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한 교육열은 ‘고단한 삶’이란 장애를 떨쳐내려는 몸부림

과연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을까? 어머니는 갖은 곤욕과 비탄을 벗어 버리고 제2의 인생을 살아보기로 작심을 하셨습니다.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탓일까? 아버지가 자신에게로 온전히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탓일까? 어머니는 냉정하게 새 인생의 문을 두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삶이 아니라 이미 자신은 아무것도 될 수 없음을 다시 확인하고 생각해낸 새로운 인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무래도 ‘그냥 되는대로 하루하루 사는 일’에는 손을 들 수 없는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목표가 필요했고 그 목표를 위해 진한 노력을 하는 것만이 그 당시 어머니가 소위 가치를 두는 삶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딸 교육에 대한 욕망

“나에게 가장 많은 것은 딸들이니 이 딸들을 이 세상 누구보다 훌륭하게 만들어 보자.”라는 새 목표의 깃발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시절 그것은 가당치도 않는 꿈이었습니다. 과연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전쟁이 끝난 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1955년은 배고픈 사람이 많은 시기였고 특히 여성들에게 특별한 편견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나라는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시기는 다른 나라에 비해 그리 늦지는 않습니다. 프랑스가 1944년이고, 우리나라는 1948년이었으니 많이 늦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이었지요. 그러나 참정권과 관계없이 여성비하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었고, 그때도 여성교육은 시시한 말거리로 전락하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우리 고향 같은 시골에서는 더 상식이상으로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높은 교육만 받으면 사회에서 이름을 알리는, 소위 말해 유리천장을 뚫으리라 믿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에게 하나밖에 없는 명문여고를 졸업한 동서에게 학력이 밀리는 형편이라 더욱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예 학교 앞을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어머니의 결의에는 피가 묻어났습니다. 둘째 딸이 마산으로 출가한 후 세상에 마산이라는 나라, 사람 사는 곳이 있다는 걸 안 어머니는 셋째 딸을 마산여고로 보낼 결심을 하셨습니다. 지난 호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도시 중에 아는 도시가 마산밖에 몰랐던 시기였어요.

마산. 그 멀고도 먼 마산을 꿈꾸다니. 그리고 백방으로 뛰어 다니시면서 길을 찾았고, 마산여고에 보낼 일을 거창여중 담임선생님께 의논했더니 그 선생님이 펄쩍 뛰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야말로 기적처럼 셋째 딸을 마산여고에 입학시켰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어머니는 대단한 여성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 일입니다. 무려 1955년에 말입니다.

아버지에겐 단 한마디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앞으로 저고리하나도 안사 입을 테니 가시나들 교육비는 내가 달라는 대로 주시오.” 아버지는 그때 돈이 많았습니다. 부자였습니다. 우리는 늘 부잣집 딸이라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 집에는 돈은 있었으나 사랑은 없었습니다. 메마르고 그늘이 짙고 가족 간의 시선을 피하며 살았습니다. 정원에만 꽃들의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정원에 계시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우리 집에서 끓이는 속을 재워 줄 수 있는 장소는 그곳뿐이었습니다.

언제나 침묵하거나 싸움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일어난 일이긴 했지만 아버지도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을 뿐입니다. 아버지는 타고난 천성이 외로움을 타는 성격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머니가 보듬거나 채워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이며, 이성적이고 인간이 비틀거릴 수 있다는 것을 참아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처음과 끝이 모두 감상적이었습니다. 마음의 날개가 컸고 뿌리를 내리는 것에 우둔했습니다. 그래서 자꾸 여자도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위기가 왔습니다. 셋째 딸을 마산여고에 보낸 것을 안 집안 어른 다섯 명이 우리 집으로 어머니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게 세 번을 오셨었지요. 기억으로는 그 어른들이라는 분들은 모두 검은 갓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당장 딸년을 집으로 데리고 오라는 일침이었습니다. “어디 가시나를 타지에 보내느냐?”였습니다. 데리고 오지 않으면 에미를 쫓아낸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침묵했고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울지도 웃지도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던 어머니는 과연 셋째 딸을 집으로 데리고 왔을까요? 1년이 지나고 넷째 딸마저 마산여고로 보냈습니다. 누가 어머니를 이길 수 있었을까요. 원래 막나가는 여자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게 아닐 런지요. 어머니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아버지도 이 문제에 대해선 어머니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 목숨을 내 놓은 기라요.”

딸들의 교육만이 자신이 살아날 길이란 것을 굳게 믿은 어머니는 거친 폭력적 언사로 아버지를 눌렀으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 한마디 던지지 못했습니다. 사랑과 교육과 딸이라는 모든 장애를 걸머쥔,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이 모두를 장애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은 아예 받지 못했고, 교육은 애당초 없던 것이며, 장손의 며느리로 아들을 쑥쑥 낳지도 못한 그 모든 자신의 운명을 어머니는 장애로 판단했습니다.

그 장애를 딸들의 교육을 통해 이겨내 보겠다는 어머니의 피 묻은 결심을 누가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목숨을 내놓았다하니 아버지도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마도 조금씩 더 어머니를 떠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포근히 감싸줄 등받이가 아버지에겐 필요했을 것입니다.

죽다가 살아나다

아버지의 방황도 극점에 달하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넷째를 마산여고로 보낸 그해 여름입니다. 방학이라 언니들이 다 집에 있던 어느 날, 어머니가 수박과 참외를 잔뜩 사다 놓고 우리보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우린 즐겁게 먹었지요. 그런데 셋째 언니가 엄마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넷째 언니도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내 아래 두 동생은 잠이 들고 나도 잠이 오던 그 시간에 언니가 말했습니다.

“내 오늘밤 엄마를 지켜 볼 끼다.”

어머니가 다락에 들어가 오래 있다가 나왔다는 것만 알고 나는 잠에 빠졌습니다. 새벽 3시쯤이었을 것입니다. 잠결에 언니들의 비명 섞인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고 셋째 언니는 내 손을 잡고 무조건 성 의사집(어머니가 다니시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나는 속옷바람이었습니다. 물론 맨발로 달렸지요.

“엄마가 죽었다 안 카나! 어젯밤에 약을 먹었다 안 카나!”

내 속옷 바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죽었다니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 성 의사집 문을 야밤에 탕탕탕 두드리고 두드리고 결국은 그 안방까지 달려갔던 기억은 그런 비극 속에서도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엄마는 병원으로 실려 갔고, 결국 살아나기는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도 납니다. “와, 와, 날 살렸노. 와, 날 살렸어!”하고 통곡하던 어머니를 어찌 잊겠습니까? 아들이 죽어도 약만은 먹지 않았던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의 새로운 방황과 여자, 그리고 집안의 돈이 어디론가 휩쓸려 간 사실 등을 어머니가 알게 되면서 이 세상을 끝낼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더는 못 보겠다는 생각이 어머니의 ‘끝’을 밀어 붙인 것입니다. 목숨을 걸었다는 딸들의 교육도 그 마지막 생각에서는 빛을 잃었던 셈입니다.

시간과 세월은 어머니를 달래고 힘을 부추겼습니다. 그때 기억으로 어머니는 몇 달을 바보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무슨 계기가 있었을까요? 어머니는 다시 그 다부지고 밀어붙이는 성격 그대로 집안에는 먼지하나도 허락 안하실 듯 쓸고 닦는 습관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지만 그 당시의 공포와 두려움, 죽음이라는 이상야릇한 감정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적어도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일은 잊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언니들 사이 동생들 사이 그 야릇한 이야기는 우리들의 가슴한쪽으로 밀려 났지요. 조금씩 없는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는 사라지고 하나는 살아났습니다. 어머니의 딸들에 대한 무지막지한 교육이 분명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술과 담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너무 많이. 담배는 몸에 해롭다고 하면 “이것은 내 벗이고 낙이다.”라고 하시던 말씀은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자주 술을 먹고 우는 밤들이 많았습니다. 지겨웠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저엉말 저 꼴 보기 싫다.”

그 담배 그 술 안에 어머니의 비통한 한이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 얼음 같은 고독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술과 담배로 자신을 부추기면서 딸들에 대한 기대는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셋째 딸이 딸 여섯 중에 가장 예뻤습니다. 셋째가 여고 3학년 방학 때 남자들이 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셋째를 만나려고 애간장을 태웠습니다.

어머니가 빗자루로 남자들을 내쫓았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와 앉아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엔 잘 생긴 남자도 있었습니다. 빗자루로 매를 맞고도 그대로 앉아 있는 남자도 있었습니다. 그 남자 괜찮았어요. 그리고 언니가 어떤 남자를 만나는 것도 난 본 적이 있습니다.

편지 심부름도 했었지요. 연애편지 전해주는 일이 괴로운 일이냐구요? 아닙니다. 대리연애의 만족감이 있었어요. 또 어머니 몰래한 비밀이라 쾌감 같은 것도 있었구요. 언니가 슬쩍 용돈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예쁜 옷을 빌려 주기도 했었지요. 언니들은 그렇게 어머니의 목숨을 건 도시교육을 받으며, 모두 연애하고 결혼하는 쪽으로 가는 듯 했습니다. 딸들의 도시교육으로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진화를 계속해서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라도 탁 이름대면 아는 인간하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지요. 어머니의 욕심은 과했습니다. 그런데 언니들은 어머니가 마치 연애하라고 마산까지 보낸 듯 했습니다. 에그그그…….

어머니는 펄펄 뛰었습니다. 연애는 안 된다고요. 여고졸업하면 서울 가서 대학을 다니고, 취직해서 돈도 벌고 사회적으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야말로 밥 먹고 하는 말은 늘 딸들의 사회적인 그 무엇이었습니다. 도무지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래야 아마도 어머니의 한이 풀릴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셋째 언니는 이화여대 가정과를 지원했다가 떨어졌고 그냥 결혼을 해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절망했습니다. 가정과에 떨어지면 다른 과를 보내면 되는데 우리는 모두 무식했습니다. 넷째 딸은 성악이 전공이었습니다. 마산여고 음악선생님이 서울대 성악과를 가라고 이미 정해주었습니다. 그 언니가 3학년 때 마산여고 가을축제가 열리고 있었지요. 심사위원으로 그 당시 젊은 가수 현인 씨를 불렀답니다. 학생들이 모두 노래를 부르는데 별 재미가 없자 학예담당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영자야 네가 나가 하나 불러라.”

언니가 부른 노래는 50년도에 가장 유행했던 ‘산장의 여인’이었습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있네.” 애 터지고 소름 돋고 숨넘어가게 부른 이 노래는 현인 씨를 반하게 했습니다.

현인 씨는 다음날 거창 우리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앞에 큰절을 하시고는 말했습니다.

“영자를 내게 주세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부르는 가수를 만들겠습니다.”

결국 넷째 언니는 음악과도 가수도 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죽어도 가수는 안 된다고 악을 쓰고 정치에 관심을 둔 삼촌은 이 사실을 알고 바로 우리 집에 와서 현인 씨를 버스에 태워 보냈습니다. 삼촌은 국회 입성을 눈앞에 둔 사람이라 집안에 딴따라 가수가 나온다는 것은 거의 금기였습니다. 거의 망한 집으로 보기 일쑤였기에 우리는 이것도 없었던 일로 쉬쉬해 버렸습니다. 그래 없었던 일이야. 그런데 넷째의 인생은 막막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한 토막 연극이 끝났습니다.

여성국극단과 가출

저의 여중 2학년 봄이 생각납니다. 고향극장에는 봄이면 임춘행·김진진 등의 여성국극단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낮부터 북과 꽹과리를 치곤했는데 나는 마음이 들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 가자! 나는 언니들 옷을 훔쳐 입고 보자기에 무엇인가를 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임춘앵과 김진진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갔지요. 소위 가출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내가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했더니 어떤 여자가 말했습니다. 저는 누가 누군지도 몰랐지요.

“에구구, 집으로 돌아가라 아가야.”

나는 보자기를 안고 마루 끝에 앉아 있었는데 저녁때가 될 무렵, 어머니가 들이닥쳐 저를 끌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께 안 죽을 만큼 맞았습니다. 충분히 맞을 일을 했습니다. 그때 그 북소리는 왜 그렇게 이 마음을 안절부절 못하게 했을까요? 그때도 그렇게 한 토막 연극이 끝났습니다.

답답한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중학교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입니다. 나는 절대로 도회지로 나가지 않겠다고 앞서 강력하게 어머니께 외쳤습니다.

“난 안가. 여기서 공부하고 유명한 사람이 될 거야.”

결국 거창여고 1학년에 입학을 했습니다. 내 고집도 어머니 못지않아서 도회지로 가지 않고 여고를 다니고 있었지요. 그런데 봄 학기를 다니고 가을학기로 접어든 첫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니 낼 학교 안가도 된다.”

“왜?”

“내가 부산에 학교하나 얻어 놨다. 이틀 후에 부산 갈끼다.”

“왜 부산이야?”

“마산은 터가 나쁘다. 니는 부산으로 갈끼다.”

울고불고 어머니께 대들고 별짓을 다 했지만 나는 이틀 후 부산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도 못보고 나는 부산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고향을, 어머니 아버지를 떠나는 것입니다. 조금은 불안했습니다. 아니 많이 불안했습니다.

신달자
시인.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첫 시집 〈봉헌문자〉를 비롯해 수필집 〈나이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을 펴냈다. 만해대상 문예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공초 오상순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부문),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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