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나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종교
기복 맹목적 비난 삼가야

한국불교를 비판하는 상투적 표현 가운데 치마불교·기복불교는 익숙한 용어이다. 해방 직후의 한국불교계는 비구·대처의 갈등, 물밀듯한 외래사조의 범람 앞에서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 급기야 우리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끝내 한국불교를 여성 중심의 불교, 맹목적인 기복에 매달린 하찮은 종교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불교 현대화가 본격적으로 수행되었던 1980년대 이후 불교의 이미지가 상당히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기복성에 대한 논란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예컨대 입시 불공·방생법회·예수재(豫修齋) 등이 본래의 아름다운 의미 대신에 사찰의 재정수입에 대한 기대만이 만연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뒤집어 놓고 생각해 보면 ‘기복’은 인간의 본성이다. 무병장수와 재물 복덕을 부처님 전에 기원하는 것은 결코 비난 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면 불교를 믿어서 꼭 세속적 행복을 멀리하고 불행해져야만 올바른 불교일까? 그렇게 논리를 단순화시키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기복종교일 뿐 별다른 기능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기복불교를 비판하는 기반은 그때의 ‘복’이 지나치게 물질적이고 이기적 욕망의 충족일 때에 해당하는 것이다. 의상대사의 법성게에는 무연선교(無緣善巧)라는 법어가 있다. 우리가 제도해야 할 대상은 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가족, 벗 등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잖은 충고이다. 아무런 인연없는 많은 중생을 향해 자비의 손길이 미쳐져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복불교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기복의 질(質)을 변환시키려는 노력이 절실한 까닭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이 대신들 앞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관료들을 질타하는 장면이 있다. 이 문무백관 가운데 하륜을 제외하고 진실한 유생이 어디 있는가를 반문하고, “모든 사람들은 외유내석(外儒內釋)”이라고 언성을 높인다. 그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조선의 국시는 유교이며 척불(斥佛)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유교를 숭상하는 척 하지만, 내면은 모두 불교를 믿는다는 표현이다.

또 다른 말로는 남편은 유교를 믿지만, 부인은 모두 불교신자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치마불교는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라 가슴에 사무치는 아름다움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사실 조선의 배불정책 500년을 거치면서 불교는 지리멸렬했다. 불교가 그나마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치마불교 때문이었다. 고매한 진리를 깨우치지는 못했을망정 재일에 절을 찾고, 법당에서 기도를 올리는 일이 일상적이고 생활 그 자체였던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이 지켜온 것이 바로 불교였다.

현대불교가 이루어야 할 목표는 진리 전파[포교]와 중생제도[보살행]로 압축할 수 있다. 그 목표를 향한 기본적 입장이 바로 행복에 대한 약속[기복]이다. 최근에 선풍적 인기를 몰고 왔던 명상불교·기도법회 등은 바로 이와 같은 트랜드의 반영이다. 이들 법회가 추구하는 공동 목표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이다. 불교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종교, 모든 생명을 안락으로 인도하는 종교여야 한다. 기복불교가 철저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는 불교의 영험을 부정하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일수록 내면은 기복적인 위선자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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