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역대 선·조사들은 마음법문을 주로 행하셨습니다. 이른 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하는데, 쉽게 마음이 흔들리고 허황된 망상에 갇혀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법문입니다. 심지법문의 요체는 만법(萬法)이 모두 이 마음에 의지하여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깨끗이 해 경계라는 견해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見聞覺知]’고 하는 것은 모두 경계 위에서 견해를 내는 것에 다름 없습니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무상(無常)·무상·(無相)·무명(無名)이란 ‘고정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묻혀 현실을 망각하고 산다면 허황된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실을 알지 못한 채 과거의 허상에 빠져 지금의 나를 가두어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현실을 바로 알아야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심지법문은 이러한 진실을 깨닫게 해주려는 선사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본래 심지법문은 〈육조단경〉에 있습니다. 〈육조단경〉에선 마음을 땅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심지’입니다. 마음은 일체 경계에 따라 온갖 견해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그 마음이 진여본성(眞如本性)입니다. 이 진여본성의 지혜로 작용하는 법문이 심지법문으로 달마에서 육조혜능에 이르기까지 선법(禪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습니다.

심법은 허망을 좇지 않습니다. 분별을 만들어내지 않을뿐더러 진여의 본성에 군더더기를 입히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습니다. 심법의 이치로 보면 진속(眞俗)과 범성(凡聖)의 차이도 없거니와 분별심과 차별 또한 두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도 허망을 경계하고 진실의 깨달음을 추구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타바루와의 대화입니다. 보타바루가 물었습니다.

“세계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까?”

부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보타바루여, 그것은 내가 설하지 않는 바다.”

보타바루가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세계는 무상한 것입니까?”

부처님이 다시 대답하셨습니다.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보타바루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세계는 끝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사람은 죽은 뒤 존재하는 것입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 역시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다.”

그러자 보타바루가 진지하게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 일들을 설하지 않는 것입니까?”

“보타바루여, 옳음이 없고 법에도 맞지 않으며 수행과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집착을 끊고 욕심을 버리고 바른 지혜를 얻어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보타바루는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무엇을 설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보타바루의 질문에 “나는 괴로움을 설하고 괴로움의 원인을 설하며, 괴로움의 소멸을 설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하느니라.”고 답합니다. 즉 사성제(四聖諦)를 말씀하셨습니다. 사성제란 ‘네 가지의 성스런 진리’란 뜻으로 이 세상은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고[苦聖諦], 그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 있으며[集聖諦], 고통의 원인인 집착을 없애야[滅聖諦] 바른 진리의 길로 나아간다[道聖諦]는 것입니다. 과거 인도사회는 사후세계가 있느냐 없느냐,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등 형이상학적 의문에 집착해 현실의 문제를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처님은 이를 경계하고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불교는 비진리, 거짓과 환상의 가설로부터 눈을 뜨게 하려는 가르침을 내세웁니다. 올바른 믿음이란 삶과 진리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막연한 믿음과 불분명한 대상에 대한 신앙은 정상적인 삶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올바른 신행은 선과 악이나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넘어서는 진정한 마음을 갖추도록 요구합니다. 언제나 담담하고 고요한 경지를 구축할 때 마음의 평정심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게 되면 마음은 외물(外物)에 감응되어 악하고 추악하고 더러움을 구분하지 못한 채 맹신에 빠지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망심(妄心)’이라 부릅니다. 이 망심이 허황한 믿음을 좇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늘 바른 진리의 자리에 머물려면 망심을 갖지 않도록 정진해야 합니다. 불자 여러분의 수행정진을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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