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수탈 속 삶의 애환
문화·예술로 승화시키며
견뎌낸 흔적 오롯이 남아

‘호남의 동맥’ 전라남도 목포(木浦)는 영산강 하구와 서해바다 사이 여울목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무안현에 딸린 작은 포구에 불과했는데, 1897년 개항 후 일본영사관·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들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도시가 성장할수록 사람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그들은 힘겨운 삶의 애환을 소설·음악 등으로 승화시켰다. 이 때문인지 목포에서는 가수 이난영(李蘭影, 1916~1965), 극작가 차범석(車凡錫, 1924~2006), 소설가 박화성(朴花城, 1903~1988) 등 많은 문예인이 배출됐다.

2000년대 이후 목포시는 관광산업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다양한 관광루트를 조성했다. 차범석의 희곡 〈옥단어!〉의 주인공 이름을 딴 ‘옥단이길’과 일본영사관·동양척식회사 등 일제강점기 건물들이 산재한 근대역사문화공간이 대표적이다. △노라노미술관 △정광정혜원 △노적봉 △만인계 터 등을 볼 수 있는 옥단이길과 일제강점기 건물을 활용해 만든 목포근대역사관 1·2관이 있는 근대역사문화공간을 걸어봤다.

일본의 야욕으로 개항한 항구도시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2시간 30분정도 달리면 호남선의 종착역이자 옥단이길의 시작점인 목포역에 도착한다. 목포는 영산강을 통해 물품을 내륙으로 빠르게 운반할 수 있고,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미곡을 손쉽게 반출할 수 있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개항 전부터 일본이 눈독을 들인 도시다. 1897년 ‘목포각국공동조계장정’ 체결로 목포에 입성한 일본은 손쉬운 물자반출을 위해 철도를 개설했고, 1913년 목포-학교(삼학도)간 열차 운행을 개시했다.

목포역에서 유달산 방향으로 직진하면 목포오거리가 나온다. 목포오거리는 목포역·선창·개항장·유달산·조선인마을로 통하는 교차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마을과 일본인 거주지역의 경계였다. 개항 당시 목포는 조계지(租界地) 외에 집을 지을만한 토지가 거의 없었고, 조계지도 비좁았다. 일본은 외국인과 인근에서 유입된 농민으로 인구가 늘어나자 갯벌과 바다를 매립해 토지를 만들고 그 위에 도심을 조성했다. 이 때문에 원도심의 구획이 규칙적으로 정돈돼 있다.

오거리에서 유달산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일본식 사찰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본 불교 ‘진종 대곡파 동본원사’의 목포별원이다. 별원은 본사(本寺) 외에 별도로 지은 사원의 출장소 개념이다.

일본 동본원사 목포별원의 모습. 목포시는 건물을 인수해 오거리문화센터로 활용 중이다.

당시 이곳에 상주한 스님들은 포교활동과 함께 일본인 자녀의 교육을 위한 소학교를 세웠고, 각종 복지시설을 운영했다. 동본원사 목포별원은 광복 후 정광사의 관리를 받다가 1957년 목포중앙교회에서 인수했다. 이로 인해 사찰 지붕 위에 십자가가 걸리는 진귀한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의 잔재이니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목포시는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건물을 인수한 후 ‘오거리문화센터’로 리모델링해 전시·교육 등을 진행하는 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다시 유달산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빛바랜 간판, 어딘가 촌스러운 글씨, 붉은 벽돌 등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골목 풍경은 70~80년대의 어느 순간에 멈춰있는 느낌이다. 천천히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막다른 골목 끝에 아트타일로 꾸며진 담벼락과 ‘노라노 양재 패션학원’ 간판이 걸린 낡은 건물이 보인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 통신용 말을 관리하던 ‘마방골’이었는데, 개항 후 우체사와 전보사가 세워졌다. 광복 후에는 다양한 용도로 건물이 사용됐는데, 패션학원을 마지막으로 빈 건물이 됐다. 마을 주민과 지역 예술가들은 방치된 건물을 활용해 골목길에 새 숨결을 불어넣고자 의기투합해 협동조합을 조직, ‘골목길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 결실이 2015년 ‘푸른모세혈관전’을 개최하며 새롭게 문을 연 ‘노라노미술관’이다.

당시 조직한 협동조합의 이사장을 맡았던 김양희(56) 씨는 “노라노미술관 조성은 우리 마을을 ‘예술가가 상주하는 동네’로 만들어 마을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꿈에서 시작됐다.”면서 “마을 주민과 여러 예술가가 합심해 만들었고, 꾸준히 작품전시회를 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을 주민과 지역 예술가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노라노미술관. 담벼락의 아트타일과 빛바랜 낡은 건물이 관람객을 반긴다.

노라노미술관 골목에서 나와 다시 유달산 방향으로 걸으면 비탈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이곳은 노적봉(露積峯)으로 가는 길목인데 경사가 가팔라서 ‘목마르뜨 언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길을 따라 언덕 중턱쯤 오르면 오른쪽에 정광정혜원(淨光定慧院)이 나온다.

정광정혜원의 전신은 1918년 일본인 도현(道現) 스님이 창건한 흥선사다. 해방 후 만암 스님이 정광정혜원으로 개칭했는데, 〈무소유〉의 저자 법정 스님(法頂, 1923~2010)과 관련된 이야기로 유명세를 탔다. 목포초급상과대학(전남대학교 상과대학의 모태)에 재학 중이던 법정 스님은 우연한 기회로 정광정혜원에 기거하면서 자연스레 불교를 접하게 됐다. 또 당시 스님이었던 고은 시인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법정 스님은 1954년에 경남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정광정혜원 일주문 왼편의 벤치에는 이를 기념하고자 조성한 대학생인 법정 스님과 출가 후 법정 스님의 모습을 본 뜬 동상이 세워져 있다.

유달산 정상에서 바라본 목포시 전경. 낮은 건물들과 삼학도, 바다가 어우러져 목포만의 매력을 뽐낸다.

옛 일본영사관, 근대역사관으로

‘목마르뜨 언덕’을 마저 오르면 오른쪽에 유달산 등산로 입구가, 왼쪽에 ‘유달산 노적봉’이라고 쓰인 바윗돌이 보인다. 노적봉은 해발 60m의 작은 바위산인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바위에 이엉을 덮어두자 왜군이 군량미라고 착각하고 후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완만한 노적봉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간 정상에서는 탁 트인 목포 시내 전경과 ‘새천년 시민의 종’ 종각을 볼 수 있다.

‘목마르뜨 언덕’ 끝에 오르면 ‘유달산 노적봉’이라 쓰인 바윗돌이 보인다.

종각은 과거 포를 쏘아 정오를 알리던 ‘오포대’가 있던 자리에 2000년 10월 세워졌다. 종은 무게 21t, 직경 2m 29cm, 길이 3m 90cm에 달한다. 종각의 현판은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썼다. 일반적으로 종각의 방향은 정남쪽을 향하게 하는데, 환태평양시대에 세계를 주도해나가겠다는 목포시의 의지를 반영해 서쪽을 향하고 있다.

노적봉에서 노적봉예술공원을 거쳐 둘레길을 내려오면 유달동 근대역사문화공간이다. 가장 먼저 일본영사관으로 사용했던 목포근대역사관 1관을 볼 수 있다.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데, 내부도 건립됐을 때의 모습을 대부분 보존하고 있어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저절로 떠올리게 한다.

노적봉 정상에 오르면 2000년 10월에 건립된 목포 ‘새천년 시민의 종’ 종각을 볼 수 있다.

근대역사관 1층에는 개항이후 목포의 생활상과 관련된 유물과 사진자료, 2층에는 당시 활동했던 목포의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1관에서 내려와 나아가면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을 활용한 근대역사관 2관이 나온다. 1관에서 통합권(1인 당 2,000원)을 구매하면 2관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방문했을 당시 2관에서는 ‘영웅, 그날의 기억을 걷다’를 주제로 목포 독립운동 특별전이 진행 중이었다. 목포 지역 독립운동가의 흔적들을 둘러보는데, 박물관 곳곳에 쓰인 ‘잊지 말아 달라.’는 문구에 잠시 마음이 먹먹해졌다.

일제강점기 건물들을 활용해 만든 목포근대역사관 1·2관의 내부 전경. 관람객들이 전시실을 둘러보고 있다.

2관에서 나와 다시 옥단이길의 ‘만인계(萬人契) 터’를 향해 걸었다. 이리저리 꺾인 골목을 오르내리는 동안 담벼락의 벽화들이 눈에 들어온다. 만화캐릭터·국내외 예술가의 얼굴 등 주제도 다양하다. 벽화를 구경하며 걷다보면 야트막한 언덕 위로 작은 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개항기 당시 성행했던 복권의 일종인 ‘만인계’를 추첨하던 곳이다. 만인계는 계주(契主)가 일정 기간 동안 ‘계표’를 판매하고 추첨에 따라 당첨금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당첨자는 계표의 번호를 쓴 제비[籤]나 알[球]을 출통(出筒)에 넣은 뒤 흔들어서 나오는 번호로 선정했다. 당첨금을 제외한 수익금은 초등학교를 건립하거나 다리를 놓는 등 시민을 위한 공공사업에 사용됐다.(윤대원, ‘한말 만인계의 내부구조와 실상’, 2014)

공원 입구에 세워진 팔각형 출통 주위에는 사각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기둥은 당시 만인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상징한 모습이라고 한다. 출통 주변을 둘러싼 기둥들의 모습을 보니, 복권 1등이라는 ‘일확천금’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아 절로 웃음이 났다.

만인계 터를 나와 콩나물 동네를 향해 걸었다. 길눈이 어두운 탓에 복잡하게 얽힌 골목을 걷다가 길을 잃을까봐 걱정했는데,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잘 세워져 있어서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골목 담벼락 곳곳에 빛바랜 벽화들이 눈에 띈다.

‘콩나물 동네’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다닥다닥 붙은 주택의 모습이 시루에 담긴 콩나물 모양을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는데, 예상과 달리 한국전쟁 이후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이 콩나물을 재배해 인근 시장에 내다 팔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삶의 애환 ‘문예’로 승화

콩나물 동네에서 내려와 목포 북항 방향으로 걸으면 목포의 예향(藝香)을 느낄 수 있는 ‘북교동 예술의 거리’가 나온다. 이곳은 목포출신 문예가들의 생가·활동지가 모인 골목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곳은 드라마 ‘전원일기’의 극작가 차범석의 생가다. 차범석은 이 길의 주인공인 ‘옥단’을 탄생시킨 인물이다. 그는 팔순을 앞둔 2003년에 희곡 〈옥단어!〉를 썼다. ‘옥단’은 1930~1950년대에 이 지역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 희곡에서는 당시 척박한 삶을 묵묵히 견뎌낸 상징적 캐릭터로 탈바꿈했다. 차범석은 연희단패거리가 공연한 연극 ‘옥단어!’ 작가의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옥단은 날품팔이꾼이다.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허드렛일도 해주고 수돗물을 길러주고 애경사 때는 빠짐없이 드나들었다. …… 어른이건 아이건 그를 부를 때 ‘옥단어!’라고 하대했다. 목포 지방의 사투리가 말끝이 ‘어’로 끝나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옥단어!’라고 누구나 스스럼없이 부르던 밉상스럽지 않은 그 성품은 만인의 친구이자 말벗이기도 했다. …… 천대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버티며, 남을 위해 베풀다가 길지 않은 생애를 마친 불행한 여인 옥단은 우리 민족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생가 대문 옆에는 작은 창호지 문이 있다. 문 위로 ‘차범석 작은 도서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낮은 천장과 정리된 책들이 있는 아담한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비밀아지트에 들어온 느낌이다.

차범석 작은 도서관의 입구. 열려진 문 사이로 아담한 내부 공간이 보인다.

차범석 생가에서 골목 위쪽으로 올라가면 ‘화가의 집’이라는 무인카페가 나오는데, 건물 2층에 ‘이난영·김시스터즈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난영은 노래 ‘목포의 눈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가사 중 ‘삼백년 원한품은’이라는 부분을 일제의 검열을 피하고자 ‘삼백연(三柏淵) 원안풍(願安風)은’이란 뜻 모를 가사로 바꿔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러한 사연을 가진 목포의 눈물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노래였고, 1970~1980년대에는 야구단 기아 타이거즈의 전신인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 불려졌다. 이 곡은 발매 8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호남의 한(恨)이 담긴 노래로 애창되고 있다.

김시스터즈는 이난영의 딸 김숙자·김애자와 조카 김민자로 구성된 여성 삼인조 그룹이다. 이들은 1959년 아시아 걸그룹 최초로 미국에 진출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작은 주택을 개조해 만든 기념관에는 이난영과 김시스터즈 관련한 의상, 활동기록, 상패 등이 전시돼 있다.

목포는 도시를 발전시키고 가꾸려는 지자체의 노력과 주민들의 애정이 묻어나는 도시다. 도시 곳곳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은 주민들의 노력과 만나 ‘목포 고유의 매력’을 자아낸다. 옥단이길과 근대역사문화공간에서는 목포청년회관·불종대(옛 화재경보시설)·가수 남진의 생가 등을 볼 수 있다.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주제로 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