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례에 깃든
선인들의 창조성
참으로 자랑스럽다

호주의 한 댄서가 종이로 만든 독특한 옷을 세상에 선보인 적이 있다. 코로나19로 호텔에서 격리기간을 보내던 중, 급식이 담긴 종이가방이 쌓이자 그것을 해체하여 만든 것이었다. 그런가하면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코로나19로 임종도 못한 채 떠나보낸 자식들이, 사십구재를 치를 때 관욕(灌浴)에 사용된 지의(紙衣)를 보고 눈물이 쏟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떠날 때 옆을 지켜드리지 못했기에, 어머니를 상징하는 작은 지의가 영정 속의 사진보다 왠지 더 서러웠던 것이다.

코로나19와 관련해 각기 삶과 죽음의 영역에서 접한 두 가지 종이옷은, ‘실제 입을 수 있는 옷’과 ‘상징적 옷’이라는 점이 달랐다. 이처럼 천도재의 하단 관욕은 망자가 생전에 지은 업을 씻고 새 옷을 갈아입는 의식으로, 지의는 곧 망자를 상징한다. 이때 갈아입는 새 옷은 ‘해탈복’이니,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소중한 시점에 지의를 대상으로 씻음과 태움의 의식을 행함으로써 존재의 변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재작년 조상의례를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중국학자가 발표하고 필자가 토론하는 과정에, 직접 종이로 지의를 접어 발표자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우리는 관욕에서 백지로 바지저고리를 접어 쓰는 데 비해 중국에서는 의식문만 외기 때문이다. 발표자는 어릴 때부터 우리가 종이접기로 즐겨 만들었던 바지저고리를 본 적이 없어 신기해하며 그것을 중국으로 가져갔다.

관욕은 중국에서 설행한 수륙재의 한 절차인데,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에 중국의 의식문을 참조해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를 펴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국에 없는 가지화의편(加持化衣篇)이 들어 있어 주목된다. ‘가지화의’란 영가가 목욕을 함으로써 명부의 옷이 해탈복으로 변하게 된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업을 씻고 해탈복을 갖추어 입는 의식문 염송으로 간략히 다루었지만, 우리는 명부의 옷이 새 옷으로 바뀌는 ‘화의’의 과정을 중요하게 의미화 한 것이다.

이처럼 관욕에서 구상화된 상징물로 지의를 만들어 쓰기까지는 의례적 사고와 창조적 발상이 필요하다. 의례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소통하는 길을 만드는 행위이고, 일상의 방식과 다른 상징적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불교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관념적ㆍ밀교적 성격의 관욕이 발달한 셈인데, 이는 불교의례 일반에서도 동일하다. 일본에서는 생활불교가 정착되었지만 불교의 역할은 장례에 집중되어 있고 의례가 발달되지 않아, 우리의 수륙재ㆍ영산재는 그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의례로써 어른으로 진입하고, 의례로써 이승과 저승의 세계를 건너는 문법으로 삼았다. 집과 마을 곳곳에 신을 상정하고 자연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신성과 소통하는 일이 삶의 리듬이자 저력이었다.

4차혁명을 외치며 바쁘게 돌아가는 오늘날, 의례는 비효율적인 영역으로 밀려나 사회전반에서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런데 불교의례는 점차 그 가치를 되찾아가고 있으니 불교가 전통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명부옷’이 ‘해탈복’으로 변하는 가지화의편을 만들고, 한지로 작은 바지저고리를 접어 상징물로 쓴 옛 선인들의 창조성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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