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호

건흥오년명 석가삼존불 광배, 고구려 596년, 금동, 높이 12.4cm, 충청북도 충주 노은면 발견, 국립중앙박물관 M335-6.

불상에 새기고 경판에 녹여낸
지극하고 절실한 바람[發願]의 기록

소원은 누구에게나 있다. 생일날 케이크 촛불을 끄며 소원을 빌기도 하고, 정월대보름에 달을 보며 소원을 빌기도 한다. 요즘 우리의 공통된 소원은 하루빨리 코로나19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원, 즉 간절한 바람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소원 가운데 불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 또는 한 사회의 바람을 ‘발원(發願)’이라고 하는데, 이 바람을 글로 남긴 것이 ‘발원문(發願文)’이다.

불사(佛事)는 사찰이나 석탑을 건립하거나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고 의식을 행하는 일이다. 예부터 많은 불자들이 불사에 적극 참여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를 통해 공덕을 쌓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공덕을 쌓아 이루려던 소원을 발원문에 담았는데, 그 중 상당수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국가와 사회의 평안을 기원하고, 살아서는 건강하며 죽어서는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바람은 우리 시대의 소원과도 동일하다.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 사리구, 통일신라 692~702년, 경주 구황동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발원문의 기원, 불상 조상기

불상에 새기는 명문(銘文) 또는 조상기(造像記)는 발원문의 시원(始原)적인 형태이다. 인도의 마투라(Mathura) 지역은 불상이 처음 조성된 곳 중 하나로 고빈드나가르(Govindnagar) 출토 ‘아미타불 대좌(쿠샨, 2세기)’에는 후비스카 나가락시타(Huvishka Nagaraksita, 152~192)가 “모든 부처님에 대한 숭배를 위해 아미타불의 상을 세웠고, 이러한 공덕의 뿌리를 통해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최상의 지식을 얻기를 바란다.”고 기록하였다. 불상의 조성연대, 발원자, 불상의 존명, 발원 내용을 기록한 아미타불 대좌의 형식은 이후 불상의 조상기나 불교미술의 발원문과 맥락을 같이 한다.

불상의 조성 기록을 남기는 전통은 중국에서도 널리 유행했다. 중국의 석굴사원이나 금동불 등에 기록된 수많은 명문은 제작연도, 제작 목적, 발원의 내용을 알려준다. 명문의 내용은 돌아가신 부모나 가족의 명복을 비는 내용이 많은데, 특히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는 천(天)·미륵이 있는 도솔천 또는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기원했다. 중국 쓰촨박물원(四川博物院) 소장 ‘미륵불·무량수불비상(483년)’의 명문처럼 일체의 중생이 삼보(三寶)를 믿고 십선(十善)을 지켜 용화삼회(龍華三會)에서 미륵을 만나 불도를 이루기를 기원하는 내용도 조상기에서 많이 보이는 문구이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불상 조상기를 살펴보면 인도나 중국처럼 불상 광배 뒷면이나 대좌 등에 글씨를 새겨 당시 불사에 참여한 사람, 조성 연도, 제작 목적 등을 기록했다. 삼국시대 불상의 명문은 6세기 중국 남북조시대의 불상 명문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반적으로 불법을 널리 퍼뜨리고자 불상을 조성했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기원하며 다시 태어나면 부처를 만나 법을 듣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충청북도 충주 노은면에서 발견된 ‘건흥오년명 석가삼존불광배(596년)’ 뒷면에는 5행 39자의 명문이 남아있다. 건흥 5년 여성 불자인 아엄(兒奄)은 석가모니불상을 만들며 내세에는 부처를 만나 법을 듣겠다는 구체적인 소원을 빌고 자신이 소원한 바를 일체중생과 함께하기를 희망했다. 발원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원인 동시에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깨달음을 기원하는 대의(大義)를 담고 있다. 즉, 발원은 한 사람의 개인적 소원과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서원이다.

〈묘법연화경〉 권 7, 고려 1283년, 감지에 은니(경문), 금니(변상), 권자본. 31.1×841.1cm.

국가와 왕실이 주도한 불사와 발원문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불교는 중앙집권적인 국가 형성의 기반을 마련한 정신적 구심점으로 대규모 불사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사찰을 건립하거나 탑을 세우는 대규모 불사는 국력을 과시하거나 국왕의 권위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특히 석탑 안에서 발견된 화려한 사리구(舍利具)는 고대 국가에서 가장 큰 불사의 후원자가 왕실임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륵사지 석탑 사리구이다. 미륵사지 석탑 심초석 사리공에서 발견된 ‘미륵사지석탑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 639년)’에는 전면에 99자, 후면에 94자가 새겨져 있다. 기존의 불상이나 사리기 명문에는 제작연도와 발원자의 소원을 짧게 기록한 것과 달리 미륵사 창건을 후원한 백제 왕후가 사리를 봉안하며 발원하는 내용이 형식을 갖추어 기록되었다. 사리봉영기는 부처님 사리의 신이함, 자신의 재물을 희사하여 사찰을 세운 왕후의 사리 봉안 기록, 그리고 왕과 왕후의 무병장수와 중생들의 성불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왕의 수명이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는 영구하며 위로는 정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 모든 사람)을 교화하기를 기원했다. 왕후의 마음이 거울과 같이 법계를 비추어 영원히 밝게 하고, 몸은 금강과 같이 불멸하기를 바라며, 중생들이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해달라는 발원이다. 왕실의 평안과 안녕, 그리고 중생의 깨달음을 기원하는 발원은 고대 국가에서 국왕의 권위를 확립하고 국력을 결집하기 위한 공적 영역의 발원이었다.

당시 사찰의 건립은 일종의 국가적 대의를 위한 것으로 신라의 분황사·황룡사·감은사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 사리구 사리외함(706년)’ 뚜껑에는 죽은 신문왕(神文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목태후(神睦太后)와 효소왕(孝昭王)이 692년 석탑을 세우고, 신목태후와 효소왕이 승하하자 이들의 명복을 기원하고자 성덕왕(聖德王)이 사리구를 봉안했다고 기록했다. 죽은 선왕에 대한 명복을 기원하며 사리를 봉안한 것은 기복·추복을 위한 신앙적 의미와 함께 일종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정치적 의미도 담고 있다.

재조본 〈경률이상(經律異相)〉 권8, 고려 1243년, 목판본, 절첩본, 31.0×12.3cm, 보물, 2003년 송성문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국난 극복을 위한 불사와 발원문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불교의식과 행사를 개최하면서 중앙 관료와 귀족 등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의 불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외세의 침략이 잦았던 고려는 국가 차원에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대규모 불사도 진행했다. 대장경은 거란과 몽고의 침입으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진 고려 왕실에서 불법을 유포해 공덕을 쌓고 부처님의 힘으로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려는 대의를 담고 있다. 11세기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간행한 첫 번째 초조대장경이 1232년 몽고군에 의해 불타자 고종은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세우고 대장경을 조판했다. 국왕은 외침을 물리치고 모후와 태자의 만수무강과 국운을 유지할 수 있기를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 삼십삼천 호법신중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이 같은 국왕의 간절한 발원문은 이규보(李奎報)가 1237년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남아있다.

목판으로 찍어내는 대장경과 달리 고려시대 사경(寫經)은 금과 은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다.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고, 경전을 옮겨 쓰는 사경승(寫經僧)이 작업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드는 불사 중 하나였다. 주로 왕실에서 건립한 사찰이나 개경 인근 사찰에서 사경이 이루어졌는데, 충렬왕(忠烈王)에서 충숙왕(忠肅王)대에 이르는 국왕 발원 사경은 국난 극복이나 국가 수호의 목적을 담은 밀교계 경전이 많았고, 왕실 발원 사경 첫머리에 신장상(神將像)을 그려 넣었다.

아미타삼존불상, 고려 1333년, 금동, 높이 69.1cm(아미타불), 87.0cm(보살상), 국립중앙박물관.

개인 발원 불사와 발원문

국가나 왕실이 아닌 개인이 발원한 사경은 왕실 발원 사경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개인이 공덕을 쌓고, 평안을 추구하고자 행한 개인 발원 사경은 대중적으로 유행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또는 〈화엄경(華嚴經)〉을 옮겨 쓴 사례가 많다. 사경 첫머리에 변상도로 불보살뿐만 아니라 경전의 내용 중 서사적인 장면을 그려 넣기도 했다. 간혹 염승익(廉承益, ?~1302)과 같은 세도가는 국왕이 아님에도 국왕 발원 사경의 형식을 따라 첫머리에 신장상을 그려 넣고, 1행 14자의 국왕 발원 사경 형식을 따른 사경을 시도하기도 했다. 개인 발원 사경은 경문이 끝나는 곳에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자신의 신상과 관련된 개인적인 소원을 구체적으로 담기도 했다. 염승익이 발원한 〈묘법연화경〉에서 그는 자신이 죽은 후 아미타불을 만나 극락왕생하길 바라면서, 아내 노씨(魯氏)와 아들딸의 장수를 바랐다.

시대적 배경과 발원자의 성향에 따라 발원문의 표기방식도 달라지는데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원간섭기(元干涉期, 1260~1350)에는 권문세족이나 친원세력이 주요 후원자로 등장한다. 특히 호림박물관 소장 국보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 1334)’을 발원한 안새한(安賽罕)처럼 친원계이거나 원나라에 가서 품계와 위계를 받았던 인물들의 발원문에는 ‘황제만년(皇帝萬年)’, ‘황제만세(皇帝萬歲)’, ‘황제(皇帝)’, ‘황태후(皇太后)’ 등의 단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원나라 황실에 대한 안녕을 기원하는 문구를 점차 상투적으로 표기하고, 황(皇)자를 한 칸 올라오게 썼다.

관음보살좌상, 높이 45.7cm, 조선 1763년, 국립중앙박물관.

발원 계층과 발원문의 변화

계층에 따라 제한이 있던 불사의 영역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4세기에는 재가신도의 경제력이 중시되면서 호족과 같은 지방 행정 관료와 승려, 여성이 주도하는 불사가 일어났다. 고려 후기부터 13세기까지는 재가신자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회적인 신분을 우선 적용했으나, 14세기가 되면서 이들의 물질적인 재원인 재시(財施)의 행위가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왕실이나 귀족만큼의 재력은 아니어도 지방의 향리나 향도, 승려들도 경제력이 있으면 불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불상을 조성할 때 수많은 시주자들이 비단 또는 종이로 된 발원문에 불상을 조성한 경위와 자신들의 이름을 써서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는 13세기부터 여러 물건을 불상 안에 넣는 복장의식이 유행하며 후원 계층이 확대된 것과 관련이 깊다. 불상 발원문에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열반·극락왕생 등의 바람을 강조했지만, 때로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소원을 빌기도 했다. 후원자들의 이름은 발원문에 기록됐고, 이들이 직접 서명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아미타삼존불의 ‘복장발원문(1333년)’에는 주복장(主腹藏) 비구 오회(烏廻)의 주관 아래 복장에 참여한 수많은 인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조지경(趙之璟)·이천보(李天輔)·최연(崔連)처럼 성씨가 있는 인물들과 길덕·만덕·어리가이·금이·물금처럼 성씨가 없는 평민들의 이름이 함께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이 발원문에는 연기법송(緣起法頌)이 적혀 있다.

‘문수사 아미타불좌상 불상조성발원문(1346년)’에는 개인적인 발원보다 불심이 깊은 사람들이 함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200여 명이 발원한 ‘복장발원문’에는 불사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불상 조성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불상의 내부 빈 공간에 납입할 물목이 늘어나 점차 더 많은 사람이 불상 조성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좌상 발원문, 조선 1763년, 종이 41.0×94.0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발원문의 체계화

조선시대에는 불상 조성에 관한 여러 경전을 모은 〈조상경(造像經)〉이 복장물 납입방식의 규범서로 자리 잡으면서 복장물 납입방식의 절차가 확립되었다. 발원문에서 깨달음·성불·극락왕생 등을 기원하는 내용은 크게 변함이 없지만, 조선시대 불상이나 불화의 발원문은 형식이 정형화되었다. 이 시기 발원문에는 불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한 사람을 의미하는 시주질(施主秩)과 불상 제작 실무를 수행한 사람을 뜻하는 연화질(緣化秩)을 구분하여 기록했다. 조선후기가 되면서 불상을 제작하는 조각승과 불화를 제작하는 화승 등 사원을 중심으로 승려들의 활동이 늘어났고, 경제적 후원자로 양인들의 참여가 증가했다. 소박한 양인들이 불사에 참여하면서 국태민안처럼 거국적인 기원이 아닌 무병장수나 극락왕생, 아들을 갖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도 발원문에 명시했다.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반환된 ‘관음보살좌상 발원문(1763년)’에 따르면 관음보살상은 비구 양제(亮濟)· 이복경(李福慶) 등이 후원했고, 취겸(聚謙)이라는 승려가 조각했다. ‘관음보살좌상 중수발원문(1855년)’은 〈조상경〉에 따라 푸른 비단에 주서(朱書)로 원문(願文)을 쓴 사례이다. 대시주는 계월당 지명(桂月堂智明), 제작에 참여한 사람은 수봉당 법총(秀峰堂法聰)과 중봉당 혜호(中峯堂慧皓)로 승려들이 불사를 주관했다. 발원문에는 대원을 세우고 불상을 조성해 성불하고자 하는 바람과 함께 질병·요절·도적·반란·감옥·맹수·독충·익사·화마·천둥과 벼락 등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피하고 싶은 인생의 고통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순천 송광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 개금 당시에 발견된 복장물 중에는 △저고리 △시주자 명단 △황초폭차에 싸인 후령통 △청색 유리편 △직물조각 △전적 △다라니 등이 있다. 이 중 남색 명주저고리 안쪽에 먹으로 쓴 발원문이 적혀 있는데, 1662년(현종3) 정월 나인 노예성(盧禮成)이 발원해 관음보살상을 조성했으며,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삼남 경안군(慶安君, 1644-1665) 부부와 동료 나인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발원문에는 짤막하게 경안군 부부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있지만 이 발원문은 파란만장한 경안군의 삶을 함축하고 있다. 경안군의 아버지 소현세자(1612~1645)는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어머니는 인조 독살 시도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되었다. 경안군은 네 살이던 1647년 제주에 유배됐으나 곧 두 형마저 죽는 등 비운을 겪은 인물이다. 1659년 경안군으로 복권된 후 1661년 혼인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경안군의 무병장수를 염원한 나인들의 바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3년 후 경안군도 병마와 빈곤 속에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발원은 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한 개인 또는 한 사회의 바람을 담고 있다. 발원의 목적은 시대와 지역, 개인에 따라 조금씩 변하지만 불교미술품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직접적인 원동력이다. 발원문은 시대마다 발원자의 성격이 달라지지만, 나라의 안위와 가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간절한 바람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마침 오는 3월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 ‘조선시대 승려 장인’이 개최되고 있다. 올 겨울 나와 타인을 위한 소박한 서원을 세워보며 나만의 발원문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신소연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며 특별전 ‘미국, 한국미술을 만나다’(2012) 개최, 반가사유상실·불교조각실 개편(201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조사보고〉 발간(2014·2016), 특별전 ‘발원, 간절한 바람을 담다’(2015) 개최, 반가사유상실 ‘사유의 방’ 개관(2021) 등의 업무를 진행했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영기, 백제 639년, 10.3×15.3cm,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 심초석 출토, 국립익산박물관.
〈묘법연화경〉 권 7 사성기 부분.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물, 조선 1662년, 비단·종이, 보물, 순천 송광사성보박물관.
복장발원문, 고려 1333년, 56.7×60.3cm,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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