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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의 나의 어머니5_여고 입학“달자야! 니는
어무이가 젊다고 생각하나?
늙었다고 생각하나?”

부산에서의 본격적인 여고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다는 익숙하게 내 곁을 지켰고, 내가 살고 있는 초량동의 작은 골목을 넘어 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하숙집에서 내가 입학한 남성여고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산고등학교 앞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부산고 옆 하숙집

두말할 것도 없이 나는 등교하기위해 길을 메우고 올라오는 부산고등학교 남학생들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말입니다. 남학생들은 나를 눈여겨보지도 않는데 가슴이 뛰곤 했으며, 모든 남학생들이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아 늘 얼굴이 빨간 빛이었습니다. 그러니 등교준비를 할 때 책가방보다 머리를 한 번 더 빗고, 거울을 한 번 더 보고, 옷 매무새를 한 번 더 매만지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 존재는 거리의 가로수만치도 눈에 뜨이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도 내 가슴은 늘 파도가 치곤했습니다.

부산고등학교 남학생은 하숙집에도 있었습니다. 양장점을 하는 누나가 있었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면 얼굴도 준수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마주치면 약간의 수줍음을 표시하면서 돌아서기 일쑤였고, 서로 대화를 나눈 기억은 없습니다. 어쩌면 나는 먼 거리의 인연을 숙명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내 가슴만 떨었을 뿐 부산고등학교 학생과는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기대만 눈부시다가 맥없이 스러졌다고 볼 수 있겠지요.

어머니가 부산에 온다는 전달을 받았습니다. 반가우면서도 싫었습니다. 쪽진 어머니의 촌스러움이 자랑스럽지 않았으며, 조금 많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필요한 것을 채워 주는 사람이었기에 필요했을 뿐, 앞으로 내세워 “우리 어머니”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버스정류장에 어머니가 도착했는데, 짐 보퉁이가 다섯 개나 되었습니다.

“이게 다 머꼬?”

벌컥 화부터 내었지요.

“다 니가 먹을 끼다. 주인집에도 주고.”

나는 먹는 일보다 누가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지나 않을까? 저 여자를 우리 어머니라고 보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그것만이 문제였습니다. 어머니의 수고로움과 딸에 대한 희생 따위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나는 자꾸 주변을 돌아보고, 혹 친구들에게 들키지나 않나 그것만 노심초사했습니다. 나는 몇 개의 짐 보퉁이를 들고 또 들고 있는 어머니 옆에서, 나의 어머니가 아닌 것처럼 옆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했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보퉁이를 풀어놓을 때마다 나오는 음식은 나를 흥분하게 하였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명태조림, 마른 문어조림, 잡채는 내가 정신 빠지게 잘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부산에도 계란은 있었지만 고향 계란이 더 좋다고, 도회지 계란은 맛이 없다고 계란말이까지 해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당시는 “싫다.”고, “부끄럽다.”고 했지만, 그 음식을 하는 과정 속 어머니의 기도는 ‘이 딸 하나만은 제발 제발 자신의 소망을 져버리지 말라.’는 몰입의 불경 같은 것이었겠지요. 나는 아직까지 어머니같이 음식 잘하는 요리사를 만나본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어릴 적 맛을 잊지 못하지요. 입에 딱 맞으니까요 그렇게 정성을 다했는데, 그 딸은 과연 어머니를 웃게 만들었을까요?

더 젊은 날의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의 ‘어느 아름다운 날’

“아, 예쁘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 어머니를 보고 소리쳤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예쁘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는 듯 탄성을 질렀고, 어머니는 다른 어느 날보다도 분명 그때 그 순간 아름다웠습니다.

마침 대청마루에 쏟아져 내리는 5월 햇살이 어머니를 더욱 눈부시게 했고, 조금은 수줍은 듯한 어머니의 미소는 신비스럽도록 환상적이었습니다.

주문을 외면 날렵한 마차라도 윙윙 소리를 내며 나타날 것 같은 현란한 어머니의 옥색저고리가 잠시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하얀 앞 가리마가 새벽처럼 싱그럽게 다가왔었습니다.

그날따라 머리 빗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얼굴에 분가루를 도닥거리는 일도 정성을 들였고, 분홍색 저고리와 옥색저고리를 벗었다 입었다하는 모습이 문틈으로 살짝 보였습니다. 좋은 날이 아니면 결코 신지 않는, 외할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신 옥양목 버선을 장롱아래서 꺼내 신으셨습니다.

발뒤꿈치에 매끄러운 종이를 받치며 버선을 신는 어머니의 모습은 늘 재미로 다가왔었지요. 때로는 뒤로 덜렁 넘어질 때도 있었으니까요.

무슨 날일까? 하지만 목적지는 지금 어머니 분위기와 맞지 않는 거 같았습니다.

“어디가노?”

“빙운(병원)에 안가나?”

“빙운에 가는데 왜 그리 이뿌게 해 갖고 가노?”

“니가 보기에도 내가 이뿌나?”

“참말로 이뿌다. 참꽃냄새가 날라 칸다.”

“그러문 이 어머이 가슴에 참꽃이 피는 갑다.”

“가슴에 우찌 꽃이 피노?”

“나이 들면 가슴에 꽃 피는 때도 있는기라.”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 나이가 들면 가슴에서 꽃이 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내 나이는 10살이었습니다. 그날 어머니와 비석거리에 있는 점박이 한의원집에 뜸을 뜨기 위해 가고 있었습니다.

왼쪽 목에 이상한 몽우리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나를 한의원에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돌아올 때 어머니는 떡이나 사탕을 사주셨는데, 쑥뜸이 따갑기는 해도 떡이나 사탕을 먹는 재미로 꾹 참았습니다. 때로는 몽우리가 너무 빨리 사라질까봐 겁이 나기도 했었지요. 그래서 자다가 만져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떡이나 사탕 먹는 재미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나들이를 하는 그 자체가 떡만큼 배부르고 사탕만큼 달콤하였습니다.

위로 언니가 넷, 아래로 동생이 둘이니 어머니를 독점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병원 가는 시간만은 어머니를 독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독점을 하며 며칠째 한의원을 갔지만, 그날만큼 치장을 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어머니가 사탕과 떡을 두 배로 사주었습니다. 무슨 날일까요? 그리고 어머니는 집의 반대방향으로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어데가노?”

“저기.”

“저기가 어데고?”

“어무이도 모른다.”

“머리카노. 어무이가 모르면 우짜노?”

어머니는 그때 대답대신 엷은 한 숨을 길게 뱉으며 먼 산에 시선을 주었습니다.

옥색옷고름이 바람에 휘날렸습니다. 우리는 비석거리를 지나 거창중학교가 있는 소나무밭을 뒤로하고 막연히 걸었는데 둑길이 나타났습니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둑길을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이런 하찮은 둑길을 걸으려고 어머니는 그렇게 치장을 하신 것인가. 그러나 끝내 나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달자야! 니는 어무이가 젊다고 생각하나? 늙었다고 생각하나?”

둑길 잔디가 푸릇푸릇 싹이 나온 곳에 앉으시며 그런 어려운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냥 어무이 아이가?”

얼마나 서운하셨을까요? 좀 젊다고 대답해 주지. 그러나 나는 그때 어머니가 젊은지 늙었는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어무이’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좀 전보다 더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때 젊었는지 늙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안방 문을 열고 나오는 어머니의 옥색저고리가 빛에 반사될 때 ‘가장 아름다운 한 여자가 저기 있다.’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빛깔은 달랐지만 우리 집 장독대 앞에 핀 파초꽃 같았습니다.

40대로 막 들어서는 어머니는 너무 젊었을 것입니다. 자식을 먼저 땅에 묻고 그 상처도 몇 년을 지나면서 어머니의 몸에서 여자가 피워 올랐을까요? 정말로 진분홍 여성성이 마구 어머니 몸에 피워 올랐을까요? 어머니도 여자였습니다. 어느 날 치장은 했지만 갈 곳도 없었던 어머니는 어린 딸을 앞세워 둑길을 걸으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그날이 어머니가 기억하는 어느 아름다운 날일까요? 아니면 갈 곳은 없어도 예쁘게 자신을 다듬고 싶은 그런 날이었을까요?

송도해변과 껄렁패

그때의 아름답고 신비롭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는지 저기서 보퉁이를 풀고 있는 어머니는 내내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제아무리 사춘기라고 해도 자기하나를 먹이기 위해 이고지고 짐꾸러기를 가져 오신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다니 저도 참 ‘할 말 없는 딸’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머니는 내 생각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먹이고 공부시키고 무조건 잘되라고, 그렇게만 하라고 우격다짐을 하는 게 어머니의 교육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무식한 교육법을 또 무시하곤 했었습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간절한 소망으로 나를 부산까지 보냈는지에 대해선 늘 짜증 섞인 말투로 대꾸하곤 했습니다.

“어무이 혼자 날 안보냈나? 내가 보내달라 했나?”

부산 생활을 조금씩 적응해 나갔고, 재미도 붙는 것 같은 날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내가 시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대뜸 말했습니다.

“니 유치환 아나? 시인아이가? 이영도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계시다가 작년에 다른 학교로 가셨는데 정문 앞에 이영도를 만나러 온 유치환이 있었다 안카나.”

“유치환이가 왜 이영도를 기다렸다카더나?”

“서로 좋아한다 카더라.”

“늙은 사람들 아이가?”

“늙어도 좋아하는갑더라.”

나는 학교 앞 서점에서 유치환 시집을 샀고, 거기서 ‘깃발’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저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아 나는 이 한 구절에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일제강점기, 글도 말도 다 뺏기고 가슴에서 용솟음치는 울분을 깃발에 비유해 암울한 울음의 아우성을 단 한 줄에서 끝내고 마는 이 시인은 ‘참 좋은 시인이구나.’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시인이 되면 좋겠다.’고 막연한 희망을 가지기도 했었지요.

그 한마디의 인연으로 유치환 선생님을, 이영도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꼭 그런 시인이 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때 국어선생님 별명은 ‘모자장수’였는데 아마도 친근해서 그런 별명을 붙인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모습은 촌스러움을 면치 못했으나 정신은 세련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요.

“니는 시인으로 가라.”

그냥 흘린 말이 아니라 씨앗 같은 한마디여서 저는 그 말 한마디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있기도 했습니다.

‘권연’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내 옆에서 많은 걸 챙겨 주기도 했는데, 연이도 내게 “니는 시인아이가?”라면서 추켜세워 놀라기도 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친구가 옆에 있어 걱정이 덜 된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친구가 있어야 한데이. 좋은 친구는 금가락지 열 개보다 좋은기라.”

어머니의 이 말은 지금까지도 가슴에 새겨 있지만, 나는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늙어가면서 어머니의 이 말 한마디는 늘 회초리처럼 저를 때리는 살아있는 교육이기도 합니다.

외롭다고 말하면서 좋은 친구가 없다고만 하고, 좋은 친구가 되어줄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 어머니가 저 하늘에서 보셔도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권연이라는 잊지 못할 친구가 있었지만, 더 적극적으로 그 친구를 챙기지는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바다는 꼭 명자와 가게 되었습니다. 명자와 바다를 참 많이 거닐었습니다. 그 시절, 그러니까 1959년이었지요. 그 시절 이야기입니다.

겨울바다를 걷고 있노라면 앞단추를 풀어헤친 남학생들이 뒤를 따라오곤 했었습니다. 딱 봐도 껄렁패 같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남학생들이 명자 뒤만 졸졸 따라오는 일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송도해변을 걷고 있는데 내 뒤에도 남학생 하나가 졸졸 따라왔습니다. 모자를 거꾸로 쓰고 앞단추를 풀어 펄럭이며 따라왔습니다. 아, 드디어 나에게도……. 그러나 너무나 절망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저 친구에게 이것 좀 전해 주이소”

나를 따라온 게 아니었습니다. 명자에게 쪽지를 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쪽지를 집어 던졌습니다.

“직접 주이소!”

그렇게 기분 구겨지는 일도 있었지만, 명자와 바다를 걷는 일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명자는 정말 예쁜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바다를 거닐며 앞으로 우리가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해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물론 나는 ‘시인’이 되겠다고 했고, 명자는 ‘부자’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부자’란 말이 잘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저 정도 인물이면 앞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후로도 난 혼자서 바다를 자주 갔습니다. 나는 바다에서 시를 건져야 했습니다. 껄렁패 남학생이 따라오지 않아도 나는 분명히 할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첫 여름방학이 왔습니다. 고향에 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버스에서 바라보는 산과 들은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처음 고향을 떠나올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고향과 친구들과 아버지 어머니와 작별을 하고, 낯선 곳에서 도무지 무엇을 하려고 가는 것인가?’싶었고, 어머니의 강요가 미웠다가 잠시 고마웠다가 다시 미워지던 첫 부산가는 길은 그렇게 풍경조차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고향 가는 버스속의 풍경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만큼 여유가 생겼던 것입니다. 바다 보는 공부를 많이 해서일까요? 생각도 관찰력도 변화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저기 어머니가 보입니다. 버스가 도착하는 그 정류소에 어머니가 서 계시는 것이 보입니다. 부산에서 부끄럽던 어머니는 간데없고, 반갑기만 한 어머니가 거기 계셨습니다.

“아이고 왔나?”

그 말 한마디에 그간 낯선 곳의 생활에서 비집고 나오던 설움 같은 것이 씻은 듯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낯익은 정류소 작고 낮은 건물들도 다 정이 깊었습니다.

“고생했데이.”

안기고 부둥켜안는 그런 몸짓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 충분히 반가운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첫 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달자 ― 시인.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첫 시집 〈봉헌문자〉를 비롯해 수필집 〈나이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을 펴냈다. 만해대상 문예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공초 오상순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부문),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글 신달자  ggbn@ggbn.co.kr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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