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주·전좌처럼
묵묵히 할 일 해내며
주변 돌보는 불자 되자

“공양주를 시켜주면 이 절에 살고, 안 시켜주면 다른 절로 가겠습니다.” 선방을 찾아온 수좌들이 자진해서 한철 공양주를 살고자 했고, 공양주를 지원했다가 대기 순번으로 밀려나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노스님들이 들려준 옛 선방의 놀라운 풍경이다. 불교에서는 이처럼 대중공양의 뒷바라지를 무량한 공덕을 지니는 일이라 여겨왔다.

옛 스님들의 공양주 이야기를 들으며 자리이타의 보살도를 실감하게 된다. 자신의 수행이 남을 이롭게 하며, 남을 향한 자비심이 나의 수행을 이롭게 한다는 자타의 일체가 아니고선 참으로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양주를 잘 살면 복이 증장되고, 채공을 잘 살면 지혜가 증장된다.”는 담론과 함께 공양간 소임의 공덕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부처님 또한 복과 덕이 없으면 물기 없는 씨앗과도 같아 싹을 틔울 수 없으니, 마땅히 공덕을 쌓아 업장을 소멸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에 스스로 장애가 심하다고 느끼는 재가자들 또한 공양주 소임을 자청하는 이들이 많았다.

초기불교에서도 재가자들은 왕과 서민의 구분 없이 지역마다 공공급식시설을 만들어, 유행걸식 하는 출가수행자에게 공양을 제공하였다. 수행자에게 보시함으로써 공덕을 쌓기 위한 뜻을 담고 있어, 한역경전에서는 이 시설을 복덕사(福德舍)라 부른다.

당나라 말의 설봉(雪峰) 스님은 어느 절에 가든지 전좌(典座)를 자청하여, 늘 쌀 이는 조리와 주걱을 걸망에 매고 다녔다. 전좌는 중국 선종사원에서 대중의 음식을 만드는 소임으로, 우리의 별좌에 해당한다. 설봉 스님의 사례는 ‘자급자족의 노동’과 ‘대중을 위한 음식장만’이 수행으로 체화된 선불교의 특성을 잘 말해준다.

일본 조동종의 개조인 도겐(道元)은 송나라의 영파 천동사(天童寺)에서 유학할 때, 전좌가 공양간에서 음식을 만든 뒤 승당(僧堂)을 향해 9배하고 공양을 보내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또 이 무렵에 노 전좌 두 명을 만나게 된다. 한 명은 61세의 아육왕사(阿育王寺) 전좌였다. 그는 삼사십 리를 걸어 영파항까지 왔는데, 그 이유를 알고 보니 단오를 맞아 대중에게 국수공양을 올리려고 버섯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한 명은 활처럼 등이 굽은 68세의 천동사 전좌로, 땀이 쏟아지는 한여름에 삿갓도 쓰지 않고 지팡이를 짚은 채 표고버섯을 말리고 있었다. 이에 도겐이 ‘왜 행자나 인부를 시키지 않느냐?’고 묻자 ‘타인은 자신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또 ‘햇볕이 뜨거운데 어찌 이렇게 일하느냐?’고 묻자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라는 말이 돌아왔다. 깊은 감동과 함께 전좌의 소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도겐은, 후일 유명한 〈전좌교훈〉을 펴냈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수승한 일이요, 수행하는 스님들을 수행자 스스로 뒷바라지하니 그 수승함과 공덕은 얼마만할 것인가. 천동사의 전좌가 공양을 보내기 전 승당을 향해 아홉 번 절한 것도, 부처를 향한 스님들의 수행에 감사와 공경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승가의 공양주와 전좌처럼, 우리사회에도 해야 할 일을 잘 알아 묵묵히 해내면서 주변을 돌보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빛나는 그들 또한 지혜와 복덕을 두루 갖춘 부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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