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천 따라 형성된 옛 시가지
백제·조선·일제강점기 등
근·현대 문화유산 어우러져

공주 원도심을 지나 금강으로 흐르는 제민천. 왼쪽으로 공주시에서 운영하는 하숙마을이 보인다.

충청남도 공주의 옛 이름인 ‘웅진(熊津)’은 ‘곰내’ 또는 ‘곰나루’라는 뜻을 가졌다. 475년 백제 문주왕이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遷都) 하면서 백제문화를 꽃피웠다. 오늘날에는 무령왕릉을 비롯한 송산리고분군과 공산성 등이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공주시는 2000년대 초 ‘백제문화권 개발사업’을 시작으로 공주 일대의 백제유적을 개발, 관광도시로 성장했다. 아울러 금강으로 유입되는 제민천과 그 일대를 중심으로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됐다. 사업을 통해 주민들의 삶의 흔적이 스며있는 원도심은 어떤 이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어떤 이에게는 색다른 추억을 선사한다. 자세히 보면 더 아름다운 공주 원도심 거리로 골목여행을 떠나보자.

백성들의 바람벽 ‘공산성’

공주 원도심 거리는 공산성이 있는 금성동을 시작으로 제민천을 따라 교동·반죽동·중동 일대에 조성돼 있다. 공산성은 북쪽의 금강과 급경사를 이루는 공산의 산세를 이용해 축조된 성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에 속한 공산성은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1,500여 년의 시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공산성에는 여러 이야기를 품은 크고 작은 누각과 건물, 왕궁터 등이 남아 관광객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공산성에는 영동루·금서루·진남루·공북루 등 4개의 문루(門樓)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금서루를 통해 내부로 들어간다. 금서루로 향하는 야트막한 언덕을 걷다 뒤를 돌아보면,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공주 시내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고층 빌딩과 전깃줄이 보이지 않는 탁 트인 도심의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느껴져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금서루로 들어서면 길게 뻗은 성벽과 나무, 그 뒤로 너른 들판이 보인다. 이곳에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성안마을’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공산성은 군사 기능을 담당했던 곳이었는데, 갑오개혁으로 산성의 기능을 잃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1960년대 성안마을 전경. 〈사진=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공주학아카이브〉

성안마을에 인구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60년대 무렵으로, 100여 세대가 살았다고 한다. 경작지가 없어서 대부분 뱃사공·마부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2000년대 초 공주시가 진행한 ‘백제문화권 개발사업’으로 주민들의 이주가 본격화되면서, 마을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정자인 공산정(公山亭)으로 가기 위해 올라야 하는 성벽은 꽤나 가파르다. 별다른 안전장치가 없어 오를 때 주의가 필요하다. 길을 따라 조금씩 오르다 보면 길 한 귀퉁이에 올망졸망 쌓여있는 돌탑들이 보인다. 이 돌탑들은 공산성 곳곳에 있는데, 관광객들이 저마다 자신의 소망을 담아 쌓아올린 흔적이다. 성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깃발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린다. 깃발은 사적 제13호 송산리고분군 중 6호분 벽화의 사신도를 재현한 것으로 방위에 따라 색과 그림이 다르다.

공산정에 오르면 금강과 함께 그 위에 놓인 금강철교(국가등록문화재 제232호)가 보인다. 금강철교는 1933년에 건설됐는데, 당시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반 이상 파괴되었지만, 1952년에 복구됐다. 공주시는 2002년 보수공사를 통해 다리를 보강하고, 조명등을 설치해 금강의 밤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공산성 안 북쪽 끝에 자리한 영은사의 원통전. 〈공산지〉에 따르면 광해군 8년(1616년)에 이곳에 승장을 둬 전국 8도의 사찰을 관장했다.

공산성을 조금 더 돌면 성내 우물터인 연지(蓮池)가 나온다. 연지 맞은편에는 1458년 세조의 명으로 창건된 ‘영은사(靈隱寺)’가 자리하고 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승병(僧兵)들의 훈련장이자 합숙소로 사용됐다. 승병들은 임진왜란 당시 첫 승병장인 영규 스님(靈圭, ?~1592)을 구심점으로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2)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고 제2차 금산전투에 참전해 장렬히 싸웠지만 모두 순절했다. 이들의 유해는 조헌의 제자들이 거둬 하나의 묘로 만들었고, ‘칠백의 총’이라 불렸다. 다만 영규 스님의 유해는 따로 수습돼 계룡면 유평리에 안치됐다. 이밖에도 공산성에는 이괄의 난을 피해 파천한 인조가 머물던 쌍수정을 비롯해 명국삼장비·만하루·임류각, 웅진성 수문병 근무교대식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남아있다.

‘미나리향’ 남은 추억의 거리

다시 금서루를 통해 공산성에서 나오면 서북쪽에 ‘백제무령왕릉연문(百濟武寧王陵埏門)’이 보인다. 연문은 ‘무덤으로 통하는 문’을 의미하는데, 공산성과 무령왕릉으로 가는 길의 경계를 구분 짓는다. 연문 중앙에는 무덤을 수호하는 신상인 ‘진묘수(鎭墓獸)’가 놓여있다. 그 아래에 연문의 건립기·매지권·석수 등에 대한 내용이 돌에 새겨져 있다.

연문광장 일대는 과거 ‘미나리꽝(미나리를 심는 논)’이 있던 자리다. 1960~1970년대 공주의 특산물은 ‘미나리’였는데, 서울의 야채시장을 비롯해 논산훈련소 등에 납품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미나리꽝’은 1980년대 공주시의 도시개발과정에서 매립됐고, 그 위에는 다양한 건물이 들어서면서 점차 잊혔다.

공산성 금서루와 연문광장 일대. 연문광장은 1960~1970년대 미나리꽝(미나리논)이 있던 자리다.

연문광장 일대를 지나 제민천 상류 방향으로 따라 걷다 보면 ‘산성시장’이 나온다. 〈공주시지〉에 따르면 구한말까지 제민천의 하류는 온통 미나리꽝이었다. 1918년 공주시 시가지 정비 계획이 실행되자, 당시 최고의 땅부자로 불렸던 김갑순(金甲淳, 1872~1960)이 미나리꽝을 매립하고, 이곳에 200여 개의 점포를 갖춘 사설시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1937년 매월 1·6일에 열리는 정기 시장으로 등록됐다. 2011년에는 중소기업청과 시장경영진흥원에서 선정한 가고 싶은 전통시장 5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민천 일대가 낙후되면서 산성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점차 줄었는데, 최근에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인해 관광객의 방문마저 뚝 끊겼다고 한다. 부모님에 이어 2대 째 산성시장에서 어물전을 운영하는 장옥경 씨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시장에는 물건을 사거나 구경 온 사람으로 북적였고, 장서는 날에는 발 디딜 틈도 없었다.”면서 “갈수록 방문객이 줄자 시에서도 시장을 현대적으로 바꾸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전보다 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걱정”이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공주우체국 방향으로 조금 걷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보인다. 1920년 건립된 이 건물은 충남금융조합연합회관으로 사용됐다. 이후 약 100년 간 공주읍사무소·공주시청·디자인카페 등으로 활용됐다. 현재 공주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다목적공간인 ‘공주역사영상관’으로 탈바꿈했다.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내부 공사 중으로 전시관을 구경할 수 없었는데, 평소에는 공주의 역사·교육·종교 등을 배우고 체험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공주역사영상관 맞은편에는 여기저기 패이고 갈라진 나무전봇대가 서있다. 언제 세워졌는지도 모를 나무전봇대 위로 전선들이 이리저리 얽혀 뻗어있었다. 콘크리트 전봇대 사이에 우두커니 서있는 나무전봇대를 보니, 홀로 시간이 멈춘 공간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민이 앞장서 꾸민 골목

전봇대를 지나 다시 제민천을 따라가면 대동 1길을 중심으로 조성된 특색 있는 골목들이 반긴다. 가장 먼저 공주사범학교 출신인 나태주 시인의 이름을 딴 ‘공주시 나태주 골목’이 보인다. 나태주 골목은 △꽃길 △사랑길 △선물길로 구성됐다. 각 주제에 맞는 시화로 담벼락을 장식해 황량해 보일 수 있는 골목을 아기자기하게 채웠다. 조용히 골목을 걷다보면 간간이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중간중간 어지러이 피어난 풀꽃들이 보인다. 자연스레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시구(詩句)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의 대표 시 ‘풀꽃’을 떠올리게 돼 더 자세히 바라보며 걷게 된다.

나태주 ‘꽃길’ 골목. 담벼락에 아기자기한 시화가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잠자리가 놀다간 골목’이 있다. 담벼락에는 다양한 그림과 장식이 꾸며져 눈길을 사로잡는다. 골목 바닥 한 귀퉁이에 그려진 사방치기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정겹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잠자리가 놀다간 골목’은 2013년 ‘골목길 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됐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골목을 치우고 꾸미기 시작하자, 미술가·건축가·대학생 등의 재능기부가 이어졌다. 깊고 어두워서 우범지역으로 불리던 이 골목은 주민들의 노력으로 제민천 인근을 대표하는 테마 골목길로 자리 잡게 됐다.

골목길들을 지나 다시 대통교 방향으로 걷다 보면 오른편에 세워진 주황색 건물을 볼 수 있다. 공주시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인 ‘하숙마을’이다. 공주에는 일제강점기 지역 유지와 관료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명화학교를 시작으로, 여러 학교가 세워졌다. 특히 1960~1970년대에는 공주고·공주여고·공주사대 부속고 등 명문학교가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 공주로 ‘유학’온 학생들이 늘었고, 자연스레 하숙업이 발달했다. ‘하숙마을’은 마당의 펌프·노란 장판·마루 등 당시 일반적인 하숙집의 모습을 반영해 꾸려졌다. 하숙마을 인근에서 ‘미니수퍼’를 운영하는 박재선 할아버지는 “이 근처에 좋은 학교가 많다 보니 타 지역에서도 오고, 공주 사람도 집과 학교의 거리가 먼 경우에 하숙했다.”면서 “반찬이 잘 나오는 하숙집이 가장 인기가 많았고, 하숙하는 사람들끼리는 절로 친해졌다.”고 회상했다.

절터에 홀로 남은 당간지주

하숙마을에서 조금 옆으로 가면 작은 공원이 나온다. 백제 성왕(聖王, ?~554)이 세운 사찰로 추정되는 대통사(大通寺) 터다. 지금은 ‘반죽동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돼 지역 주민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 됐다. 당간지주는 큰 행사나 법회 때 부처와 보살의 성덕(盛德)을 표현한 당(幢)을 거는 당간(幢竿)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두 개의 돌기둥이다. 반죽동 당간지주는 서로 마주 보는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지만, 바깥쪽 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굵은 띠 모양이 도드라지게 새겨져있다. 받침돌에 새겨진 안상(眼象) 조각을 통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받침돌과 한쪽 기둥의 아랫부분이 손상됐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반죽동 당간지주 옆 울타리에 오색연등이 걸려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반죽동과 중동 부근에서 ‘대통(大通)’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인장와(印章瓦, 인장이 찍힌 기와)와 석조 2기가 수습됐다. 이후 2000년 공주대학교 박물관이 당간지주 부근을 발굴조사 했지만,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공주시는 대통사지를 중심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백제 문화의 흔적을 찾기 위한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공주시사암연합회는 2017~2018년 대통사지에서 문화재청이 주관하고 공주시가 주최하는 ‘야행’ 행사에 참여해 불교문화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당간지주 옆에는 공주 지역의 3·1만세운동과 신간회 운동에 참여해 계몽·민족주의 운동에 앞장선 율당 서덕순의 생가터 표지석이 있다. 이곳은 항일단체인 신간회 공주지회의 간부회의 장소이자, 임시정부의 밀사들이 은밀히 묵어가던 곳이었다. 한국전쟁 중 전소해 지금은 표지석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가까이, 오래 바라본 공주 원도심 거리는 아름다웠다. 1,500여 년 전의 백제 문화, 주민들의 손길로 꾸려진 골목길, 사람 냄새 물씬 나는 하숙마을 등 다양한 이야기와 추억이 색다른 이야기로 다가왔다. 이외에도 충청감영터·풀꽃문학관·충남역사박물관 등 다양한 볼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공주시에서 운영하는 ‘하숙마을’ 전경. 과거 하숙집의 모습을 반영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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