 그 몸을 다 먹어치웠습니다. 여린 왕자의 몸은 이내 내 뱃속으로 사라졌지요.

그 순간 세상이 진동하고 어둠이 밀려오더니 이내 다시 향기로운 꽃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어디선가 왕자를 찬탄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왕자는 그렇게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태어난 사람이고, 이제 막 그 소망을 이루었다며 그 고결한 보살행을 찬탄하는 노랫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내가 왕자를 잡아먹었는데 이 무슨 조화일까요?

아무리 산 생명을 먹고 살아가는 호랑이라고 해도 나는 이 여린 왕자를 잡아먹지 못했습니다. 차마 그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품안에서 일곱 마리 생명이 어미젖을 핥지 못해 점점 힘을 잃어가는 판국이었습니다. 이러다 어미인 내 자신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내가 낳은 새끼를 잡아먹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이 어린 왕자는 제 몸을 내어주었습니다. 나는 차마 먹지 못했지만 끝내 먹고 말았고, 내 몸에서 젖이 돌자 새끼들이 그제야 어미의 첫 번째 젖을 빨아먹었습니다.〈금광명경〉

굶주린 내게 제 몸을 던져준 왕자를 ‘보살’이라 부릅니다. 보살은 위로는 부처님의 지혜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면서 아래로는 숱한 생명들을 돕고 구제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수행자이지요. 그렇다면 그런 보살을 희생시켜서라도 또 다른 작고 여린 생명을 살려야 하는 이 암호랑이인 나는 무엇일까요? 기꺼운 보살행의 가피를 입고서 스스로는 살생이라는 악업을 지으면서까지 또 다른 생명을 지켜내는 것이 호랑이의 운명입니다. 보살의 수행을 완성시켜주고 중생을 살려내니 나와 같은 호랑이는 중생 같은 보살이라 해야 할까요?

양산 통도사 응진전 내목도리 벽화.

호랑이의 분노

호랑이는 맹수 중의 맹수이지만 아무 때나 앞발을 들고 날카로운 이빨을 상대방 목에 꽂지는 않습니다. 아주 사악하고 그악스러운 존재를 볼 때면 솟구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응징하는 일은 호랑이의 특징입니다.

오래 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히말라야 산자락에 훌륭한 스승이 제자 500명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제자들의 학문이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스승을 잃은 슬픔과 학문을 멈춰야 하는 안타까움에 몹시 당황한 제자들에게 자고새 한 마리가 날아와 말했습니다.

“괜찮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계속 법문을 들려드릴까 합니다. 나는 스승님 곁에서 다 배웠거든요.”

이후 제자들은 작은 새의 법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비록 한 마리 새이지만 황금 새장에 황금 물그릇을 준비해서 공양을 올리며 스승으로 존경하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 자고새에게는 동물친구들도 여럿 있었는데, 특히 새끼 두 마리를 거느린 커다란 도마뱀과 사자와 호랑이와는 아주 각별했고, 그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주며 마음공부를 인도했지요.

어느 날 마을에 큰 축제가 열리자 제자들은 도마뱀에게 스승인 자고새를 잘 부탁한 뒤 모두 마을로 내려갔지요. 텅 빈 수행처에 고행자 차림의 낯선 사내가 찾아들었습니다. 도마뱀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며 말했습니다.

“수행자시여, 저곳에 쌀이 있으니 밥을 해 드시면 됩니다. 저는 잠시 나갔다 올 테니 편하게 머무십시오.”

도마뱀이 수행처를 비우자 남자는 쌀밥을 지어먹고서 도마뱀 새끼와 자고새까지 잡아서 먹어치웠습니다. 그리고 한껏 부른 배를 두드리며 깊은 잠에 빠졌지요. 곧이어 돌아온 도마뱀은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복수를 생각했지만 인간이란 워낙 잔인한 존재이기에 자칫 하다가 자신마저도 죽임을 당할 것 같아 그 길로 멀리 도망쳤습니다.

마침 그때 사자와 호랑이가 친구인 자고새 안부가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살벌한 살생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호랑이는 즉시 사내를 깨워서 추궁했는데 그는 발뺌했습니다. 호랑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자는 말했습니다.

“이 자를 멀리 쫓아 보내자.”

호랑이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질고도 현명한 자고새와 가여운 동물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먹고도 발뺌하고 부정하는 행태를 용서할 수가 없었지요. 호랑이는 결국 사내에게 덤벼들어 그를 물어뜯은 뒤 깊은 구덩이를 파서 그 속으로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며칠 뒤 돌아온 제자들은 현명한 자고새가 보이지 않자 그길로 모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자는 사리불 존자의 전생이고, 호랑이는 목건련 존자의 전생이라고 합니다.〈본생경〉

여러분은 호랑이의 분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자처럼 그저 멀리 쫓아버리는 것이 나았을까요? 아니면 선하고 어진 이를 죽인 죗값을 치르게 하느라 살생을 저지른 호랑이 행동이 타당했을까요?

우리 호랑이를 산에서 만나면 백이면 백 사람, 모두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그러다 절명하고 맙니다. 우리가 어떤 공격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지요.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있지 않나요? 이 말은 호랑이가 잔인무도하게 사람을 마구 물어서 죽여 버리는 동물은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를 만나고 싶다면 절에 가보시기 바랍니다. 절 집안 어딘가의 벽화에서 우리는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순한 모습으로 수행자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중생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고결한 깨달음의 경지와, 살기 위해 약한 자를 짓누르고 강한 자에게 아부하며 양심을 팔며 지내는 세속의 경지 그 중간에 우리 호랑이는 자리합니다. 힘을 가졌지만 함부로 부리지 않고, 진리 앞에서는 그 용맹함을 다소곳하게 내려놓습니다. 사악하거나 강한 자를 상대할 때는 온힘을 다 쓰며 무시무시한 맹위를 떨치지만 그 결기 속에 깃든 따뜻하고 순한 성품이 흰 수염을 길게 내린 깊은 산 속 수행자와 잘 어울린다고들 말합니다. 올 한 해 그런 호랑이의 기운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미령
_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사·북칼럼니스트이며, 경전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시시한 인생은 없다〉 등이 있다. 또 〈직지〉·〈대당서역기〉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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