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배종훈〉

실재성 모호한 한산자
불교적 가치관 아래
풍부한 인생 경험 담아

한국의 옛 선시(禪詩)로부터 현대시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중국의 불교시가 있다. 이는 중당시대(中唐時代, 766~835) 선비 계층의 인물로 오랜 방황을 거듭한 끝에 정신적 이상향에 정착한 한산자(寒山子)라는 전설적인 은자가 지은 시로 보인다. 그가 천태산(天台山)의 나무와 바위에 써놓은 시를 국청사(國淸寺)의 스님이 편집했다고 전해지는데, 바로 〈한산시(寒山詩)〉이다. 한산자가 지었다고 전해오는 300여 수 외에 풍간(豊干)의 작품 2수, 습득(拾得)의 작품 50여 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삼은(三隱) 시집’이라고도 불린다.

한산자라는 인물의 실재를 시사하는 신빙성 있는 전기적 증거는 거의 없다. 또한 습득도 실재의 인물이 아니고, 한산자의 시에서 누락된 부분을 편집자가 찾아내었다는 의미로 ‘습득(拾得, 주워서 얻었다는 뜻)’이란 이름을 붙였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어떻게 보면 한산시 전체가 여러 사람의 합작품일 가능성도 있다.

여러 문헌적 자료를 보면 한산자는 과거에 응시하여 영달을 원하였으나 그 꿈은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중당 시기는 중국의 절반에서 전란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던 혼란한 때였다. 그는 강남(江南)으로, 북쪽의 국경으로 방랑을 거듭하였으며 도가(道家)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했다. 이런 방황의 가운데 그는 혼란하고 오염된 세상을 떠나 은둔의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불교에 기울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불교적 입장에서 도교의 허망함을 고발하기도 한다.

선약(仙藥)을 만들어 신선이 된다는 것, 그것은 중국 도교의 큰 특징이었는데 중당 시대는 연금술(鍊金術)의 전성시대였다. 중국 연금술의 목적은 불로장생(不老長生)의 단약을 만드는 데 있었다. 그러나 몇 사람의 황제가 단약에 의한 중독으로 사망하는 등 도교의 허망함이 실천적으로 폭로되었다. 불교 시인이었던 왕유(王維)와 백거이(白居易)는 도교의 연금술에 맹렬한 비판을 가했으며, 한산자 역시 도교의 주술성 비판을 통해 불교 신자로서의 자신을 확립하게 된다.

불교 신자가 된 한산자는 체제적인 사원불교에도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그가 믿는 불교는 귀족적 불교인 사원불교가 아니었던 것이다. 불교문학으로서 ‘한산시’의 진정한 가치는 풍부한 인생 체험을 기초로 하여 세태와 인정을 교묘히 노래하여 모르는 사이에 독자를 깊은 깨달음으로 유도하는데 있다. 그러면 이제 김달진(金達鎭) 선생이 역주(譯註)하고, 최동호 교수가 해설을 붙인 한산시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한산시 1

이제 내 시를 읽는 그대들이여!
모름지기 마음 속을 깨끗이하라.
탐욕은 날을 따라 청렴해지리.
아첨은 때를 좇아 바르게 되리.
휘몰아 모든 악한 업(業)을 없애고
부처님께 돌아가 진성(眞性)을 받자.
오늘 이 생(生)에서 부처몸 이루기를
빨리 서둘러 꾸물대지 말아라.

凡讀我詩者 心中須護淨
慳貪繼日廉 諂曲登時正
驅遣除惡業 歸依受眞性
今日得佛身 急急如律令

한산시의 서시에 해당한다. 자신의 시를 마음 속 깊이 읽어서 탐욕을 멀리하고 아첨하지 말고 정진하여, 악한 업을 없애고 진성(眞性)을 받아 살아 생전에 부처가 되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한다.

한산시 10

하늘이 백척되는 나무를 내어
추리고 다듬어 큰 재목 되었네.
아까워라, 저 동량(棟梁) 될 재목이
깊은 골짝에 버려진 채 있구나.
나이는 많으나 마음은 굳센데
때가 오래어 가죽은 벗겨졌구나.
그래도 아는 이 있어 가져다 쓰면
아직도 외양간 기둥은 됨직하리라.

天生百尺樹 剪作長條木
可惜棟梁材 抛之在幽谷
年多心尙勁 一九皮漸禿
識者取將來 猶堪拄馬屋

하늘이 큰 재목감을 냈으나 이 세상엔 그 쓰임새를 알아서 쓸 안목이 없음을 비유한 시다. 그러나 이 시에는 다가올 하늘의 뜻을 좀 더 오래 기다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아는 이 있어 가져다 쓰면 아직도 외양간 기둥은 됨직하니까 ······.

한산시 34

두 거북이 송아지 수레 타고
거리에 뛰어나와 놀고 있었다.
어디서 전갈 한 마리 곁에 다가와
태워주기를 청했었다.
태워주지 않다가 정에 못 이겨
태워주자 이내 쏘아 죽였다.
태우다니 애당초 말이 아닌걸,
은혜를 베풀다 도리어 쏘이었으니.

兩龜乘犢車 摹出路頭戱
一蠆從傍來 苦死欲求寄
不載爽人情 始載被沈累
彈指不可論 行恩却遭刺

1구(句)의 두 거북은 지혜와 선정(禪定)의 두 법을 비유하고, 송아지 수레는 성불(成佛)의 수레, 3구의 전갈 한 마리[一蠆]는 번뇌를 비유한 것이다. 정진의 과정에 전갈과 같은 저해 요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성불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최동호 교수는 해설했다. 그러나 인간사에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한산시 48

한 번 한산에 들어가 앉아
어느덧 삼십 년 흘려 지났네.
이제 돌아와 친구들 찾았더니
거의 반이나 황천(黃泉)의 손이 됐네.
차츰 줄어들어 남은 촛불 같거니
길이 흘러흘러 가는 강물 같구나.
새삼 외로운 그림자 마주 앉으니
두 줄기 눈물 절로 흘러내리네.

一向寒山坐 淹留三十年
昨來訪親友 太半入黃泉
漸減如殘燭 長流似逝川
今朝對孤影 不覺淚雙懸

줄어드는 촛불이나 흘러가는 강물은 모두 사라져 없어지는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한산에 들어온 지 어느덧 삽십 년, 옛 친구들 거의 반이나 황천으로 가고 외로운 그림자와 홀로 마주 앉으니, 진정 깨달음의 길은 멀고 멀구나. ‘향수’의 가수 이동원 씨의 부음을 듣고 읽어본 한산시 한 편이 가슴을 친다. 그 옛날 한산자의 심경도 오늘 나와 같았으리라.

〈삽화=배종훈〉

한산시 54

복숭아꽃이 여름을 지내자 해도
시절이 재촉해 기다리지 않나니,
한(漢)나라 때 사람을 찾고자 한들
지금에 어디 한 사람 있으리.
꽃은 아침마다 시들어 떨어지고
사람은 해마다 변해서 늙어가네.
지금에 먼지 이는 저곳도
옛날에는 일찍이 큰 바다였느니라.

桃花欲經夏 風月催不待
訪覓漢時人 能無一篙在
朝朝花遷落 歲歲人移改
今日揚塵處 昔時爲大海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있듯이 시간은 모든 것을 그냥 두지 않는다. 바다가 변해 먼지 이는 땅으로 되었는데 한철 피는 복숭아꽃은 일러 무엇하랴. 천수백 년 전의 한산의 시가 오늘의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조그만 위안이라고나 할까.

한산시 205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느니라.
마치 나무가 땅을 의지하는 듯,
땅이 두터우면 나무 무성하고
땅이 얕으면 나무 또한 여위나니,
부디 그 뿌리 드러나게 하지 말라.
가지 마르면 열매 먼저 떨어지리.
둑을 무너뜨려 고기 잡는 것,
그것은 한때의 이로움을 찾는 것이니.

國以人爲本 猶如樹因地
地厚樹扶疎 地薄樹憔悴
不得露其根 枝枯子先墜
決陂以取魚 是求一朝利

한산시 중에서는 드문 소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1구의 국이인위본(國以人爲本)은 〈서경(書經)〉의 ‘오자지가(五子之歌)’에 나오는 말인데, 유교의 근본이념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지금 읽어봐도 그대로 공감이 오니 만고불변의 진리를 담은 명시라고 하겠다.

한산시 281

내 이 세상에 난 저 삼십 년 그 동안에
헤매어 돌기 천만리로 놀았다.
강으로 나갔더니 푸른 풀 우거지고
국경에 이르매 붉은 티끌 아득했다.
헛되이 약 만들어 신선도 구해보고
부질없이 시도 짓고 책도 읽었다.
이제 비로소 한산으로 돌아와
개울을 베고 귀를 씻노라.

出生三十年 常遊千萬里
行江靑草合 入塞紅塵起
鍊藥空求仙 讀書兼詠史
今日歸寒山 枕流兼洗耳

8구는 허유(許由)와 손초(孫楚)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허유는 요임금이 자기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려 함에 냇가로 가서 불쾌한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귀를 씻었다 한다. 또 진나라의 손초가 젊었을 때, 숨어 살려고 황제에게 가서 ‘돌을 베개하고 개울물에 양치질하고 싶다.’고 한 말이 잘못되어 ‘물을 베개하고 돌에 양치질하겠다.’고 했다. 이에 황제는 ‘물은 벨 수 없고 돌은 양치질할 수 없다.’고 질책했다. 그때 손초는 ‘물을 베는 것은 귀를 씻고자 함이요, 돌에 양치질하는 것은 이를 단련하고자 함’이라 했다고 한다.

한산시는 오언시(五言詩)가 대부분이다. 시체(詩體)는 악부(樂府)에 가까운 고시(古詩)다.

불교는 시적 전통이 강한 종교다.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하신 뒤에 그날 말씀의 정수(精髓)를 한 편의 게송(偈頌)으로 읊으셨다. 게송은 곧 시다. 그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스님들은 생애에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은 남긴다.

한산시 374수는 현대인이 읽어도 감동이 그대로 전해오니 시대를 넘는 명시(名詩)라고 하겠다. 이 시들이 오랜 세월 끼쳐온 불교적 영향력은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 언어의 구슬들로 엮은 한산시 마지막은 습득의 시로 이렇게 끝난다.

멀리 바깥 세상 성(城) 있는 곳 바라보면
오직 들리나니 시끄럽고 떠들썩한 소리뿐이네.

望遠城隍處
唯聞鬧喧喧

유자효
_ 시인. KBS 유럽총국장·SBS 이사·한국방송기자클럽회장을 역임했다. 시집 〈신라행〉·〈세한도〉·시집소개서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번역서 〈이사도라 나의 사랑 나의 예술〉을 펴냈다. 공초문학상·유심작품상·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사)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 지용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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