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자를 의지했듯
불보살님 의지처 삼아
불안·두려움 걷어내세요!”

토끼가 달린다

나는 새하얀 털에, 두 귀가 길고, 눈은 빨갛고, 앞다리보다 뒷다리가 길어서 오르막길에서는 누구 못지않게 빠르게 달릴 수 있는 토끼입니다. 오랜 옛날, 나는 야자나무 덤불숲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토끼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호젓하게 지내고 있었지요. 어느 날 숲에서 먹이를 구해와 보금자리에 느긋하게 누웠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이 땅이 꺼지면 난 어디로 가야할까?’

땅이 꺼지는데 과연 도망갈 곳이나 있을까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바로 옆에서 ‘툭’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게 무슨 소릴까요? 이게 바로 땅이 꺼지는 소리가 아닐까요? 그러잖아도 마침 그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주위를 살폈습니다. 이상한 조짐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난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 ‘툭’하는 소리, 그 소리는 이 대지가 흔들려서 갈라질 때 나는 소리가 분명했습니다.

이럴 땐 그저 달아나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다 땅속으로 파묻혀버리면 안 되니까요. 나처럼 힘이 약한 토끼는 그 흙더미를 파헤치고 나올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그러다 죽으면. 아, 안 됩니다. 난 죽기 싫습니다. 죽으면 안 됩니다.

난 무조건 앞으로 튀어나갔습니다. 뒤에서는 대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기 무서워 그저 앞만 보며 뛰었습니다.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뛰는데 이웃 토끼 한 마리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리 사색이 되어 뛰어가는 거야?”

“땅이 꺼지고 있어, 그 소리를 들었단 말야.”

난 소리쳤지요. 그러자 이웃 토끼가 나를 따라 뛰기 시작했고 바로 옆에 무리지어 살고 있던 토끼들이 하나둘 귀를 쫑긋 세우더니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무려 십만 마리나 되는 토끼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다른 동물들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습니다. 사슴이 토끼 뒤를 따라 뛰고 그 뒤를 따라 멧돼지·고라니·물소·들소·코뿔소·호랑이·사자가 덩달아 내달렸고, 코끼리까지 뛰기 시작했습니다. 맨 앞에서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는 내 뒤로 동물들이 줄줄이 뛰기 시작했는데 훗날 말을 들어보자니 그 대열이 무려 1요자나(약 10킬로미터)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커다란 사자 한 마리가 앞을 가로막더니 크게 포효했습니다. 사자왕이 세 번이나 울부짖는 바람에 나와 내 뒤를 따라 달리던 동물들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사자왕이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왜 이리 도망치고 있는가?”

“땅이 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이 꺼지는 광경을 본 자는 누구인가?”

사자가 코끼리에게 물었습니다. 코끼리가 답했습니다.

“우리는 못 봤습니다. 우리 앞에서 달리던 사자들은 알고 있을 겁니다.”

사자 무리들이 말했습니다.

“우리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호랑이들은 봤을 것입니다.”

호랑이들 대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보다 앞서 달리던 코뿔소가 알 것이라 답했고, 코뿔소는 들소들이, 들소들은 물소들이, 물소들은 고라니들이, 고라니들은 멧돼지들이, 멧돼지들은 사슴들이 봤을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슴들이 말했습니다.

“우리도 모릅니다. 토끼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에 따라서 달렸습니다. 아마 토끼들은 땅이 꺼지는 광경을 보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사자왕은 십만 마리 토끼들에게 땅이 꺼지는 광경을 보았느냐고 물었고, 토끼들은 나를 가리키며 “이 친구가 그렇게 소리치면서 달아났기에 우리도 따라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자왕은 그 소리가 난 곳으로 돌아가 보자며 자기 등에 올라타라고 했습니다. 나를 태운 사자왕은 한참을 달려서 내 보금자리가 있던 야자나무 숲에 도착했고,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소리가 났던 곳을 가리켰습니다.

“바로 저기에서 땅이 꺼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사자왕은 용감하게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습니다.

“나무 열매 하나가 떨어져있구나. 그러니까 토끼, 너는 이 열매 떨어지는 소리에 겁을 집어먹고 땅이 꺼진다며 달아났단 말이지?”

‘설마 그럴 리가…….’ 하면서 난 용기를 내서 그곳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내 눈으로 나를 그토록 겁을 주어 내달리게 했던 것이 별 볼 일없는 나무열매였음을 확인했습니다. 사자왕은 다시 나를 태우고 동물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날듯이 달려 그들에게 이 사실을 들려주면서 “그대들은 겁을 내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라며 안심시켜주었습니다.(〈자타카〉322번째 이야기)

그때 사자왕이 우리를 멈춰 세우지 않았다면 모든 동물들은 바로 앞 절벽으로까지 내달렸을 테고, 그러다 끝내 깊은 바다 속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불러올 뻔 한 나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숱한 소리가 일어났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소리도 많고 깊은 뜻을 담고 있는 소리도 많습니다. 귀는 언제나 열려 있기에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 앞에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렇다고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일희일비하면서 경거망동할 수는 없습니다. 나뭇가지에서 잘 익은 열매가 툭 떨어졌는데도 세상이 끝난 것처럼 놀라서 도망친 나를 보십시오. 그리고 확인해보지도 않고 그런 나를 따라 도망친 동료들을 보십시오.

티베트 불교사원이나 생활공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벽화다. 코끼리 위에 원숭이, 토끼, 새가 차례대로 올라타고 있다. 네 동물이 힘을 합쳐 과일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는 모습이다. 8세기경 인도 밀교를 티베트에 전수한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의 우화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서로 도와가며 나무를 심고 가꾼 후 달콤한 열매(행복)를 나눈다는 내용이다.

여린 생명의 마지노선

작고 여린 토끼인 나는 사실 주변에서 작은 소리만 들려도 오싹 겁이 납니다. 맹수들이 덮칠까봐 그렇습니다. 나는 저들의 한입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죽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사소한 소리에도 죽기 살기로 일단 달아납니다. 이런 내 모습이 어떠신가요? 가련하기 짝이 없는 미약한 중생임에 틀림이 없지요? 그런데 이건 아셔야 합니다. 그 가여운 생명들의 마지노선이 바로 우리들 토끼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소설가 박범신은 우리 토끼를 제목으로 한 단편소설에서 이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잠수함 이야기를 아시오? 옛날의 잠수함은 어떻게 함 내의 공기 중에서 산소 포함량을 진단해냈는지…(중략)… 토끼를 태웠답니다. 그래서 토끼의 호흡이 정상에서 벗어날 때부터 여섯 시간을 최후의 시간으로 삼았소. 말하자면 토끼가 허덕거리기 시작하여 여섯 시간 후엔 모두 질식하여 죽게 되는 거요. 그 최후의 여섯 시간 동안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끝장이란 말이오.”(〈토끼와 잠수함〉 중에서)

공권력이 시민을 함부로 위협하고 폭력을 행사해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쓴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생계 때문에 법규를 어긴 힘없는 서민들이 경찰호송차에 태워져 공권력의 위압에 한없이 떨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요.

세상은 갑과 을의 권력관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갑은 을을, 을은 병을, 병은 정을…….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찾아내어 한풀이라도 하려는 듯 그들을 괴롭힙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기본권이 짓밟힌 이들은 잠수함의 토끼처럼 허덕거리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약한 자들이 허덕거릴 때 “억울하면 출세해.”라고 으스대는 것이 세상 기득권자들의 모습입니다. 약한 자들은 그들 앞에서 더욱 겁을 집어먹고 비굴하게 굴며 심지어 악행도 저지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요.

하지만 앞서 〈자타카〉 이야기처럼, 잔뜩 겁을 먹은 토끼인 나를 등에 태우고서 그 불안의 근원으로 데리고 간 사자도 있습니다. 나는 사자 덕분에 내 눈으로 확인했고, 내 어리석음을 알아차리고 두려움을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바른 안목을 지니고 보니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두려움이 시작된 자리를 찾아야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하나같이 미약합니다. 누구나 상처받기를 두려워하고, 죽을까봐 겁을 먹지요. 마음공부를 하면 그런 두려움을 시원스레 벗어버릴 수 있다지만 중생인 이상, 그런 마음공부가 쉽지 않음을 인정해야겠습니다.

바른 견해를 지니고 있지 못하기에 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착각한 것을 고쳐 알지도 못한 채 자신의 착각을 사실이라 믿어버리는 것이 중생입니다. 착각하는 것에서 끝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착각을 진실이라 믿고서 걸핏하면 달아납니다. 마치 어둔 밤 산길에서 똬리를 튼 뱀을 보고 놀라 달아나는 사람처럼 말이지요. 그는 겁먹고 달아나느라 어둔 산길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상처가 나고 크게 다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두려움은 더욱 커지지요.

다음 날 환한 대낮이 되면 어떤 용감한 이가 지난밤의 소동을 떠올리며 뱀을 본 그곳을 다시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커다란 뱀이 똬리를 틀었다.’고 본 것이 다름 아닌 굵은 동아줄이었음을 확인합니다. 확인하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치지도 않고 도망치느라 다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지난밤에 본 것이 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착각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에 굳게 자리 잡고, 그 사람은 영원히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나무 열매 떨어지는 소리를 땅이 꺼지는 소리라 제멋대로 판단해버리고 무조건 달아나기만 한 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수행은 그 두려움의 근원 속으로 찾아가는 게 아닐까 합니다. 내가 본 것이 제대로 본 것인지, 내가 들은 것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혹시 어떤 착각이 나를 이렇게 윤회의 벌판으로 내몬 것은 아닌지 더듬더듬 찾아가 보는 것이 수행입니다.

토끼인 내가 맹수처럼 뭇 동물들을 힘으로 제압할 수는 없습니다. 깊고 깊은 지혜를 얻어 현자가 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자신의 두 다리로 내가 헛짚어 내달려온 그 길로 되돌아가 무엇이 나를 끝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날뛰게 했는지를 바로 보는 일은 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본다는 것, 이것은 나약한 중생이 제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첫 번째 시도입니다. 토끼처럼 겁에 질려 내달리기만 하는 약한 중생이라면 용기를 내어 불안의 근원을 찾아가보시기를 권합니다. 두렵다고요? 걱정 마십시오. 겁이 나서 감히 돌아가 볼 생각을 하지 못할 때 이런 작고 여린 나를 등에 태우고 달려가 주는 사자를 기억해보십시오. 그 사자는 바로 보살이요 부처입니다. 그 나약한 중생의 마음에 두려움을 없애주는 불보살님이 계신데 뭐가 두렵습니까? 불보살님이 사자왕처럼 의지처가 되어주실 겁니다. 그러니 사자를 믿은 토끼처럼 불보살님을 믿고서 그 길을 걸어가 봅시다. 내 눈으로 제대로 보는 것만이 나를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에서 풀려나 저 활짝 열린 큰 길을 자유롭게 활보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 길만이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길입니다. 그렇게 범부의 삶에서 구도자의 삶으로, 나아가 불보살의 삶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미령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사·북칼럼니스트이며, 경전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시시한 인생은 없다〉 등이 있다. 또 〈직지〉·〈대당서역기〉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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