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지가 언덕이었을지도
히말라야보다 높은
암벽이었을지도

작은 충만, 작은 기쁨이기는 했을 것이다. 딸에게 처음 받아본 작은 돈은 그냥 돈이 아니다. 딸이 상금으로 받은 그 작은 돈은 절대적 충족이며, 기쁨이며, 더할 나위없는 위로이며, 그리고 어머니에게 새롭게 등장한 희망이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어머니에게 아주 멀리 있거나 잔인하게 사라지고 없는 단어였다. 그 작은 축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 내게 있어 큰 부담으로 작용되었고, 어머니는 ‘희망’이라는 항아리에 거대한 무게를 날마다 기도로 쌓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딸의 상금, 새로운 희망

“우리 아가 상을 탓는 기라요. 나한테 상금을 덥석 준다캉께요.”

아마도 서른 번 아니 삼백 번 적어도 삼천 번은 거리에서, 장터에서 이 말을 하고 다녔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어떠한 위로도 자랑거리도 없었던 그 시절, 솥뚜껑을 엎어 놓고 호박전·감자전·부추전을 구워 동네방네 나르면서 “맛있지요?”를 연발하고 다니면서 차가운 가슴을 덥히려고 눈물 나는 노력을 했던 그 시절, 어머니의 그런 과도한 행동들은 나의 어깨를 무겁게 했으며 가파르게 숨이 차오르게 했던 것이다. 아니 아주 조금은 어머니로부터 확 뒤로 물러나 있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어머니는 딸이 당신에게 상금을 준 것을 딸이 몇 억이라도 손에 쥐어 준 기쁨으로 자신을 위로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 말도 하지 않고 정미소에서 쌀가마니를 가지고 와서는 떡집에 그대로 맡겨 호박떡과 팥떡을 만들어 동네에 나누며 “떡집에서 바로 왔다캉께요.” 이집 저집 다니며 “아이구 맛있겠다. 김이 나네요.” 함박웃음으로 답하는 사람들의 온기를 느끼려고 어머니는 한 달에 한두 번 이렇게 동네에 음식을 날랐다. 나는 이 부분에서 어머니는 절망에서도 기쁨을 길어 올리는 노력파라고 생각했었다.

온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서로 웃으며 음식을 나누는 그 순간을 통해 어머니는 영하의 가슴을 영상으로 끌어 올렸는지 모를 일이다. 어머니는 늘 말했다.

“우리 집에 문고리만 잡아도 냉수 한 그릇은 대접해야한다. 그것은 사람 사는 기본이다.”

나누는 삶을 살았던, 그렇게 해야 딸들이 복을 받을 것이란 희망을 어머니는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복은 왜 그렇게 더디고 느렸을까?

어머니에게는 평지도 언덕이었다. 편편한 평지를 걸어도 오르막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언덕도 오르막길도 아니었고, 히말라야산맥보다 높은 절벽이나 암벽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의 삶은 그러했다. 내가 상을 타고 대학준비를 하고 있을 쯤에 집에는 바로 위 언니가 누워있었다.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 병을 앓으며, 어머니의 가슴을 까맣게 타 들어 가게 하고 있었다.

언니는 마산여고를 다니고 있었다. 셋째 딸을 마산여고에 보냈고, 그 다음에 넷째 딸도 마산여고를 다니고 있었다. 그 언니는 음악대학을 가기로 담임선생님과 약속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병으로 1년을 누워있어야 했다. 이미 음악대학을 가기로 결정을 하고 있었는데, 얄궂은 운명이었을까? 언니는 결국 대학을 가지 못하고 말았다. 까맣게 타들어가 잿더미가 된 가슴에 다시 불을 질렀던 것이다.

사실 아버지도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딸들은 아버지의 상처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돈 많고 친구 많고 여자 많으니, 모두가 아버지는 다 잘 풀리는 사람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래서 더 외로웠고, 그래서 더 밖으로 돌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외로웠고, 집에서 자꾸 멀어졌다. 결국 비통한 사람이 어머니였다. 자식의 일은 자꾸 꼬이고, 남편은 자꾸 멀어지니 어머니는 발을 땅에 붙이고도 흔들거렸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주 “행동은 개떡이면서 말은 비단실처럼 줄줄 풀어 놓는다.”고 아버지의 아픈 곳을 지적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인간적 신뢰가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정미소 큰솥에 옥수수를 삶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솥을 그대로 들고 와서는 딸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시곤 했는데, 이때 옥수수를 먹던 볕바른 가을마루에 앉아 곧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하늘은 높고 푸르러 가을이 마당을 가득 채운 날이 많았다.

아버지의 개떡 인생

아버지는 스무 살 때 진주시장에서 지금의 어느 최고 기업 창업자와 포목장사를 하셨다. 그때의 이야기를 한 천 번은 들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어쨌든 참 많이도 들었고, 아버지는 그 기억을 행복하게 말하는 것을 즐기셨다. 자신의 상술(商術)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 사람은 그때 당신 덕에 부자(富者)의 길로 들어섰다고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자기도취에 빠지곤 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라면 비단장사는 ‘즐거운 속임수’를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악랄한 속임수’는 색이 검지만 ‘즐거운 속임수’는 분홍빛”이라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즐겁게 이야기하셨다. “장사꾼은 비단을 사는 손님의 마음의 흥분을 잘 이용해야 하고, 실제로 비단의 장점을 잘 이해시키면서 엄지손가락만큼의 속임수를 즐겁게 사용해야 고수”라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이익을 보면서도 손님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업가는 아버지를 최고의 장사치라고 말하며 “너는 평생 내 옆에 있어라.”하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려줄 때 아버지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고, 늘 마지막엔 우수에 잠기시곤 했다. 그분과 인연은 아버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끝났고, 아버지는 그 ‘즐거운 속임수’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겉은 번드레하지만 속은 아픈 사람으로 일생을 사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은 절실할수록 더 활발해졌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아버지는 사업에 몰입하셨고, 아버지의 사업은 크게 확장했다. 나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돈은 있었지만 사랑은 없는 집”이라고. 가족들은 다 허전해 했고 집안은 늘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의 말대로 과연 아버지의 인생은 개떡이었을까? 가을이 되면 마당 넓은 한옥 집을 그리워하며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하신 아버지, 내가 봐도 아버지의 인생은 실패에 더 가깝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던, 천생 시인이었던 아버지는 사랑을 해도 헤어질 줄을 몰라 인생은 더 꼬이고 복잡해졌다. 그래서 어머니의 인생을 평생 오그라들게 했다. 말만은 비단실이었다는 것은 나도 안다. 자신의 실패를 넘어서려고 타고난 언변을 들으면 모두 혹했던 그 말솜씨는 비단을 능가하게 부드럽고 논리적이었지만 자신의 인생은 억새풀처럼 살을 베이고 살았다.

일생 일기를 쓰신 아버지의 그 감성은 아버지의 마음도 인생도 달래진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생 일기를 썼다고 생각된다. 사람도 여자도 딸도 많았지만 아버지는 일기장 종이에게만 자신을 쏟으며 일생을 마감하셨다. 아버지의 생에서 가장 가깝게 대했던 대상은 아마 종이일 것이다. 반면 외로움은 아버지에게 가장 무서운 호랑이었을 것이다. 외로움을 피하려고 가능한 피해보려고 찾았던 손[手]들은 실상 아버지의 외로움을 더 아프게 했던 싸늘한 바람들이었던 셈이다.

“삿갓하나 쓰고 돌아다니면 좋겠다.”며 아버지는 가을하늘을 우러르며 혼잣말을 하셨다. 아버지의 마음의 방황을 그땐 나도 개떡으로 알았지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아버지의 외로움이 내 어린 가슴에까지 비단실처럼 감겨온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구박받던 다섯째 딸

나는 어머니에게 잘못 태어난 딸이었을까? 반드시 태어나야만 하는 딸이었을까? 나는 다섯째 딸로 태어나 구박을 많이 받았다. 핏덩이가 구박을 받았다면 어머니는 오죽했겠는가? 다섯째가 딸로 태어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죽겠다고 다부진 결의를 하셨던 어머니를 배반하고 나는 딸로 태어났다. 어찌 그것이 내 잘못이란 말인가?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부엌에서조차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아버지의 다른 여자를 볼 수밖에 없었다. 피가 끓었지만 견디었다. 딸만 낳은 어머니는 그때 인간도 아니었으며, 아내도 아니었으며, 며느리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아니었기에 짐승 같은 구박을 받으면서도 그곳에서 살 수 있었다. 노예처럼 거기 그대로 살아만 있게 해달라는 그런 처참한 모습으로. 죽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타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그리 쉬웠겠는가.

“정말 딱 눈감았으면 했지…….”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셨다. 이제는 알겠다. 그래, 알고말고. 죽고 싶었겠지. 콱 눈감아 버리고 싶었겠지. 사실 그렇게 시도한 적도 몇 번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내가 더 구박을 받은 것은 생일이 음력 사월초파일, 그것도 태어난 시간까지 사시(巳時)로 부처님을 그대로 닮았기 때문이다. “아들이면 얼마나 좋았을 꼬.” 입 가진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는 것이다. ‘그깟 딸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월초파일에 태어난 딸을 귀하게 생각하셨다. 마치 그것이 무슨 뜻이라도 있는 것처럼, 부처님에게 귓속말로 잘 키우라는 귀띔이라도 들었는지 어머니는 내가 세 살 때부터 생일날이면 절에 데리고 가 절밥으로 생일 아침밥을 먹게 했다.

생일날이면 절밥을 먹은 게 딱 열두 살인가, 열세 살까지인데 어머니는 마음으로 그것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벼르셨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전쟁이 나서 두어 해 절에 가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그것까지 보태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10년 동안 절에 데리고 다니셨다.

나는 새해가 시작하거나 아주 좋은 날, 어머니 손을 잡고 들판을 건너 절을 향해 걸어가던 그 시간을 떠올린다.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사랑받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머니 말씀인즉, 딸이 너무 큰 날 태어나 절밥을 먹여 액땜을 한다는 뜻이 하나 있었고, 또 하나는 부처님 빽이라도 써서 진정으로 좋은 날 태어난 딸을 잘 키우게 해달라는 바람이었다고 했다. 자라면서 늘 듣던 이야기다.

생일날 먹은 절밥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무렵 절밥을 먹은 것은 지금도 기억나는데 당시 절밥을 왜 바가지에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릇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바가지에 담긴 나물과 하얀 쌀밥을 잘도 먹었다.

어머니는 한 숟가락이라도 남기면 야단을 쳐서 마지막까지 깨끗하게 먹어야 했다. 밥을 먹을 때 어머니는 주변 아주머니, 할머니들에게 반드시 자랑삼아 말씀을 하셨다.

“야가 오늘이 생일인 기라요.”

그러면 주변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한 숟가락씩 밥을 덜어주며 “아이구, 좋은날 태어났구나. 복 받겠다.”며 내 어깨를 토닥여주시곤 했다. 나는 무슨 상이라도 탄 것처럼 으시대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서는 누구도 날 알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열두서너 살 때까지 나는 절밥을 먹었다.

그 이후 무슨 이유였는지 절에 가지 않았다. 나 역시 생일날 절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하면서 나에게 절은 조금씩 멀어졌다고 기억한다.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친구들과 절에 간 적이 있는데 친구 한 명이 탱화를 보다가 기겁을 하면서 무섭다고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 그림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잘은 모르지만 곡진한 예술의 깊이가 거기 담겨있다고 느껴졌다. 어린 날부터 절에 다닌 익숙함이나 그 예술의 가치가 나를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섭지 않았고, 고요했다. 거기 뭔가 내가 생각하는 언어와 명상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그림들도 내가 어린 날 절에서 먹은 밥처럼 나의 내면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도사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곳이 편안했다면, 그래서 어떤 안식을 느꼈다면, 아니 머리를 조아리고 싶었다면 그것은 내 안의 절밥 같은 말씀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린 날 어머니와 손잡고 절로 향하던 그 들길을 생각한다. 부엌에서 정갈하게 목간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흰 고무신을 신고, 나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었던 들과 논둑길은 내 생에 있어서 가장 앙증맞고 예뻤던 기억이 아닌가 싶다. 좋아하기만 하고 먹기만 하고 졸졸 어머니만 따르면 되는 그런 천국이 내게도 있었던 것이다. 그 아름답던 한복차림의 젊은 어머니, 그리고 하얀 코고무신의 예쁜 걸음걸이를 생각하면 내 얼굴은 지금도 햇살처럼 환해진다.

나는 생일날 아침 식탁에서 반드시 어린 날 절에서 먹던 바가지의 절밥을 떠올린다. 그리고 누군지도 모르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한 숟가락씩 덜어준 밥을 떠올린다. 나는 결코 그 한 숟가락의 밥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밥이 아니라도 어느 다른 방식으로 나는 그 아주머니, 할머니들의 핏줄의 핏줄의 핏줄에게 지하철 같은 곳에서 자리라도 한번쯤 양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무엇으로라도 갚고 나는 세상을 떠나고 싶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한 숟가락의 밥들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말씀들이었는지를 지금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때 나에게 절은 아마도 학교였을 것이다. 태중에서 얻는 지식처럼 세상을 모르면서 세상의 덕을 공부한 것은 아닐까? 그때의 절은 나에게 종교는 아니었을 것이다.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고, 예술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 될 것을 설명한다고 하지 않는가?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고 들었다. 신이란 증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체험하는 존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절에서 사랑을 배웠고, 그 사랑은 오래 오래 기억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의 나눔도, 아버지의 외로움도, 딸들이 그리워한 가정화목도 서로 소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람에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을 이루기 위해 간절함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어린 날 아주머니들이 한 숟가락씩 떠 넣어 주는 하얀 밥으로 내 뼈와 살이 먼저 깨닫고 있었는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성장의 부리라고하면 과장일까?

엄마! 이 단어를 떠올리면 젊고 예쁜 엄마가 옆에 있을 것만 같다. 엄마 손잡고 절에 가고 싶다.

신달자
_ 시인.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첫 시집 〈봉헌문자〉를 비롯해 수필집 〈나이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을 펴냈다. 만해대상 문예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공초 오상순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부문),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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