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인간은 평등하다는 걸 일깨워주고 싶어요!”

임현정 피아니스트.〈사진=도서출판 청미래〉

2012년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담은 앨범이 빌보드 클래식과 아이튠스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한국인 최초의 이 기록을 세운 주인공은 바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임현정(36) 씨다. 한때 출가(出家)를 꿈꾸기도 했다는 그녀를 만났다.

임현정 피아니스트는 사찰에서도 자주 공연을 펼쳐 불자들에게도 친숙한 음악인이다. 2016년 비로자나국제선원 창건 10주년 음악회에서 특별독주회를 열었고, 성담 스님과 ‘어둠에서 빛으로’ 공연을 함께하기도 했다. 지난 5월 6일 불교환경연대 홍보대사로 위촉되기도 했다.

머리 좋아진다는 말에 시작한 피아노

임현정 피아니스트는 코로나19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상반기 국내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3월 27일 아트센터인천 ‘Power of Spring’을 시작으로 △3/28 성남아트센터 ‘임현정의 Q&A콘서트’ △4/10 대구콘서트하우스 ‘Power of Spring’ △4/11 울산문화예술회관 ‘임현정의 렉쳐콘서트’ △4/17 성산아트홀 ‘리스트 초절기교 에튜드 전곡’ △4/25 군포문화예술회관 ‘Power of Spring’을 공연했고, △5/30 예술의전당 ‘리스트 초절기교 에튀드 전곡’ △6/5 GS칼텍스예울마루 ‘리스트 초절기교 에튜드 전곡’ △6/6 울산 백련사 ‘환경 콘서트’ △6/13 고양아람누리 임현정 지휘 데뷔무대 ‘앙상블 인터스텔라’ △6/27일 고양아람누리 ‘리스트 초절기교 에튜드 전곡’ 등의 공연을 앞두고 있다.

임현정 피아니스트는 현재 국내 공연과 전국 예중·예고·예대를 찾아다니며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정현선 기자〉

“지난해 2월 한국에 잠시 귀국했는데 하필 코로나19가 심해져서 계속 머물고 있어요. 사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외국에서만 살아서 한국이 너무 그리웠어요. 그렇다보니 한국의 변화된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에 기쁨을 느끼고 있어요. 지금은 국내 공연도 하고, 학생들에게 강의도 해주고 있죠. 국내 팬들이 저를 만날 때마다 너무 반겨줘서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임현정 피아니스트는 1986년 경기도 안양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님은 베토벤의 ‘베’자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클래식에는 문외한이었다. 집안에서도 음악을 하는 사람은 단한 명도 없었다. 어머니는 막내딸을 늘 애지중지 여기며 곁에 끼고 살았다. 그러다가 집에 놀러온 조카의 “피아노를 치면 양손을 다 활용하게 돼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어머니는 세 살 된 막내를 동네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글을 읽고 쓰기도 전에 음표를 먼저 배운 셈이다.

머리가 좋아지기 위해 피아노를 시작했다보니 음악을 전공해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는 여타 음악인들과는 가는 길도 달랐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피아노 전공을 하는 학생들은 유명대학 교수에게 레슨을 받거나, 예술중학교에 입학해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하지만 그녀는 어릴 때부터 다니던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꾸준히 피아노를 쳤다. 그녀 역시 유명대학 교수에게 몇 번 과외를 받았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그녀의 스타일과는 맞지 않았다. 슈만, 브람스, 라흐마니노프를 치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모차르트만 치게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클래식의 고향인 유럽에서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틀에 박힌 교육은 자유분방한 그녀와 맞지 않았다. 베토벤이 숨 쉬던 곳에서 그 공기를 마시고, 쇼팽이 사랑한 거리에서 사랑을 하고, 모차르트가 바라본 풍경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녀의 열정에 결국에는 두 손을 들었다. 1999년 근명여자중학교(現 근명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유럽으로 건너가 콩피에뉴 음악원 입학허가를 받았다. 12살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유럽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파리 동북쪽 도시인 콩피에뉴에 한 한국인 위탁가정에서 프랑스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국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만해도 파리의 학교에는 동양인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했다. 심한 인종차별을 당했다. 몇 달간 뜻하지 않은 묵언수행을 해야 했다. 그녀는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마음에 빗장을 걸어 잠근 채 피아노와 명상으로 힘든 나날을 견뎌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시간에 음악선생님이 갑자기 연주를 시켰다. 입학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쇼팽의 곡을 연주했다. 연주가 끝난 후 모든 학생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그 중에는 그녀를 차별했던 학생들도 포함돼 있었다. 예상 밖의 환호에 얼떨떨했던 그녀는 ‘언어 대신 음악으로 소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니나 다를까 쉬는 시간이 되자 학생 몇몇이 그녀에게 달려와 “친구가 되자.”고 먼저 말을 건넸다. 그날 이후 피아노와 음악은 그녀에게 통역사이자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

그녀의 지도 교수인 라비노치(왼쪽)·앙리 바르다(오른쪽) 교수. 〈사진=도서출판 청미래〉

피아니스트는 ‘수행’하는 직업

그녀는 콩피에뉴 음악원을 5개월 만에, 그것도 수석으로 조기 졸업했다. 졸업 콩쿠르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것이다. 이어 진학한 루앙 국립음악원도 3년 만에 조기 졸업한 후 마침내 2006년 16살의 나이에 꿈에 그리던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은 샤를카미유 생상스(1835~1921, Charles-Camille Saint-Saëns)·클로드 아실 드뷔시(1862~1918, Claude Achille Debussy)·모리스 라벨(1875~1937, Joseph Maurice Ravel) 등 프랑스의 전설적인 음악가들을 배출한 최고의 명문학교다.

“어렸을 때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하게 돼 무척 기뻤어요. 당시 어머니가 2년 동안 저와 함께 생활하고 계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합격을 기원하며 100일 동안 108배를 하셨더라고요. 제가 알면 부담을 느낄까봐 제가 학교에 등원하고 난 후에 절을 했다고 해요. 그 덕에 제가 무사히 입학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어머니께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녀가 프랑스 루왕 국립음악원을 다닐 때 외삼촌이 법문 테이프를 보내준 적이 있다.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의 법문 테이프였다. 그녀는 이 테이프를 자주 들으며 부처님 가르침을 배웠다. 그리고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입학이 결정된 후 몇 달의 공백 기간에 정토회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수련회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함께 지내던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 심적으로 흔들리고 있던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수련회 참가를 신청했다. 수련회는 법륜 스님의 제자인 유수 스님이 지도했다.

그녀는 수련회 프로그램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깊이 파고들었다. 휴식시간마다 산책을 겸한 토론이 이어졌고, 이 토론을 통해 ‘나를 사로잡고 있는 여러 가지 의문점’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됐다. 그녀는 이때 마음속에 있는 분노·슬픔·상처·고통 등의 감정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어머니는 평소 그녀에게 “천하의 양귀비가 제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늙으면 다 소용이 없다.”고 자주 말하곤 했는데, 성공에 대한 욕망과 돈과 물질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그녀 역시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불교에 너무 심취했기 때문일까? 출가(出家)를 해서 본격적으로 수행정진을 하고 싶어졌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 출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열여섯 딸의 당돌한 결심에 어머니는 “집안에 스님이 있으면 삼대가 복을 받는다는데, 네가 스님이 되면 가문의 영광”이라며 “네가 행복해지는 길이 그 길이라면 엄마는 너의 결정을 응원한다.”고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정작 유수 스님은 그녀의 결심을 듣고 단박에 거절했다. 어려운 결심이 허무하게 거절당하자 너무 실망스럽고 속이 상했다. 유수 스님은 “음악가로도 얼마든지 세상에 공헌할 수 있는데 왜 출가에 집착을 하느냐?”며 “매일 혼자 연습하고, 피아노 연주를 하며 시공간을 초월하니 피아니스트란 직업만큼 수행정진과 닮은 직업은 없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스님의 조언은 큰 위로가 됐다. 그녀는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했고, 음악공부에 매진해 4년 과정을 3년 만에 마친 후 최연소 수석 졸업이란 기록을 또다시 세웠다.

1999년 프랑스 콩피에뉴에서의 모습. 〈사진=도서출판 청미래〉

“사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하고 난 후에도 몇 달 동안은 유수 스님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어요.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니 내가 출가해서 추구하고자 했던 길 음악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평소 연습할 때는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자신을 계속 들여다보게 되는데, 이 과정이 수행과 다르지 않아요. 또 연주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삼매(三昧)에 들어가게 돼요. 유수 스님 말씀처럼 도를 닦는 것과 같더군요. 그때 저의 출가를 거절해주신 게 지금은 오히려 고마워요.”

‘싸이’보다 먼저 빌보드 점령

그녀는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을 졸업한 후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스위스·벨기에·노르웨이 등 유럽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했다. 클래식 분야에서는 콩쿠르 수상 이력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 기간 중에는 단 한번 나가서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았다. 이유는 ‘음악과 경쟁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유튜브에 공연 영상을 올려 사람들과 음악의 감동을 나누었다. 티켓을 사지 않아도 연주를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했다.

2009년 벨기에 겐트에서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연습곡 전곡 연주회가 열렸다. 공연 후 앙코르곡으로 러시아의 거장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을 연주했다. 템포가 굉장히 빠른 곡인데, 유튜브에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왕벌의 비행’으로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어 유튜브에 올린 건데, 이게 소위 ‘대박’이 났다. 국내 공연을 하지 않아 국내 인지도가 낮았던 그녀의 이름을 한국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2011년 리스본 독주회 때는 마리아 칼라스를 비롯한 전설적인 음악인들의 레코딩을 제작한 영국의 대형 음반회사인 ‘EMI(Electric Musical Industries Ltd)’의 부사장 앤드류 코널이 무대 뒤로 찾아왔다. 라벨과 스크리아빈 연주를 듣고 감동했다면서 그날 연주한 프로그램대로 녹음을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 베토벤에 푹 빠져있었다. 코널 부사장에게 역으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저는 베토벤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던 중이었어요. 베토벤에 푹 매료돼 있었거든요. 그래서 음반 제의를 받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녹음을 하고 있었어요. 저의 엉뚱한 역제안에도 불구하고 준비상황을 본 EMI 측이 바로 수락을 했어요. 보통 연주자들은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길게는 1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녹음해요. 그런데 저는 이미 모든 소나타를 라이브로 연주했었고, 에세이까지 써놓은 상태라서 28일 만에 녹음을 했어요. 음반의 곡 구성과 해설까지 함께 출반을 했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음반은 2012년 6월 빌보드 클래식차트 1위, 아이튠즈 차트 1위에 올랐다. 그녀는 가수 싸이보다 먼저 빌보드 차트를 점령한 한국 출신 음악인이 됐다. 그 덕분에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이름을 국내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그녀의 한국 데뷔무대는 2013년에 이뤄졌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첫 독주회가 열렸는데, 가족과 사촌, 소꿉친구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연주를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날 연주회에서는 모리스 라벨의 ‘고귀하고 감상적인 왈츠’, 쇼팽의 ‘발라드 1~4번’,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9번 ‘해머클라비어’를 연주했다. 그녀는 연주가 끝난 후 펑펑 울었다. 1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연주를 하면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있던 외로움과 설움,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를 내려놓은 것이다.

그녀는 2015년 스위스 뇌샤텔 콘서바토리에서 성담 스님과 함께 공연을 했다. 〈사진=도서출판 청미래〉

2014년에는 어머니의 권유로 인연을 맺은 성담 스님과 특별공연도 펼쳤다. 성담 스님은 범패의 하나인 겉채비(바깥채비)들이 부르는 노래인 ‘짓소리’를 했다. 그녀는 스님의 짓소리 영상을 담당교수였던 라비노비치에게 소개했고, 그는 처음 듣는 소리에 감동해 서양에도 이 음악을 널리 알리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피아노와 짓소리 조합을 통해 관객들이 각자의 불성(佛性)을 깨닫길 기원하며 유럽 합동공연을 기획했다. 2015년 7월 더블린에서 열린 국제피아노페스티벌에 초청돼 스님과 함께 공연을 했다. 그녀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을 연주하면, 연주 사이 성담 스님이 짓소리를 했다. 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4시간 명상 프로젝트’에도 초청돼 피아노와 짓소리의 조합을 많은 관객에게 들려줬다.

음악으로 세상에 회향하고파

꾸준히 공연활동을 펼친 그녀는 프랑스·벨기에를 거쳐 스위스 뇌샤텔에 정착했다. 스위스에서 생활하면서 로잔 법계사 주지를 맡고 있는 무진 스님을 알게 됐다. 스님은 외국인 국적으로 한국에서 계를 받은 비구니 스님이다. 외국인 스님으로는 처음으로 2007년 조계종 포교대상 원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무진 스님과의 인연으로 여러 비구니 스님을 알게 됐고, 2016년 비구니 자우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는 비로자나국제선원 창립 10주년 기념공연에도 참여했다.

“저는 스님들을 좋아하는데, 특히 비구니 스님들을 더 좋아하고 존경해요. 스님이라는 삶 자체가 쉽지 않은데, 비구니 스님으로 사는 삶은 더 힘들잖아요. 그래서 비구니 스님들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그분들을 공연에 초대하기도 하고, 만약 공연을 요청해 오면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 흔쾌히 연주를 해드리고 있어요.”

20여 년의 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 1년. 현재 후배들에게 강의하는 재미에 푹 빠져 살고 있다. 그녀는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시절 등록금을 거의 내지 않고 공부를 했다. 이 음악원은 1년에 15명 정도 신입생을 뽑을 만큼 문턱이 높지만, 그만큼 받는 혜택이 많다. 그녀는 그때 받았던 혜택을 지금 베푼다는 생각으로 전국의 예중·예고·예대를 찾아다니며 강의를 하고 있다. 음악적인 강연과 함께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도 빼놓지 않고 있다.

그녀는 음악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항상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게 가능하니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외국생활은 너무 힘들었지만, 시간이 흘러 되돌아보았을 때 그 과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 잘 될거야.’라는 믿음으로 현재를 살아가라.”고 당부한다.

2019년 스위스 뇌샤텔지역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위대한음악의 힘’ 강연 모습. 〈사진=다나기획〉

또 현재의 연습실 1층에 스튜디오를 만들어 야외무대를 활용한 온라인 공연과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재학시절 부전공으로 배운 지휘공연도 계획하고 있다. 이 공연들 역시 차상위계층·한부모가정·국가유공자·장애인·대학생·청소년 등 문화 소외계층에게는 입장료를 할인해 줄 계획이다.

“앞으로 사회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싶어요. 피아노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작가나 강연 등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기회가 된다면 산사음악회나 불교단체 등에서도 많은 공연을 펼치고 싶어요. 저는 대중들에게 음악이 하나의 언어로 다가가 우리는 모두 하나고, 인간은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어요.”

앞으로도 그녀의 연주가 힘들고 차별받고 고통 속을 헤매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부처님의 법음(法音), 자비의 음성으로 널리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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